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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포충사의 충노비. 제봉 고경명 선생의 집안하인 ‘봉이’와 ‘귀인’을 기리는 비석이다.
 광주 포충사의 충노비. 제봉 고경명 선생의 집안하인 ‘봉이’와 ‘귀인’을 기리는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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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를 기리는 정려비, 충노비(忠奴碑)를 또 만났다. 개인적으로 충노비를 처음 본 게 광주 포충사였다. 포충사의 옛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충노비가 세워져 있다. 제봉 고경명 선생의 집안하인 '봉이'와 '귀인'을 기리는 비석이다.

봉이와 귀인은 고경명을 따라 금산전투에 의병으로 참여했다. 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과 차남 인후의 시신을 거둬 정성껏 장사를 지냈다. 이듬해엔 다시 고경명의 장남 종후를 따라서 진주성전투에 참가해 일본군과 싸우다가 종후와 함께 순절했다.

포충사의 충노비는 국난을 당하자 신분을 떠나서 의병에 참가한 노비들의 희생정신을 새긴 비석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처럼, 그 주인에 그 하인이다. 포충사에 갈 때마다 눈여겨봤던 충노비다.

함평 모평마을 풍경. 옛집이 즐비하다. 마을 풍경이 결코 요란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함평 모평마을 풍경. 옛집이 즐비하다. 마을 풍경이 결코 요란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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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모평마을의 충노비와 신천 강씨 제각. 충노비는 충성스런 노비 ‘도생’과 ‘사월’을 기리고 있다.
 함평 모평마을의 충노비와 신천 강씨 제각. 충노비는 충성스런 노비 ‘도생’과 ‘사월’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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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에서도 충노비를 만났다.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 모평마을에서다. 마을 한쪽에 '도생'과 '사월'의 충노비가 신천 강씨의 제각과 함께 세워져 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일이다. 전쟁에 참가한 윤해가 일본군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놓이자, 부인 신천 강씨가 두 팔로 가로 막았다. 마지막에는 온몸으로 그 칼을 막았다. 결국 윤해와 부인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한다.

이 소식을 들은 윤해의 장남 17살 청립이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며 전쟁터로 달려 나간다. 청립이 전쟁터로 가면서 노비 도생과 유모 사월에게 4살짜리 동생(정립)을 잘 돌봐달라고 유언 아닌 당부를 한다. 청립 역시 전쟁터에서 일본군에 죽임을 당하고 만다.

충복 도생과 충비 사월이 주인의 빈자리를 대신해 4살 아이를 끝까지 잘 키워 윤씨 가문을 지켜냈다. 훗날 윤정립이 그 사실을 알고, 죽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 유언을 했다. 나중에 후손들이 충노비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모평마을에는 충노비와 정려각 외에도 열녀각이 유난히 많다. 공적비, 충열비, 열녀비 20여 기가 세워져 있다. 신천 강씨를 비롯 함평 이씨, 진주 강씨, 광산 김씨, 충주 박씨, 이천 서씨 등을 기리는 비석이다. 비석 하나하나가 지니고 있는 이야기도 애틋하다.

모평마을에 줄지어 선 공적비와 충열비, 열녀비. 비석 하나하나가 지니고 있는 이야기가 애틋하다.
 모평마을에 줄지어 선 공적비와 충열비, 열녀비. 비석 하나하나가 지니고 있는 이야기가 애틋하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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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평마을의 골목 풍경. 골목을 싸목싸목 걷는 기분이 호젓하다. 골목마다 정감이 넘실댄다.
 모평마을의 골목 풍경. 골목을 싸목싸목 걷는 기분이 호젓하다. 골목마다 정감이 넘실댄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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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평마을은 오래된 양반고을이다. 충노비와 정려각, 열녀비로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마을에서 만난 한 주민은 "여기가 한옥의 압구정"이라고 했다. 그만큼 옛집이 즐비하다. 황토 빛깔의 흙담과 기와집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담장 안의 나무 한 그루, 기와 한 장에서도 세월의 더께가 묻어난다. 옛집 처마의 단아한 곡선도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길을  따라 마을을 싸목싸목 걷는 기분이 호젓하다. 마을 풍경이 결코 요란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골목마다 정감이 넘실댄다. 두루마기를 걸친 할아버지도 만나는, 옛 고향 같은 마을이다.

함평 모평마을 전경. 함평 모씨(牟氏)가 마을을 처음 형성했고, 1460년께 이곳의 산수에 반한 윤길이 정착하면서 파평 윤씨의 집성촌이 됐다.
 함평 모평마을 전경. 함평 모씨(牟氏)가 마을을 처음 형성했고, 1460년께 이곳의 산수에 반한 윤길이 정착하면서 파평 윤씨의 집성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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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평마을의 야생 차밭. 산비탈에 고즈넉이 자리한 ‘영양재’ 뒷편 야산이다. 마을주민들의 산책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모평마을의 야생 차밭. 산비탈에 고즈넉이 자리한 ‘영양재’ 뒷편 야산이다. 마을주민들의 산책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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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평마을은 '나비고을' 함평의 근간이 됐다. '함평(咸平)'이란 지명이 여기서 나왔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이 마을을 중심으로 한 해보와 나산·월야의 '모평현'과 함평읍을 중심으로 한 '함풍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조선 태종 9년(1409년) 함풍현과 모평현을 합해 함평현으로 묶었다. 함풍의 함(咸) 자와 모평의 평(平) 자를 따서 함평이란 지명이 나왔다. 모평마을은 함평 모씨(牟氏)가 마을을 처음 형성했다. 1460년께 이곳의 산수에 반한 윤길이 정착하면서 파평 윤씨의 집성촌이 됐다.

모평마을의 임천정사. 파평 윤씨의 제실이다. 입향조 윤길이 직접 짓고 인재양성 공간으로 쓰다가 나중에 제실로 바뀌었다.
 모평마을의 임천정사. 파평 윤씨의 제실이다. 입향조 윤길이 직접 짓고 인재양성 공간으로 쓰다가 나중에 제실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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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탈에 고즈넉이 자리한 ‘영양재’. 비탈의 작은 땅을 내밀어 계단을 만들었다. 옛주인의 풍류와 검소한 성품이 배어나는 집이다.
 산비탈에 고즈넉이 자리한 ‘영양재’. 비탈의 작은 땅을 내밀어 계단을 만들었다. 옛주인의 풍류와 검소한 성품이 배어나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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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평마을에선 파평 윤씨의 제실 '임천정사'를 먼저 봐야 한다. 겉모습에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건물이다. 입향조 윤길이 직접 짓고 인재양성 공간으로 쓰다가 나중에 제실로 바뀌었다. 앞에는 작은 도랑을 둬 사철 물소리를 듣게 했다. 뒤로는 임천산이 둘러싸고 있어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을의 크고 작은 잔치도 여기에서 펼쳐졌다.

임천정사 앞으로는 여름에 수련을 피우는 연못이 있다. 그 옆으로 줄지어 선 느티나무와 팽나무, 왕버들로 이뤄진 숲도 아름답다. 풍수지리상 마을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는 인공 비보림이다.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마을과 숲이 공존해 왔다고 '공존상'을 받기도 했다.

마을 가운데에 '천년 안샘'도 있다. 왕대가 둘러싸고 있다. 산비탈에 고즈넉이 자리한 '영양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누정이다. 산비탈의 작은 땅을 내밀어 계단을 만들었다. 옛주인 윤상용의 풍류와 검소한 성품이 배어나는 집이다.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 기념관 전경. 상해임시정부 청사도 재현돼 있다. 함평군 신광면 구봉마을에 있다.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 기념관 전경. 상해임시정부 청사도 재현돼 있다. 함평군 신광면 구봉마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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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 내부. 김구·이봉창·윤봉길 의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선생의 생애는 물론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사를 만날 수 있다.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 내부. 김구·이봉창·윤봉길 의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선생의 생애는 물론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사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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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평마을에서 가까운 데에 잠월미술관이 있다. 도예와 천연염색, 수묵화 그리기 체험을 할 수 있다. 꽃무릇으로 널리 알려진 용천사도 지척이다. 해마다 가을이면 융단처럼 펼쳐지는 꽃무릇으로 많은 여행객들을 불러들이는 절집이다.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 기념관은 신광면 구봉마을에 있다. 상해임시정부 청사도 재현돼 있다. 김철 선생은 집안과 학벌, 재력을 모두 갖춘 요즘말로 '금수저' 출신이다. 김구·이봉창·윤봉길 의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면서 모든 재산을 내놓았다. 광복을 직접 보지 못한 채 48살에 폐렴으로 타개했다.

함평 생활유물전시관 내부. 의식주 관련 유물에서부터 생업활동, 혼인과 제례 등 우리의 오랜 문화를 다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함평 생활유물전시관 내부. 의식주 관련 유물에서부터 생업활동, 혼인과 제례 등 우리의 오랜 문화를 다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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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산면에 생활유물전시관도 볼만하다. 옛 조상들이 쓰던 생활용품에서부터 근대 생활도구까지 한데 모아놓은 3층 규모의 전시관이다. 1층에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는 의식주 관련 유물을 펼쳐 놓았다. 2층은 농사일과 고기잡이, 수렵 등 생업활동 관련 유물을, 3층은 혼인과 제례, 놀이 등 우리의 오랜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옛 장롱과 베틀, 흑백텔레비전까지 기억 저편에 남아있는 생활유물들을 다 볼 수 있다. 어른들은 옛 추억을 더듬고, 어린이들은 신기한 물건들을 보며 조상의 슬기를 배울 수 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초등학교에서 단체로 즐겨 찾는다.

함평 생활유물전시관 전경. 옛 조상들이 쓰던 생활용품에서부터 근대 생활도구까지 한데 모아놓은 3층 규모의 전시관이다.
 함평 생활유물전시관 전경. 옛 조상들이 쓰던 생활용품에서부터 근대 생활도구까지 한데 모아놓은 3층 규모의 전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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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모평마을, #임천정사, #충노비, #함평생활유물전시관, #함평 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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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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