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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순례자들

 푸엔테 라 레이나에 있는 순례자 다리를 지나면서
 푸엔테 라 레이나에 있는 순례자 다리를 지나면서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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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소리를 처음 만난 것은 팜플로나 알베르게였다. 알베르게 리셉션 직원은 나를 스펜서와 유리가 있는 방과 다른 곳으로 배정했다. 내가 방 번호를 찾아 나서자 유리가 뒤따라와서 그곳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맞았다.

낯선 사람들로 가득 찬 방 2층 침대에서 홀로 짐을 풀 때 일행들과 떨어뜨린 리셉션 직원이 원망스러웠다. 스펜서는 내 침대가 어디에 있는지 보려고 반대편 입구에서부터 일일이 사람을 확인하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일렬로 2층 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는 그곳은 천장이 높았고 어두웠다. 스펜서는 한 시간 뒤에 점심을 같이 먹자면서 침대 번호를 확인하고 나갔다. 

침대는 서양인 키에 맞춘 듯했다. 거의 옥상에 올라가듯 사다리를 타야 2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길을 잘못 들어 예정된 거리보다 12km를 더 걸은 날이었다. 곧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2층을 힘들게 오르내려야 했다. 올라가면 내려올 일을 가급적 만들지 않기로 했다. 점심때 먹은 것을 다 토하고 일어났을 때 아래층 침대에 한국인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서야 리셉션 직원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스물일곱 살 그녀는 작년 이맘 때 즈음 생장피드포르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잘 때부터 슬슬 아랫배가 아파오더란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귀국했다. 장염이었다. 일 년 뒤, 다시 도전하기 위해서 마드리드행 비행기를 탔다. 피레네 산맥은 넘었기 때문에 그 다음 대도시인 팜플로나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그녀한테는 팜플로나가 이번 산티아고 순례길 첫 숙박 도시였다.

연석은 파리에서 이틀 머물렀을 때 같은 숙소를 사용했던 순례자였다. 나보다 한 살 어렸고 직장을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갑작스런 실직이라 인수인계 또한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져야 했다.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 그의 얼굴 빛은 어둡고 말수도 적었지만 잔정이 많았다. 애주가였다.

나는 그보다 하루 먼저 순례길로 나섰다. 그는 26일 만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완주할 계획이었다. 하루에 거의 30km 이상을 걸었다. 그가 걷기 시작한 지 4일, 내가 5일째 되는 날 드디어 우리는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만났다. 서로 카카오톡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어서 가능했다.

이렇게 해서 소리와 연석 그리고 스펜서와 니콜라와 푸엔테 라 레이나 알베르게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메뉴는 볶음밥이었다. 내가 요리를 했고 소리가 거들었다. 그녀와 장을 보러 갈 때 니콜라가 따라와서 음식 재료 값을 계산해주었다. 맥주까지 샀는데도 16.5유로였다. 물가가 쌌다. 음식을 먹고 나서는 연석과 스펜서가 설거지를 했다.

 순례자들의 흔적들
 순례자들의 흔적들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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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테야 가는 길
 에스테야 가는 길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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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하면서 나는 니콜라의 재치에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소리와 함께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구글맵에서 알아낸 슈퍼로 향할 때였다. 니콜라가 와서는 자기가 알고 있는 굉장한 동네 슈퍼가 있다고 했다. 가격도 싸단다. 우리는 그를 따라나섰다. 니콜라는 야외 카페가 즐비한 골목을 계속 걷기만 했다. 나는 은근히 짜증이 밀려왔다. 다리가 천근만근이었다. 장을 보고 나서 쉬려고 했다. 그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디까지 가냐는 내 질문에 걱정하지 말라며 웃기만 했다. 

목적지로 정한 슈퍼를 지나 15분 즈음 걸었을까. 산 페드로 아포스톨 성당(Iglesia San Pedro Apostol)을 지났을 때 석조 다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여섯 개의 아치형 교량 구조로 이루어진 다리는 물살이 센 아르가 강물을 흘러 보내고 있었다. 순례길에서 마주할 다리 중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평을 받은 다리였다. 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순례자들을 위한 '순례자 다리'였다.

나바라 왕 산초 3세 왕비가 점점 늘어나는 중세 순례자들의 안전한 통행을 위해서 다리를 만들었다. 다리에 대한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마을 이름까지 '왕비의 다리(푸엔테 라 레이나 ; 스페인어로 '푸엔테'는 '다리', '레이나'는 '왕비'를 뜻한다)'라고 바꿨을 정도다. 

 구시가지를 끼고 있는 순례자 다리
 구시가지를 끼고 있는 순례자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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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자 다리에서 바라본 아르가 강줄기
 순례자 다리에서 바라본 아르가 강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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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중앙에서 걸음을 멈춘 나는 수비리에 있는 라비아 다리 아래에서도 흘렀던 아르가 강줄기를 배경 삼아 사진 찍기에 바빴다. 언제 짜증을 냈는가 싶었다. 강폭은 넓었고 강변은 수풀과 고시가지를 끼고 있었다.

"이 다리를 보여주려고 일부러 이곳에 왔어. 너는 내일 새벽, 그러니깐 길 떠날 때에야 이 다리를 보게 되잖아. 그때도 아름답지만 이런 대낮에도 이곳은 너무나 아름답거든."

니콜라가 말했다. 그는 정확히 나를 알고 있었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활발하게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침대에 누워있거나 일찍 잔다는 것. 새벽 일찍 일어나서 배낭 짐을 싼다는 것 등을. 그리고 그는 약속을 지켰다. 정말 물건도 풍부하고 싼, 동네 슈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식사 한 끼의 의미

돌이켜보건대 니콜라는 내게 같이 식사를 하자는 말을 매번 했다. 둘째 날 숙소였던 수비리에서 니콜라와 생맥주를 마신 뒤 오후 내내 정신없이 잤다. 여섯시 즈음에 그가 저녁을 먹자고 깨웠지만 일어날 수 없었다. 눈을 떴을 때는 8시 30분. 배가 고팠지만 숙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슬렁거리며 들어오는 니콜라를 본 것은 10분 뒤였다. 그는 곧 모든 식당이 문을 닫는다고 했다. 그냥 한 끼 굶어버리지 뭐, 라고 했더니 기어코 나를 데리고 다리 옆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마감 10분을 남겨두고 감자샐러드를 만들게 했다. 감자샐러드만 요리가 된다고 했다. 

푸엔테 라 레이나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12시 전이었다. 혼자 걷기 좋아하는 니콜라는 유리와 스펜서를 만난 뒤에도 앞서 걸어갔다. 골초인 그가 저럴 수는 없다며 이구동성 우리는 입을 모았을 정도로 빨랐다. 니콜라는 우리보다 일찍 도착했다. 점심으로 피자(잠깐, 피자의 고향을 생각했다. 피자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유물은 고대 도시 폼페이 유적에 남아 있는 빵집이었다. 역시나 피자의 고향은 이탈리아였다)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나는 피자가 먹고 싶지 않았다. 대신 저녁때 요리를 할 테니 함께 식사를 하자고 했다(매번 그가 밥을 먹자고 했지만 거절해서 미안했다. 이틀 뒤 니콜라뿐만 아니라 스펜서와 헤어졌을 때에야 밥 한 끼라도 함께 나눴던 게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내가 했던 제안 중 최고였다). 

혼자 걸어왔던 한국인 소리는 2시 즈음에, 연석은 요리가 다 되어 상을 차렸을 때야 도착했다. 전날 남은 쌀을 가지고 왔던 나는 쌀을 씻어 밥을 안쳤다. 소시지와 야채를 넣어 볶았다. 달걀 프라이를 해서 볶음밥 위에 얹고 얇게 썬 토마토로 장식을 했다. 캔 맥주를 곁들였다.

갓 지어낼 적엔
서로가 서로에게
끈적이던 사랑이더니
평등이더니
찬밥 되어 물에 말리니
서로 흩어져 끈기도 잃고
제 몸만 불리는구나

- 이재무의 〈밥알〉 전문


왁자지껄 맥주를 마시면서 대화를 이어갈 때 이재무의 시 한편을 떠올렸다. 익살스럽게 그다음을 연결시켰다. 각자 찬 밥알처럼 흩어져 있던 순례자들. 함께 모여 식사하니 다시 찰진 밥되었구나.

 푸엔테 라 레이나 알베르게 주방에서 요리한 볶음밥
 푸엔테 라 레이나 알베르게 주방에서 요리한 볶음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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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그 유쾌함에 오래 낄 수 없었다. 아침과 점심을 먹지 않아서(과일은 먹었지만) 저녁은 과식할 줄 알았는데 요리하면서 냄새를 다 맡아버렸다. 몇 숟가락 뜨다가 말았다. 커피와 술은 몸에서 받지 않았다. 오로지 물만 마셨다. 살 빠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식사를 다 하고 맥주를 마시는 시간에 조용히 2층으로 올라와서 누웠다.  

소리와 연석은 그날, 스펜서와 니콜라를 처음 보는 자리였는데도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것은 한 끼 식사 때문이었다. 밥(식사)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이다. 과장되게 말하면 밥을 위해 살고 죽을 수도 있다. 그 밥을 나눈다는 것은 친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더군다나 순례자들의 밥의 의미는 더 심오하다. 사랑(영혼)의 밥이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사랑(영혼)을 나눈다는 것이다.  

나는 좀 더 진중하게 밥을 많이 먹어야 했다. 앞으로 남은 일정을 위해서, 건강한 걸음을 위해서 몸과 영혼을 살찌우는 밥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식욕이 돌지 않았다. 이러다가 중간에서 주저앉는 게 아니야? 불안이 슬금슬금 기어왔다. 에이, 그럴 수는 없어! 당분간  '밥'에 '무조건' 집중하자, 밥을 많이 먹어야(건강해야) 밥(사랑)을 더 자주 나눌 수 있다, 라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영역을 넓히려는 잡념을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김경미의 〈식사법〉을 들췄다.

콩나물처럼 끝까지 익힌 마음일 것
쌀알빛 고요 한 톨도 흘리지 말 것
인내 속 아무 설탕의 경지 없어도 묵묵히 다 먹을 것
고통,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 것
성실의 딱 한 가지 반찬만일 것

새삼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제 명에나 못 죽는 건 아닌지
두려움과 후회들의 돌들이 우두둑 깨물리곤 해도
그깟것 마저 다 낭비해버리고픈 멸치똥 같은 날들이어도
야채처럼 유순한 눈빛을 보다 많이 섭취할 것
생의 규칙적인 좌절에도 생선처럼 미끈하게 빠져나와
한 벌의 수저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할 것

한 모금 식후 물처럼 또 한 번의 삶을
잘 넘길 것

- 김경미의 〈식사법〉 전문


침대에서 서서히 검붉은 빛을 띠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다음 알베르게까지 갔던 유리가 막 식사를 끝냈다며 내가 나온 사진을 보내왔다. 나도 뭔가 보내주어야 할 것 같아서 식사 시간에 찍었던 사진을 첨부했다. 은근슬쩍 자랑도 했다. 우리 이렇게 밥 먹었다, 니가 없어서 너무 서운했다, 라는 메시지까지 덧붙였다.

사진은 며칠 사이에 5kg이 빠져 앙상한 내가 화면 한쪽에서 웃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잘 걸어줘서 고마웠다. 사진 속 나처럼 따라 웃다가, 유리가 보내준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잠이 들었다.

 에스테야 가는 길
 에스테야 가는 길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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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 순례자들의 이름은(앞으로도) 가명입니다.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은 2017년 6월 13일에 걷기 시작해서 7월 12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습니다. 30일만의 완주였습니다. 그 다음 날, ‘세상의 끝’이라는 피니스테레와 묵시아까지(100km)까지 내처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4일 동안 900km 여정을 마쳤습니다. 몇 십 년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34일의 여정은 짧을 수 있으나 걸으면서 느꼈던 것들은 제게 인생의 축소판처럼 다가왔습니다. 움츠린 어깨를 펴게 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내다보게 했습니다. 이곳에서 34일 간의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을 도란도란 풀어놓으면서 함께 공유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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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차노휘는 소설가이자 광주대 초빙교수이다. 2016년부터 걷기 시작하여 도보 여행을 하면서 ‘길 위의 인생’을 실천하고 있다.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고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 여행 에세이집으로는 《쉼표가 있는 두 도시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