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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인숙 성범죄 대책위원장이 2일 오후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법무부 성범죄 대책위원회' 발족 및 법무부 장관 입장발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2018.2.2
 권인숙 성범죄 대책위원장이 2일 오후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법무부 성범죄 대책위원회' 발족 및 법무부 장관 입장발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20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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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벽두 서지현·임은정 검사, 최영미 시인 등의 용기 있는 고백으로 미투(#metoo) 운동이 확산되면서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 문화를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당장 검찰은 '성추행 사건 진상규명 조사단' 등을 구성해 검찰 내 성폭력 혐의자들에 대한 수사를 전개하고 있고, 노벨상 단골 후보였던 고은 시인과 연극계 대부로 알려진 이윤택씨는 거센 비난과 함께 문화계 은퇴에 직면하고 있다.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이들에 앞서 미투 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여성들과 이들을 위해 싸웠던 변호사들을 떠올렸다. 당사자 중에 하나가 서 검사 고발을 계기로 구성된 '법무부 성희롱·성범죄대책위원회' 위원장인 명지대 권인숙 교수(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원장, 이하 권인숙)이다.

권인숙은 이른바 80년대 중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더불어 전두환 정권 시기 일어났던 대표적 인권유린사건의 하나인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다.

당시 사건 경위는 이렇다. 1986년 5월 3일 인천지역 노동자, 학생, 시민들이 주축이 된 대규모 시위(5.3 인천민주항쟁)가 벌어지자 5공정권은 관련자들을 검거하기 위해 대대적인 수사와 체포 작전을 전개했다. 5.3 항쟁 한 달 후인 1986년 6월 4일 권인숙은 그의 정체를 의심한 통장의 신고로 자취하던 아파트에서 부천서 경찰관들에게 체포됐다. 조사 도중 권인숙이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사실이 드러났고, 여기에 당시 수배 중이던 조직 상층부의 소재를 추궁 받았다. 권인숙이 이튿날까지 수사를 받으면서도, 자백을 하지 않자 부천서 경찰서장은 상황실장인 문귀동(당시 경장)에게 수사를 지시했다.

문귀동은 권인숙이 계속 수사에 협조하지 않자 인면수심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당한 치욕은 권인숙의 항소이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여자로서 참을 수 없는 성적 추행을 당하고, 눈만 감으면 나타나던 문의 두꺼운 입술과 지퍼를 푼 채 드러낸 성기와 귀에 쟁쟁한 심한 욕설……."

권인숙은 이 사실을 가족에게 알렸으나 가족들은 큰 충격에 빠져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말라고 했다. 가족들이 선임한 변호사조차 권인숙이 입을 닫는다면 기소유예 정도로 풀려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의 언니는 "네가 그것을 계속 문제 삼고 나온다면 부모님이 아마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편지까지 보냈다. 저런 악마와 같은 짓을 할 정도라면 권인숙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어떻게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던 것이다.

권인숙, 가족조차 말렸지만 또다른 피해 없도록 성고문 폭로 결심

권인숙은 자살충동까지 일었지만 이와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기를 바라며 정권에 맞서기로 결심했다. 유치장에 있던 동료들은 권인숙이 털어놓은 끔찍한 성고문 사실을 듣고 치를 떨며 연대 단식을 했고, 그녀도 몸을 추스른 후 6월 28일부터 단식에 돌입했다. 이 일은 면회를 통해 외부로 알려졌다. 7월 1일, 권인숙을 면담한 변호사가 정법회의(민변의 전신) 변호사들에게 보고를 했고 신속히 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대책위는 이돈명, 홍성우, 조준희, 황인철 등 고참 변호사 네 명을 지휘부로 두고 조영래, 박원순, 이상수, 김상철 등을 실무 변호사로 구성했다. 이튿날인 7월 2일, 조영래는 선배인 홍성우 변호사와 더불어 권인숙을 면담했다.

조영래는 권인숙의 용기에 감탄하면서도 민주화운동의 의지를 꺾기 위해 성을 고문의 도구로 사용하는 독재정권의 추악함에 분노했다. 다음날 조영래 등은 문귀동을 인천지검에 고소하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변호인들은 "권양의 모든 주장은 단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다. 이 전대미문의 만행의 진상이 백일하에 공개되고 그 관련자들이 남김없이 의법처단되기 전까지는 이 나라의 모든 국민과 산천초목까지도 결코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권인숙은 공문서 변조 및 절도, 문서파손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변호인단은 이에 맞서 7월 5일에 문귀동과 옥봉환 부천경찰서장 등 관련 경찰관 6명을 상대로 독직폭행 및 가혹행위 혐의로 고발장을 제출했고, 문귀동은 무고 혐의로 맞고소하면서 사건이 널리 알려졌다.

변호인단의 고발을 접한 검찰은 서동권 검찰총장의 축소 수사 지시에 따라 7월 16일 "사건 당시 성모욕 행위는 없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동시에 성고문을 한 문귀동을 기소유예 처분하면서 "급진 좌경사상에 의한 노학연계투쟁을 전개했던 권양의 '성적모욕'의 허위사실 유포는 운동권이 성마저도 혁명의 도구로 쓴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검찰 스스로 어둠의 역사에 한 페이지를 추가한 것이다. 

언론도 이에 동조해 재야와 야당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검찰에서 배포한 보도 자료와 정권의 보도지침에 따르는데 급급했다. 주요 언론사 사회부장 이상 간부들은 7월 16일 성고문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발표를 전후해 문공부(현 문화체육부) 고위 관료의 인솔 하에 '간담회' 명목으로 부산, 도고온천 등에 놀러가 해당 사건의 보도에 대한 협조의 대가로 정부 당국이 준 거액의 촌지를 받아 챙겼다. 또한 법원 출입기자들도 검찰 발표 당일 인천지검 출발 전에 법원 기자실에 들른 법무부 고위 당국자로부터 두툼한 봉투를 나누어 받았다.

 1. 1986년 당시 재판정에 출석하는 조영래 변호사와 권인숙 2. 7월 27일 권인숙 성고문 사건 규탄대회에서 항의하는 인재근 3. 88년 5월 17일에 구속된 문귀동이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 4. 19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의 피의자 문귀동의 재판에 가위를 들고 온 시민
 1. 1986년 당시 재판정에 출석하는 조영래 변호사와 권인숙 2. 7월 27일 권인숙 성고문 사건 규탄대회에서 항의하는 인재근 3. 88년 5월 17일에 구속된 문귀동이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 4. 19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의 피의자 문귀동의 재판에 가위를 들고 온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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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과 언론의 적반하장적 태도에 분노한 당시 야당인 신한민주당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여성단체연합,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등 재야·시민단체는 7월 19일 '성고문/용공조작 범국민폭로대회'를 열었지만 경찰에 의해 원천 봉쇄되었고, 검찰의 수사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8월 25일 대한변협은 문귀동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결정에 대해 변호사 166명으로 재정신청 대리인단을 구성하고 9월 1일 법원에 재정신청을 냈지만 기각됐다. 이때 기각 결정문은 스스로 모순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고발장의 범죄 내용 대부분을 인정했지만, '문귀동이 손으로 그녀의 음부를 만지고 자신의 성기를 꺼내 그녀의 음부에 대어 수회 비비는 등 추행하였다'라는 권인숙의 진술은 목격한 증인이 없으므로 인정할 수 없고, 따라서 문귀동에 대한 검찰의 기소유예는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10월 3일 첫 공판이 열렸다. 이때 조영래는 박원순과 함께 당일 새벽녘까지 심혈을 기울여 썼던 변론요지서를 작성했다. "권양-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중략) 우리의 권양, 온 국민의 가슴속 깊은 곳에 은밀하고 고귀한 희망으로 자리 잡은 우리의 권양은, 즉각 석방되어야 합니다." 역사에 남을 변론요지가 발표되는 동안 법정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권인숙을 비롯해 변호인과 방청객들도 모두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권인숙과 변호인단의 투쟁과정에서 여성들이 보여준 용기 역시 강렬했다. 고려대 여학생 장근영·박은미·김영진은 1986년 7월 28일 인천지방검찰청 현관까지 들어가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이기까지 했다. 87년 2월 항소심 법정에서 민가협 회원 이중주(민정당사 점거사건로 구속된 서울대생 이기정의 어머니)는 재판장이 권인숙의 진술을 도중에 막는 것을 보고 격분, "성고문 범죄자를 비호하고 피해자를 재판하는 게 사법부냐"고 큰 소리로 항의했다.

법원 정리에게 끌려나가던 중 그녀는 교도관의 모자를 벗겨 재판부를 향해 던지며 "이 더러운 군사독재의 시녀들"이라고 외쳤다. 이틀 후 이중주는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신성한(?) 법정을 모독한 죄였다. 구치소에 입감되는 순간, 그녀는 다시 외쳤다. "우리 딸들, 여기 있느냐. 이 엄마가 너희 곁으로 왔다. 권인숙 재판부 하고 싸우다 들어왔다. 엄마가 왔으니 같이 더욱 힘내서 싸우자." 복도 양쪽 방에서 함성과 환영의 박수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11월 21일 권인숙은 징역 3년을 구형받았다. 이후 이 사건은 고등법원과 대법원을 거치며 계속 차일피일 미뤄졌다가, 1987년 4월에 권인숙 본인과 변호인단이 대법원에 상고 포기서를 제출하자, 권인숙은 1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권인숙은 1987년 7월 8일 석방되었고, 변호인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인 법원은 1988년 6월 문귀동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마침내 법원은 1990년 1월 "국가는 권인숙에게 성고문 사건으로 인한 위자료로 금 4천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한국 최초로 법적으로 제기된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

부천서 성고문사건이 공권력에 의한 인권탄압이었다면 '우 조교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은 한국 최초로 법적으로 제기된 성희롱 사건이라는데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 사건은 1992년 5월 29일부터 서울대 화학과에 실험실 기기담당 조교로 취업한 우아무개 조교가 초기 2, 3주간 신 교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겪으면서 시작됐다.

신 교수는 기기 교육을 빙자하여 키보드를 치고 있는 우 조교의 등에 자신의 가슴을 대거나, 속삭이듯 말을 하고, 반팔 소매옷의 팔위를 잡는 등 업무상 불필요한 고의적인 신체접촉을 했다. 우 조교는 신 교수의 행위에 점차 불쾌감과 정신적인 부담감을 갖게 되었고 신체접촉을 모면하기 위해 긴소매옷을 입는다거나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으며, 불쾌감과 거부의 의사 표시를 했다. 그러나 신 교수는 이를 무시하고 계속 성희롱을 했고 93년 6월 우 조교를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우 조교는 부당한 조처에 대해 해결을 바라는 진정서를 대학에 보냈으나 서울대는 진상조사는커녕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우 조교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에 자신이 당한 성희롱에 대해 상담을 하였으나 당시 법으로는 부당함을 해소할 방법이 없음을 확인했다. 결국 93년 8월 억울함을 알리는 대자보를 교내에 붙이게 되었고 대자보를 본 총학생회와 대학원 자치협의회, 여성문제동아리협의회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결성했다. 진상조사 결과 우 조교의 피해가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학교당국은 묵묵부답이었고 오히려 신 교수는 93년 9월 우 조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였다.

피해자이면서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한 우 조교는 자신이 당한 내용이 전형적인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이며 외국에서는 이미 법적으로 규제책이 제도화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성단체와 서울대 학생들이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했고 대책위를 대표해 박원순 중심으로 최은순, 이종걸 등이 변호를 맡았다. 변호인단은 1993년 10월 가해자인 신 교수와 대리감독자로서의 감독을 소홀히 한 서울대 총장, 서울대학교 설치운영자로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5000만 원의 배상을 요구하였다. 이는 직장 내 성희롱에 관한 한국 최초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이었다.

서울민사지방법원은 1994년 4월 신 교수의 행동을 '성적 접근 및 언동'이라고 표현하며 우 조교가 주장한 사실관계를 모두 인정했다. 재판부는 "성적 자유 및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근로조건에서 일할 권리를 침해했다"는 판단 아래 신 교수에게 총 3000만 원을 배상하라 명령했다. 직장 내 성희롱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당시 거액 배상 판결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 소송은 2심 패소 등 4번의 판결을 거치며 5년만인 1999년 6월 25일 파기 환송심에서 피고인 신 교수가 500만 원을 물어야 한다는 확정판결을 내렸다.

 1998년 2월 23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서울대조교 성희롱사건 승소 축하연. 맨 왼쪽에 있는 이가 현 박원순 서울시장이다.
 1998년 2월 23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서울대조교 성희롱사건 승소 축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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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결과에 대해 여성계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었던 상사에 의한 여직원 성희롱을 여성 인권에 대한 침해이자 처벌이 뒤따르는 범죄로 규정한 것이라서 이와 유사한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여성이 가해자에게 피해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법적인 기준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담당 변호사였던 박원순은 2015년 7월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열린 젠더 콘서트에서 "당시 우 조교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시댁 쪽에서는 이 사건을 빨리 취하하라고 했다. 2심에서 진 셈인데 그걸 대법원으로 가지고 가야 했다. 우 조교가 버텨주지 않았으면 힘들었을 텐데. 꿋꿋이 버텨줬다"고 회고했다.

우 조교 사건은 여성계 평가처럼 성희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변화하는 단초가 됐다. 우 조교가 확정판결을 받기 석 달 전 1999년 2월 정부는 직장 내 성희롱을 문제로 인식하게 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해 기존의 남녀고용평등법을 개정했다. 개정된 법은 사업주가 직장 내 성희롱을 예방하고 안전한 근로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의무를 부여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은 지옥 같은 상황에 굴하지 않은 피해자들과 인권과 젠더의식에 투철했던 변호사들이 함께 했기에 승리한 대장정 같은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권력과 갑을관계에 의한 성폭력 사태를 보면서 지난 수십 년간 변한 것이 뭐냐고 되물을 수 있다. 게다가 검찰뿐 아니라 진보를 자처한 사람들까지 연루된 것을 보고 배신감과 당혹감을 가진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앞선 이들이 남긴 유산은 작지 않다. 권인숙은 당당하게 진상규명의 주체가 되어 돌아왔고, 우 조교들의 후예들이 들고 일어나 괴물들의 범죄를 고발하고 있다.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변하고 있다. 그것이 미투 운동의 힘이다.


유영모.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씨알재단에서 홍보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씨알정신을 선양하고 시민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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