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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1986년 9월에 7차 총회를 열었다. 7차 총회에서는 조직 문제가 주요 이슈였다. 그 결과 '대폭적 구조 개편'이 단행됐다. 총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문제가 관심을 모았다.

"운동을 하려면 3차원의 헌신을!"

하나는 정회원 제도를 도입하는 문제였다. 정회원이란 탄압 상황에서 적으로부터 조직을 보위하고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활동하는 기간 활동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3차원의 헌신성을 결심하고 그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이었다. 3차원의 헌신성이란 신체와 정신, 경제능력 세 방면에서 운동에 기여하는 것을 뜻했다.

7차 총회에 앞서 충북 매포에서 열린 비공개 대의원 총회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토의했다. 그 회의에 참석했던 김성환의 증언에 따르면, 집행부를 대표하여 중앙위원 이범영이 이 사안을 역설했다.

"2박3일 동안 꼬박 회의와 논쟁만 한 대단한 총회였는데, 그때 이범영 선배가 그 유명한 '3차원 헌신론'을 주장했다. 운동의 대의에 찬성한다면 그냥 설렁설렁해서는 안 되며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3차원에 걸쳐 운동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걸 역설할 때 참 분위기가 숙연해졌었다."

이 안건은 대의원 총회에서 의결되었다. 정회원 제도가 도입된 것이다. 정회원은 '기간 활동가', 줄여서 '기활가'라고 불렸다. 전업적으로 민청련 활동에 참여하는 회원으로서 민청련 조직에 뼈를 묻을 것을 선서한 사람들이었다. 정회원 체계는 민청련의 일반적 조직 체계 내부에 존재하는 별도의 결사체였다고 할 수 있다.

정회원 제도가 민청련 대의원 총회의 의결을 거쳐 도입된 배경에는 회원들의 내면 의식에 내재하는 심리적 공통성이 있었다. 회원들은 그해 봄에 있었던 AB논쟁의 뜻밖의 귀결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탄압 하에서 조직이 위기를 겪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조직을 떠나갔다. 엊그제까지 이마를 맞대고 정세와 전술을 논의하던 사람들이었다.

떠나간 사람들은 온갖 화려한 논리를 내세웠지만, 뒤에 남은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마음뿐이랴, 다수 회원들의 이탈로 인해 민청련 각 조직 체계는 인력 결손으로 인한 활동 부진에 시달려야 했다. 와해의 위기에 처했을 때 조직을 사수하겠다고 결연한 태도를 보이는 동료가 그리웠다. 민청련 소속의식이 강렬한 전업적 활동가의 굳은 유대가 필요했다. 따라서 정회원 제도는 민청련의 역사적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민청련 7차총회의 결의에 따라 공개사무실을 복원한 네 사람. 1.남근우 2.김성환 3.이난현 4.최성웅
 민청련 7차총회의 결의에 따라 공개사무실을 복원한 네 사람. 1.남근우 2.김성환 3.이난현 4.최성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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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영역을 복원한 네 상근자: 김성환, 남근우, 이난현, 최성웅

정회원 제도의 도입과 더불어 조직문제의 또 하나의 이슈는 공개 활동영역을 회복하는 문제였다. 민청련은 1985년 9월 탄압 이래로 근 1년간 비공개 활동에 주력해 왔다. 공개 활동 영역은 매우 한정된 범위에서만 활용되었다. 민청련 사무실은 민가협 상근자들이 이용하고 있었고, 공개 영역은 간판만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대해 비공개 대의원 총회에서 문제가 제기됐다. 과거 집행부처럼 공개 활동의 여지가 넓지는 못하겠지만, 민청련 사무실을 근거로 하여 상근체계가 운영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제언이었다.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하고 활동에 대한 책임감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범위의 공개 활동이 요청됐던 것이다.

이 문제는 주로 복역 후 출소한 구 간부 측에서 제기했다. 민청련 탄압으로 구속돼 재판을 받던 구 집행부 성원들 가운데 일부가 운동 일선으로 속속 복귀하고 있었다. 권형택 전 사회부장, 김종복 전 청년부장이 되돌아왔다. 두 사람은 1986년 4월 3일 민청련 5인 간부 제6차 공판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고 석방됐던 것이다.

공개 사무실의 회복 필요성에 관해서 폭넓은 공감과 합의가 이뤄졌다. 총회준비위원회는 물론이고 대의원 총회에서도 이 제안은 통과됐다. 인선 문제가 남았다. 민청련의 논의체계에는 일종의 관습이 있었다. 어떤 정책이 채택되면 결정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사람이 그 사안을 실행에 옮기는 데에서도 책임을 지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총회준비위원회가 그러한 역할을 맡았다. 공개 사무실을 중심으로 활동할 네 사람의 상근자가 선정되었다. 총회준비위원이던 김성환, 남근우, 이난현, 최성웅이 그들이었다.

개헌투쟁의 대중화를 표방하다

7차 총회에서 조직문제 만이 중시되었던 것은 아니다. 개헌투쟁의 전술과 슬로건 문제에 관해서도 주목할 만한 방향 전환이 이뤄졌다. 먼저 '제헌의회 소집' 슬로건에 반대한다는 뜻을 명백히 했다. 제헌의회의 영어 약자는 CA(Constitutional Assembly)여서 이 주장을 펴는 정파를 CA그룹으로 불렀다. 그해 5월투쟁 때까지만 해도 민청련은 헌법제정회의, 헌법제정민중회의 등의 개헌투쟁 슬로건을 표방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와 유사한 의미의 '제헌의회 소집' 슬로건을 반대한다고 명시하는가.

<민주화의 길> 14호 논설이 이에 대해 해명했다. 그에 따르면, 민청련이 표방한 '헌법제정회의 소집'론은 선전적 슬로건이었다. 헌법 문제에 대한 민중적 입장을 명백히 하고 군부독재를 타도하기 위한 비타협적 투쟁의 정당성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의의를 담았다. 그에 반해서 '제헌의회 소집'론은 현 시기 투쟁을 지도하는 전술적 슬로건으로서 제기되어 왔다. 이는 민청련의 입장과는 달랐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했다. 첫째, 제헌의회 소집론은 현재의 시기를 혁명적 시기 혹은 그에 임박한 시기로 설정하고 있는데 이는 주관주의적 오류였다. 현 시기는 혁명적 시기가 아니라는 게 민청련의 입장이었다. 둘째, 야당은 물론이고 민주제 개헌을 주장하는 모든 세력을 기회주의로 매도하고 있는 게 문제였다. 오직 전술적 슬로건에 대한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공동전선을 구축하고자 하는데, 이는 대중의 이반과 고립을 자초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민청련은 그해 상반기의 개헌투쟁을 반성한다고 고백했다. 선전적 슬로건인 헌법제정회의 소집론과 전술적 슬로건인 제헌의회 소집론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서 투쟁 방침에 일정한 혼선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슬로건의 표면적 일치에 집착했고, 그에 의거해서만 연대를 추구한 점을 반성했다. 앞으로는 피상적인 차이점 보다는 기본 목표의 동일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겠다고 천명했다.

이러한 언급은 6차총회에서 채택한 '헌법제정회의 소집' 슬로건을 사실상 폐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또 6차총회 이후 추구해오던 상층연대 경시론도 더 이상 고집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했다. 민통련을 매개로 하는 상층연대의 중요성을 다시 인정하고, 당면한 개헌투쟁을 대중노선에 입각해서 전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73학번 공동의장을 비롯한 새 집행부 면면

7차총회에서 선출된 공동의장들. 왼쪽부터 장준영, 이범영, 연성수
 7차총회에서 선출된 공동의장들. 왼쪽부터 장준영, 이범영, 연성수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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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차 총회에서 선출된 새 집행부는 세대교체의 결과였다. 최상층 지도부에는 73학번에 해당하는 3인 공동의장이 취임했다. 이범영(서울대 73학번), 장준영(성균관대 73학번), 연성수(서울대 73학번)가 그들이다. 이들은 7차 총회의 변화를 이끌어낸 주역이었다.

정회원 체계와 개헌투쟁 전술 전환이 바로 이들의 주도하에 이뤄졌던 것이다. 그에 뒤이어 비공개 각 부문과 기구를 관장하는 중앙집행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권형택, 진영효, 박선숙, 유기홍, 김성환이 그 위원이 되었다. 그에 더하여 공개 영역 활동을 책임지는 운영위원회 직제가 신설되었다. 권형택 위원장과 김성환 사무국장을 비롯하여 이난현 총무국장, 김병태 사업부장, 신덕자 여성부장, 최성웅 홍보부장 등이 취임했다.

면모가 일신되었다. 7차총회를 통해 새 진용을 갖춘 민청련은 공개 영역을 회복하고 사무실 중심체제를 다시 확립했다. 운영위 간부들은 7차 총회가 끝난 뒤 민청련 사무실에 매일 출근했다. 공개 활동을 하면서도 신원이 경찰에게 쉽사리 파악되지 않게끔 가명을 사용했다. 이를테면 최성웅의 가명은 차영일이었다. 차영일은 월 급여로 10만 원 가량을 받았는데, 그는 훗날 급여가 좀 적어서 문제였지만 미혼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궁핍함을 느끼지는 않았다고 회상했다.

비공개 부서들의 활동력 복원

공개 영역의 활성화와 더불어 비공개 각 부서 활동도 강화되었다. 예컨대 여성부 조직체계는 이원화되었다. 공개 부문인 운영위원회에는 여성부장 1인이 취임하여 연대사업을 담당했다. 여성부장은 민청련을 대표하여 여성단체 상층 연대 활동과 여성단체연합의 창립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편 비공개부문인 중앙집행위 내부에는 여성국이 설치되었다. 여성국은 교육과 선전을 담당했는데, 그를 수행하기 위한 조직으로서 각 3인으로 구성된 교육사업 팀과 선전사업 팀을 조직했다.

교육사업 팀은 신입회원 교육을 담당했다. 신입회원에게 2차례에 걸쳐서 여성문제의 본질과 여성운동론에 관한 프로그램을 운용했다. 여성운동론 교육을 위해서 교안도 작성했는데, 이 원고는 기관지 <민주화의 길> 16호에 실렸다.

기성 회원을 대상으로 내부 정치학습도 수행했다. 그즈음 외신보도를 달구던 니카라과혁명론, 필리핀혁명론 등이 논의되었다. 선전사업 팀은 전단을 작성하고 여성운동의 이슈를 개발하는 일을 담당했다. 아시안게임 반대 전단을 제작하고, <또 하나의 성>이라는 제목으로 성고문 자료집을 발간했다.

민중신문 22호와 23호 1면. 보름에 한 호씩 발행되던 민중신문이 5개월 만에 23호로 복간됐다.
 민중신문 22호와 23호 1면. 보름에 한 호씩 발행되던 민중신문이 5개월 만에 23호로 복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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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됐던 <민중신문>도 다시 발간하기 시작했다. <민중신문>은 1986년 4월 17일 사무실 침탈 사건 이후 5개월간 휴간 중이었다. 지령 22호가 4월 30일에 나온 뒤에 후속 신문을 내지 못했다.

그 원인은 침탈 사건으로 인해 사무실 공간과 유력한 간부 역량을 상실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편집부 내부 사정도 있었다. 정체성의 위기 때문이었다. 안팎에서 쏟아지는 "이미 아는 사실을 나열하는 신문, 방향없이 표류하는 신문" 등등의 비판이 편집부를 혼란하게 했다. 편집부는 이 문제를 놓고 치열한 내부 토론을 거듭했다. 그 결과 7차총회를 계기로 하여 편집부는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9월 30일에 <민중신문>은 제23호로 복간됐다. <민중신문>의 성격은 제호에 표시된 것처럼 "민중의 해방투쟁을 위한 길잡이"라고 규정했다. 민중이란 "노동자, 농민, 근로지식인 등 모든 근로대중"을 가리키는데, <민중신문>은 그들의 정치적 시야를 확대시키는 것을 임무로 삼겠다고 했다.

아울러 편집부는 두 가지 경향을 극복하겠다고 다짐했다. 하나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성에 몰두하여 협소한 계급이기주의에 빠지는 것"이오, 다른 하나는 민중의 '무원칙한 통일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지면이 늘어난 ‘민청련 구속자 소식 7호’ 앞면(왼쪽)은 구속된 김병곤 부의장의 가족 편지를 전했다. 오른쪽은 민청련 회원들에게 제공하던 ‘주간소식’으로 당시 신문들이 보도하지 않은 학생 시위를 비롯한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여러 소식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회원들에게 제공했다
 지면이 늘어난 ‘민청련 구속자 소식 7호’ 앞면(왼쪽)은 구속된 김병곤 부의장의 가족 편지를 전했다. 오른쪽은 민청련 회원들에게 제공하던 ‘주간소식’으로 당시 신문들이 보도하지 않은 학생 시위를 비롯한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여러 소식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회원들에게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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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부서의 활동성도 강화됐다. <주간일지>라는 이름의, 각 분야 민주화운동 소식지는 매주 빠짐없이 발간됐다. 마치 군대 참모부의 주간 상황판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탄압 이후 나오기 시작한 <민청련구속자소식>이라는 제목의 소식지는 그해 11월에 지령 13호가 나오기까지 매월 1∼2회씩 꼬박꼬박 얼굴을 내밀었다. 7호부터는 지면이 16면으로 늘었고, '논설'란이 신설되는 등 옥중투쟁 기관지의 성격을 강화했다.

민청련의 기관지인 <민주화의 길>도 꾸준히 발간했다. 발간 초창기에 비하면 발행의 정기성과 대외 영향력이 하락했음을 부인할 수 없었지만, 탄압을 겪은 뒤인 1986년에도 여전히 연간 4회 발행을 지속했고, 매호에 실린 '논설'은 뭇 민주화운동권 사람들에게 필독의 대상이었다.

모진 탄압을 이겨내고 다시 힘겹게 일어서는 민청련의 모습은 다른 단체들에게도 하나의 모범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태그:#민청련, #7차총회, #남근우, #김성환, #이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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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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