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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충주시 싸리재 현장에서의 합동위령제
▲ 싸리재 합동위령제 2007년 충주시 싸리재 현장에서의 합동위령제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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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환 아내 유정순(6.25 당시 31세)은 마을에서 30리(12km) 길을 걸어 충주시 싸리재를 찾았다. 싸리재 초입에 들어서자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코를 감싸 쥐고 산비탈을 걷다보니 파리 떼가 숲을 뒤덮었다. 파리 떼는 원자폭탄이 터진 후 발생한 버섯구름처럼 하늘에 떠 있었다. 싸리재 안쪽으로 걸어가니 시신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모든 시신에는 파리가 엉겨 붙었을 뿐만 아니라 구데기와 벌레들이 살을 파먹고 있었다. 유정순은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갔다. 같이 갔던 시아버지 정원필씨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시아버지가 "애미야 정신 차리고 아범을 찾아보자구나"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시신에 달라붙은 벌레들을 내쫓으며, 얼굴을 일일이 확인했다. 하지만 얼굴은 한 여름 날씨에 썩기도 했거니와 벌레들이 파먹어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배는 총독(銃毒)이 올라 임산부처럼 남산 만하게 부풀어 올랐다.

도저히 얼굴을 봐서는 남편을 찾을 수 없었다. 유정순은 이내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시아버지가 다가와 "애미야 바짓단 모양새를 보고 아범을 찾아보자"고 했다. 당시에는 옷을 아내들이 직접 바느질해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유정순이 남편을 찾기 시작했다. 시신은 수백 구였기에 일일이 뒤집어봐야 옷 모양새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시신을 뒤집어보기 위해 팔을 잡아 다녔더니 팔이 쑥 빠졌다. 유정순은 시신의 팔이 빠지면서 뒤로 발랑 넘어졌다. 시아버지가 다가와 부축을 했다. 정신을 차리고 계속 찾다보니 드디어 남편이 있었다. 정수환(1915년생)은 온 몸에 피칠갑을 한 상태로 누워 있었다. 정원필과 유정순은 시신을 붙안고 한참을 울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정원필 시신을 충주시 살미면 신당리까지 갖고 가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게나 담가를 갖고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와 수습하기로 하고 임시로 매장을 했다. 그리고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괭이를 꽂아 놨다. 다음날 마을 사람들과 다시 싸리재를 찾았는데, 괭이가 보이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가매장했던 곳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온종일을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누군가 착각해 시신을 가져 간 게 분명했다. 결국 유정순은 남편 시신 찾기를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충주시 살미면 마을별 보도연맹사건 피해자 현황
▲ 살미면 마을별 피해 현황 충주시 살미면 마을별 보도연맹사건 피해자 현황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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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구장님이 회의하러 오시래요"

박춘성은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밭으로 뛰어갔다. 땅에 머리를 박고 일하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자, 박춘성은 "아버지! 구장님이 회의하러 얼른 오시래요"라고 했다. 박금용(1910년생)은 하던 일손을 멈추고 바로 구장 집으로 갔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날 밤 집에 오지 않았고, 다음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이틀 후 박춘성 할머니가 사랑채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당시 7살이었던 박춘순(75세. 경기도 이천시)은 할머니한테 "할머니 왜 울어"라고 묻자, 할머니는 "니 애비가 죽었다"고 했다. 며칠 후 박춘순의 어머니와 오빠가 괭이를 들고 싸리재에 가서 아버지 시신을 수습해왔다. 박춘순이 살던 마을은 충주시 살미면 공이리였는데, 싸리재까지는 신당리와 마찬가지로 약 30리(km) 거리였다. 농사밖에 몰랐던 박금용은 보도연맹사건으로 싸리재에서 학살을 당했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터진 후 충주경찰서에서는 각 지서별로 보도연맹원을 소집한 후 충주경찰서로 이송시켰다. 충주에서는 6사단 7연대 헌병대가 보도연맹원 예비검속과 처형을 진두지휘했다.(진실화해위원회, 「충북지역 국민보도연맹사건 진실규명결정서」, 2009)

충주시 살미면 보도연맹원들은 살미지서의 지시에 의해 1950년 7월 3일~5일 사이에 살미면사무소로 쌀 2되를 가지고 집결했다. 신당리, 공이리, 문화리, 용천리 등 살미면 보도연맹원들은 면사무소로 갔다가, 충주경찰서로 바로 이송되었다.

이들은 다시 충주시 호암동 싸리재로 끌려가 6사단 7연대 헌병대의 지휘감독아래 1950년 7월 5일 경찰과 군인에 의해 총살되었다. 싸리재에서 학살된 충주시보도연맹원의 숫자는 정확히 확인되지 못했다. 다만 살미면 보도연맹원 73명이 이곳에서 학살되었음이 유족과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살미면 보도연맹원 17명이 싸리재에서 죽었음을 확인했다. 정부가 조사한 것과 주민들의 증언 사이에 56명의 차이가 발생했다. 물론 유족과 주민들이 주장하는 73명이 정확한 피해자 숫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유족과 주민들의 증언이 아무런 근거가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연유로 글쓴이는 살미면 마을별 전수조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살미면 마을 전수조사를 하는데 장애물이 있었다.

1980년에 착공한 충주댐 건설 공사로 살미면 농지 및 인구가 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특히 문화리, 무릉리가 완전히 수몰되고, 신당리와 내사리 일부 마을이 수몰되었다. 또한 나머지 마을도 많은 유족들이 도시로 이사하거나, 자식이 없어 증언을 확보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비수몰 지역 전체마을을 조사했다. 또한 수몰지역은 6.25 당시 마을에 살았던 이들을 찾아가 문의한 결과 총 63명이 파악되었다. 전체 피해자의 86%를 찾아낸 것이다. 마을별 피해실태는 다음 표와 같다.

충주시 살미면 마을별 피해실태 (마을 이름, 명)

공이리 11
신당리 17
내사리 6
신매리 1
무릉리 2
용천리 8
문화리 12
향산리 1
설운리 4
불명 1
계 63

충주의 모스크바, 엄정면과 살미면

엄정면은 흔히 충주의 모스크바라고 불리었다. 남로당 마지막 조직책 김삼룡이 엄정면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한국전쟁기에 엄정면에서 민간인학살사건이 다수 발생했는데, 보도연맹원도 수백 명 죽었다고 전해져왔다. 노촌 이구영(1920~2006)은 엄정면에서 보도연맹원이 800명 죽었다고 했다.(심지연,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2001) 하지만 엄정면 마을 전수조사를 한 결과 보도연맹사건 피해자는 10명에 못 미쳤다. 그런데 살미면에서는 왜 이렇게 피해가 컸을까? 그 해답은 소설가 최용탁(54세. 충주시)의 증언을 통해 찾아 볼 수 있다.

최용탁 증언에 의하면 살미면 보도연맹사건은 살미면 남로당 조직이 드러나면서 그 파장이 커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시절 살미면 최고 갑부 최씨 집안의 최문용(충주시 살미면 무릉리)은 일본 명치대(明治大)를 나와 귀국해 서울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해방 직전에는 징병기피자들을 모아 월악산에서 야산대를 조직했다. 해방 후에도 좌익활동을 계속해 살미면 농민들이 그의 영향으로 인해 남로당과 농민회에 다수 가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국민보도연맹이 만들어지면서 자동적으로 가입되게 되었고, 6.25가 발발하자 이념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살미면 보도연맹원들이 남로당이나 농민회에 가입한 전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싸리재에서의 학살사건은 불법적임이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 이미 확인되었다.

숙부님의 시신을 이장 못한 것이 평생 한으로 남아

살미면 문화리 최규용·최달용 형제도 싸리재에서 학살되었다. 최규용 아내 원계월(당시 36세)과 어머니 이정용(당시 61세)은 싸리재에 가서 두 사람의 시신을 어렵사리 확인했다. 최규용은 옷의 바느질 모양새를 보고 수습했고, 최달용은 손을 보고 수습했다. 최달용은 6.25 전 서울 영등포에서 공장을 다니다 손을 다쳐 시골로 내려온 상태였다.

즉 불구된 손으로 인해 시신을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은 가매장 해놓았다가, 형편이 되면 이장(移葬)하려고 한 것이다. 얼마 후 최규용은 이장을 해 선산에 모셨지만, 최달용은 후손이 없어 이장하지 않았다. 최조태(80세. 충주시 산척면)는 당시에 "숙부님의 시신을 이장하지 못한 것이 평생 한으로 남는다"고 한다.

충주시 살미면의 사례를 보면, 정부의 민간인학살사건 수습이 얼마나 미흡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유가족들의 한이 여전히 가슴 깊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눈물을 닦아 줄 이는 누구인가?


태그:#살미면, #보도연맹사건, #시신수습, #괭이, #충주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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