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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달 수영을 배웠다. 몸을 씻고 강습용 수영복을 입고 모자와 안경을 쓴다. 소독약 냄새가 짙은 물속으로 들어가 배운 자세대로 팔 다리를 움직인다. 수영 강사의 지도와 안전 요원의 보호 아래 사람들은 같은 방향과 비슷한 속도로 물을 가른다. 끝에서 끝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 흐름 안에서 나는 눈에 띄지 않는다.    

평범하고 보통이라는 것은, 적당한 자세와 호흡으로 일정한 흐름을 따라 안정된 물을 가르는 것. 평범하고 보통의 사람은 적당하고 일정하고 안정된 사람이기에 당연하다는 듯 좋은 사람으로 여겨진다. 평범과 보통의 함정.

"평범해도 좋다. 보통이어도 좋다."


오카 슈조의 동화 <편지>를 읽다가 이 문장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몇 번을 서성거렸다. '평범과 보통'은 곧 '좋다'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읽힌다. 이 문장은 질문이 된다. 우리는 평범하고 보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어쩌면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을 이제야 묻는다.    

오카 슈조는 평범하고 보통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작가다. 성소수자나 장애인 또한 우리와 다르지 않은, 평범하고 보통인 사람들임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평범하고 보통인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의 동화들 속에는 풍족하지 않은 형편이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전한 작은 도움으로 삶은 살아볼 만한 것으로 만든 아저씨(편지)가 있는가 하면, 불편한 팔다리로 꿋꿋이 제 갈 길을 가던 장애인 아이의 발을 먼저 걸어 넘어뜨리고도 사과하지 않는 아이들(잇자국)과 말 못하는 장애인 아이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우려는 어른(귀뚜라미)이 있다.

모두 평범하고 보통인 우리들이다. 대단한 선의나 끔찍한 악의 없이 그저 무심한 말 한마디와 몸짓 하나로 고통스런 상처나 아픈 기억을 남길 수 있는.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수업 시간 내내 쏟아지는 졸음을 못 참고 꾸벅대다가 종이 울리자마자 책상에 엎드렸다. 누군가 내 이름을 자꾸 불렀다. 억지로 고개를 들어보니 교실 문 앞에 그 아이가 서 있었다. 문 앞에 서서 빌려간 교과서를 돌려달라고 했다. 책상 서랍을 뒤졌다. 그 아이의 교과서가 나왔다. 너무 졸려서 일어나기가 귀찮아 그대로 문을 향해 교과서를 던졌다.

분명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던져진 교과서는 공중에서 신경질적으로 펄럭대다가 이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아이는 교실로 걸어 들어와 허리를 굽혀 교과서를 주웠다. 바로 나가버려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미안했다. 하지만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다 알고 있었다. 그 아이는 소심하고 느리고 또 착하니까 빌린 교과서를 먼저 돌려주지 않아도 찾으러 올 것이고 그러면 그때 교과서를 던져도 되는 사람이라고.

그날 나는 그 아이에게 나빴다. 아직도 후회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과 작은 새>

<곰과 작은 새> 겉표지
 <곰과 작은 새> 겉표지
ⓒ 웅진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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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말하듯 이 그림책의 주인공은 곰과 작은 새다. 그렇지만 나에게 주인공은 곰과 들 고양이다.

곰과 작은 새는 단짝친구이다. 오늘 아침,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하는 바로 지금을 가장 좋아하는. 둘은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작은 새는 죽는다. 슬퍼하는 곰에게 숲속 친구들이 말한다. "곰아 이제 작은 새는 돌아오지 않아. 마음이 아프겠지만 잊어야지." 이 말에 곰은 몸도 마음도 깜깜한 방안에 가둔다.

상처받은 곰의 마음을 들고양이가 위로한다. "넌 이 작은 새랑 정말 친했구나. 작은 새가 죽어서 몹시 외로웠지?" 비로소 곰은 죽은 작은 새를 환한 볕이 드는 곳에 묻어줄 수 있었다.

숲속 친구들과 들고양이는 모두 평범하고 보통이다. 그런데 무엇이 달라 곰에게 상처를 주고 위로를 남겼을까. 나는 감정이입이라고 생각한다. 레베카 솔닛은 감정이입을 타인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을 자신이 겪었던 고통과 비교해 해석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일,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스스로에게 해주는 이야기라고 했다. 감정이입은 쉽거나 편하지 않다. 타고난 감각이 아니기에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굳이 나에게로 끌고 들어오는 일, 들고양이는 기꺼이 불편해지기를 선택했다.

들고양이가 배낭에서 손때가 묻은 탬버린을 꺼낸다. 곰은 그 탬버린이 누가 쳤던 것인지 들고양이에게도 함께 지내던 친구가 있었던 것인지 궁금했지만 끝내 묻지 않았다. 곰 역시 오직 '나'를 벗어나 '너'가 되어 보려고 한다. 그렇게 나란히 걷는 둘의 뒷모습이, 평범해도 좋다. 보통이어도 좋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더퍼스트미디어>에도 게재됩니다.



곰과 작은 새

유모토 카즈미 지음, 고향옥 옮김, 사카이 고마코 그림, 웅진주니어(2009)


태그:#그림책, #그림책에세이, #곰과작은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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