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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3번 출구를 나왔다.

희뿌연 미세먼지 너머로 남대문이 버티고 섰고 양쪽으로 키 큰 빌딩과 땅딸막한 구식 상가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여느 때처럼 도심의 거리는 빈틈없이 가득 찼다. 시계를 힐끔거리며 걷는 넥타이 맨 사람들, 잿빛의 아저씨들, 양손에 까만 봉지를 끼고 걷는 아줌마들과 담배 연기와 엔진 소리, 경적 소리, 거리의 소리…

새 것과 오래된 것들 사이, 바쁜 이들과 느린 이들 사이로 한 노인이 쪽파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걸어갔다.

한 노인이 쪽파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걸어갔다.
 한 노인이 쪽파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걸어갔다.
ⓒ 김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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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보라색 패딩은 숨이 죽었고 어깨를 가로질러 맨 전대도 때가 탔다. 너절한 나무 리어카 양 날개 위엔 기운 좋게 새파란 쪽파가 산처럼 쌓였다. 기계음 뱉어내는 확성기도 없이 노인은 목청껏 전남 보성산 쪽파를 외친다.

"쪽파요 쪽파! 삼 킬로에 이천 원!"

카랑카랑한 소리가 기세 좋게 공기 중으로 퍼지는가 싶더니 엘지 유플러스 매장의 신규 아이폰 광고음악에 묻혀 힘없이 꺼졌다. 울퉁불퉁한 보도블록 탓에 리어카도 덩달아 덜컹거렸다. 노인은 연신 뒤돌아 흙 묻은 쪽파를 가지런히 하고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길가던 사람들이 리어카를 흘끔거렸다. 어떤 이는 옛날을 추억하고 어떤 이는 신기한 듯 쪽파 냄새를 킁킁거렸다. 그러나 도심의 거리에는 누구 하나 선뜻 흙 묻은 쪽파를 사는 이가 없다. 그래서 리어카는 쉬지 않고 걸어갔다. 쪽파 노인은 한참을 걷다 간판이 누런 페스티발 치킨 호프 집 앞에 멈춰 쪽파를 불렀다.

집 나간 철수 찾듯 쪽파를 부르니 뽀글 머리 페스티발 아줌마가 문전에서 뛰어나와 쪽파 세 단을 사 갔다. 천 원짜리 여섯 장을 한 장 한 장 곱게 펴 전대에 넣은 노인이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쪽파는 산처럼 쌓였다.

덜컹, 노인은 보도블록이 끝나는 건널목에 섰다. 고개가 좌우로 바지런히 움직였다. 왼쪽 살펴 벤츠 승용차 한 대 보내고 오른쪽 살펴 딱정벌레 닮은 폴크스바겐도 한 대 보냈다. 이때다 뒤돌아 쪽파를 가지런히 하곤 비장히 찻길을 가른다. 길 위에는 자전거가 갈 곳도 있고 전세버스가 갈 곳도 있는데 쪽파 실은 이륜차가 갈 곳은 없다. 갓길에 바싹 붙어 하릴없이 굴러가던 리어카는 가로수 심어 놓은 도로 방지턱에 기대어 잠시 쉬었다.

긴긴 여정 끝에 남대문 지척에 다다른 쪽파 노인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종종 뛰어서 택시 행렬을 뚫었다. 리어카는 서브웨이와 스타벅스와 본도시락을 지나 드디어 북창동 먹자골목에 들어섰다. 쪽파가 다시 목소리를 높여 닫힌 문을 두드렸다. 북창동 먹자골목에 쪽파가 울려 퍼졌다. 노인은 점심시간 삼삼오오 밀려 나오는 직장인 인파를 비집고 처갓집 한정식 앞에서 쪽파를 부르고, 무진장 횟집 앞에서도 불렀다. 아직 쪽파는 산처럼 쌓였다.

나는 먹자골목 끝자락에서 할아버지 쪽파 얼마예요 했다. 이천 원과 함께 천삼백 원짜리 캔음료를 건네니 노인이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어렴풋이 술냄새가 났다. 그의 언어는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다. 잔돈 거슬러 주며 서울대 법대 다니는 손녀딸 자랑을 하는가 싶더니 소싯적 목포에서 공무원 하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연세대 정외과 다니는 외손자 자랑을 하는가 싶더니 연세대가 좋은 학교요? 묻기도 하고, 또 언어는 한층 더 헝클어져 대뜸 내게 죄송하고 부끄럽다고 했다.

무엇이 그리 부끄러우시냐 물으니 술을 많이 마셔 부끄럽고, 이렇게 사람들 다니는데 리어카 끌고 다녀 부끄럽다 했다. 그러더니 그는 연신 '사장님 고맙소' 하며 채 정돈되지 않은 짧은 대화를 서둘러 마치곤 등을 돌려 나아갔다. "쪽파요 쪽파, 전남 보성 쪽파!" 그는 사라지고 없는데 쪽파는 계속해서 울렸다.

뒤돌아보니 메리어트 호텔과 부영 사랑으로 빌딩과 티마크 그랜드 호텔을 지나, 남대문 카메라 상가와 시장과 이름 모를 골목길 사이로, 전남 목포산 쪽파 한 대가 지나고 있었다. 부끄럼 많은 노인의 생애가 지나고 있었다.


태그:#노인, #리어카, #쪽파, #서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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