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프로농구(NBA)의 대표적인 스타 르브론 제임스(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최근 한 방송사 진행자와 '사회적 발언'을 두고 공개 논쟁을 펼쳐서 화제를 모았다.

제임스는 최근 한 동영상을 통해 미국 사회의 현실에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제임스는 플로리다에서 발생한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을 언급하며 총기 규제의 필요성을 촉구했다.

"우리는 미국에서 이런 비극들이 일어나는 것을 수없이 봐왔는데도 변화가 없다. 어린아이들이 법적으로 맥주를 사는 것은 금지되어 있는데 정작 더 위험한 총기는 소지할 수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더 이상 이런 비극이 반복되기를 원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뭔가를 해야 한다."

총기 규제 비판한 르브론 제임스, "입 닥치고 드리블이나 해" 비난한 앵커

 <폭스뉴스>의 여성 앵커 로라 잉그램과 농구 선수 제임스 르브론의 논쟁을 다룬 CNN 기사. 제임스 르브론이 미국 총기 난사 사건에 관해 총기 규제를 주장하자, 로라 잉그램은 "닥치고 농구나 하라"고 말해 논란이 됐다. 해당 사안을 다룬 CNN 홈페이지 갈무리.

<폭스뉴스>의 여성 앵커 로라 잉그램과 농구 선수 제임스 르브론의 논쟁을 다룬 CNN 기사. 제임스 르브론이 미국 총기 난사 사건에 관해 총기 규제를 주장하자, 로라 잉그램은 "닥치고 농구나 하라"고 말해 논란이 됐다. 해당 사안을 다룬 CNN 홈페이지 갈무리. ⓒ CNN 홈페이지


제임스만이 아니라 스포츠 스타, 배우 등 다양한 유명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나 사회적 현안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은 그동안 미국 사회에서 흔한 일이었다. 특히 제임스는 과거부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미국 사회의 인종주의를 정면으로 지적하는 등 거침없는 행보로 NBA의 대표적인 '오피니언 리더'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미국에서 보수성향으로 알려진 <폭스뉴스>의 백인 여성 진행자 로라 잉그램이 15일 방송에서 제임스를 공개적으로 '저격'하는 발언을 하며 논란이 벌어졌다. CNN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잉그램은 제임스의 발언을 "무식한 소리"라고 폄하하며 "공 하나로 연 1억 달러나 받는 사람이 정치인들에게 훈수를 하는 것은 그리 현명하지 않다. 그냥 입 닥치고 드리블(농구)이나 해라(Shut up and Dribble)"라고 빈정거렸다.

NBA는 미국에서 인기가 높은 4대 프로스포츠 중에서도 흑인들의 비중이 유독 높은 종목이다. 그리고 제임스 르브론은 2000년대 중반 이후 NBA와 흑인 스포츠 스타들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선수다. NBA에는 제임스처럼 어린 시절 가난한 서민층이나 극빈층에서 자랐지만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농구로 '인생역전'에 성공한 흑인 스타들이 많다.

NBA 흑인 스타들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인종-계급 간 갈등과 사회 분열에 관해 비판적인 노선을 주로 유지해왔다. 스테판 커리 등 흑인 스타들이 주축을 이룬 지난 시즌 챔피언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는 NBA 우승팀의 관례인 백악관 초청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백악관 초청 거부는 NBA 선수들이 미국 프로풋볼(NFL) 선수들에 관한 트럼프 대통령 발언에 항의하는 차원이었다. 지난해 9월 미국 NFL 선수들이 경기 전 국가 연주 때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의미로 국민의례를 거부하며 무릎을 꿇는 자세를 취했고,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선수들을 향해 '무례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특히 제임스는 지난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등 대표적인 '반트럼프' 인사로도 유명하다. NBA 간판스타로서 사회적 영향력이 큰 제임스의 언행을 미국 보수매체나 우익 인사들이 달갑게 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잉그램의 발언은 단지 개인의 의견을 넘어 제임스와 NBA를 바라보는 일부 미국 백인 보수층과 트럼프 지지자들의 시각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문제는 잉그램의 발언이 제임스만이 아닌 '운동선수'라는 직업군에 대하여 심각한 폄하의 소지가 다분하다는 점이다. 심지어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리 중 하나인 '개인의 정치적-사회적 표현의 자유와 권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발언을 공공재인 방송을 통하여 진행자가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경악할 만한 주장이다.

잉그램은 사안 자체와 무관한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잉그램은 "제임스의 말은 항상 문법에도 맞지 않는다. NBA에 들어가기 위하여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조롱했다. "그런데도 제임스가 유명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그의 무식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주장했다. 제임스의 학력과 지적 수준을 문제 삼으며 개인의 사회적 의사 표현까지 폄하하려는 시도에서 어쩐지 '메시지를 부정할 수 없다면 메신저를 공격하라'는 말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비난에도 굽히지 않겠다 선언한 제임스 "사회적 현안에 침묵 않을 것"

 지난 1월 16일, NBA 농구 선수 르브론 제임스가 '평등(EQUALITY)'이라고 적힌 농구화를 신고 경기에 나섰다. 르브론 제임스는 최근 미국 내 인종 문제와 총기규제 등 사회적 사안에 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있다. 해당 사안을 보도한 <뉴욕포스트> 홈페이지 갈무리.

지난 1월 16일, NBA 농구 선수 르브론 제임스가 '평등(EQUALITY)'이라고 적힌 농구화를 신고 경기에 나섰다. 르브론 제임스는 최근 미국 내 인종 문제와 총기규제 등 사회적 사안에 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있다. 해당 사안을 보도한 <뉴욕포스트> 홈페이지 갈무리. ⓒ 뉴욕포스트 홈페이지


이번 르브론 제임스의 논쟁을 보면서 왠지 뒷맛이 씁쓸한 것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 대입해도 낯설지 않아 '기시감'를 들게 하기 때문이다. 잉그램의 주장과 논리는 그간 한국에서도 숱하게 등장하는 각종 '막말' 정치인-언론인들의 행태와도 흡사하다.

과거 고졸 출신의 대통령을 두고 "다음 대통령은 대졸자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보수정당 대변인도 있었고, 지난해 조기 대선 당시 후보 토론회 자리에서 "연봉 6천만 원 이상이면 자영업자나 마찬가지니까 집회나 파업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후보도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학벌-연봉-출신 등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누군가의 언행이 차별받아도 된다고 믿는 '계급주의자'들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운동선수나 연예인 등 소위 '예체능계'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의 사회적 의사표현의 자유와 권리를 은근히 멸시하는 풍토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잉그램의 말처럼 '운동선수라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 무식하다'는 식의 논리는 미국이 아닌 한국, 또는 어느 국가에서 나왔더라도 '시대착오적'이라고 비웃음을 샀을 법한 주장이다.

NBA 올스타 위크엔드(올스타전이 열리는 주말 행사)에 참석하고 있는 제임스는 기자회견에서 최근의 논란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제임스는 잉그램의 발언을 반박하며 "앞으로도 사회적인 현안에 대하여 침묵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소신을 드러냈다.

AFP 통신에 따르면, 르브론 제임스는 18일(한국시간) NBA 올스타전 연습경기 직후 기자회견에서 "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태어나 형편도 좋지 않은 편부모 가정에서 자라면서 많은 역경과 사람들의 선입견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왔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 가정의 부모로서, 사회적인 롤모델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발언하는 건 나의 의무"라고 덧붙였다. 잉그램의 비판에도 사회 비판적인 발언을 이어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또한 제임스는 더 많은 운동선수들의 사회 참여도 독려했다. "한때 운동선수들은 자기 의견을 밝혀선 안 된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입 다물고 드리블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NBA 총재 아담 실버도 제임스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며 "이들은 단순한 농구선수이기 전에 다양한 속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도 공개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제임스와 NBA가 미국 사회에서 지닌 위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부당한 외압과 비난에도 정당하게 저항할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있다는 것은 중요한 차이다.

한국의 인식은 얼마나 다른가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유명인이 민감한 사회적 발언과 정치적 성향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는 분위기가 더 강하다. 김제동이나 고 신해철처럼 어떤 비판에도 당당하게 발언하는 사례도 있지만 예외적인 경우이고, 오히려 정치적인 성향을 드러낸 이후로 본업에 보이지 않는 불이익을 겪은 사례가 적지 않다.

차범근이나 박지성, 박찬호, 김연아 같은 한국 체육계의 레전드급 인사들도 민감한 사회 현안이나 구조적인 문제점에 대해서 앞장서서 용기 있게 발언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차범근은 1998년 프랑스월드컵 직후 단지 한국 축구계 내부의 비리 문제를 내부 고발했다는 이유로 한때 축구계로부터 거의 매장당할뻔한 전력도 있다(관련 기사 : 13년 전 차범근의 고백은 사실이었나).

아무리 사회적 영향력이 큰 유명인이라고 해도 대중의 인기와 지지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의 한계상 개인의 힘은 미약하다. 성향이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서 때로 특정 진영의 맹목적이고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수 전효성이나 설현의 사례처럼 정치적인 의도가 없다고 밝힌 언행이라고 해도 단순한 실수나 실언까지 꼬투리 잡아서 무자비한 마녀사냥으로 치닫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예체능계 유명인일수록 독자적인 신념이나 소신을 가진 인격체로 대하기보다는, 아직도 그저 쉽게 물고 뜯을 수 있는 만만한 '안줏감' 정도로만 여기는 우리 사회의 후진적인 정서도 한몫을 담당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르브론 제임스처럼 자신의 소신을 밝히기 두려워 하지 않는 유명인이 한국에서도 나오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는 개인의 정당한 의사 표현의 권리와 자유가 존중받으며, 학벌-성향-나이-출신-인종 등 어떤 이유에서든 차별받지 않는 사회다. 우리 사회도 유명인들일수록 '자기의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으며, 사회도 그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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