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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엔 우리 둘이 잔디밭에 앉아서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참 아름답다는 얘기를 주고받았던 기억도 납니다. 아서가 "천국만큼 아름답다!"라고 말했어요. 그러고는 "천국 가면 맛있는 걸 많이 먹고 싶어"라고 덧붙였고, 나는 "맛있는 건 없어도 되지만 꽃은 많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했지요." (25쪽)
겉그림
 겉그림
ⓒ 수오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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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스 할머니'는 무척 늙은 나이에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그림을 그려서 팔았고, 백 살이 넘어 숨을 거둘 때까지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해요. 이분이 손수 글을 써서 남긴 이야기인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수오서재 펴냄)를 읽으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바탕이 여럿이었구나 싶어요.

첫째, 딸아들이며 집식구가 늘어 집안일에서 살짝 손을 덜 나이가 되었습니다. 둘째, 집식구 모두 이분이 그린 그림을 좋아했고 즐거이 그리도록 북돋았습니다. 셋째, 유럽에서 건너와 미국에 터를 잡은 첫무렵에 사람들이 마을을 어떻게 가꾸고 보금자리를 어떻게 돌보았는가 하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또렷이 떠올리면서 낱낱이 그렸어요. 넷째, 문명이 발돋움하며 옛자취를 잊거나 잃은 현대 미국사람한테 모지스 할머니 그림은 아련하면서 포근했던, 고되기도 하고 복닥거리는 살림이 흐르던 지난날을 되새겨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부엌문까지 썰매를 몰고 오면 우리는 볏짚과 이불을 잔뜩 챙겨 우르르 썰매에 올라타고는 쌩쌩 달려서 큰길에 이르렀고 그다음엔 숲을 가로질렀지요. 썰매를 타고 눈을 맞으며 숲을 누비는 기분은 정말 최고였어요. 참 행복한 시절이었지요." (56쪽)
"기차가 지나갈 때면 블루리지 산맥을 배경으로 증기가 뭉게뭉게 퍼져나가는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도 있었지요. 그때 그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흰색과 회색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131쪽)
모지스 할머니 그림
 모지스 할머니 그림
ⓒ 수오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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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늘 심부름을 했고, 집안일을 함께 했다고 합니다. 사내나 가시내 모두 심부름이며 집안일을 다 합니다. 함께 일하고서 함께 먹습니다. 함께 일하고서 함께 쉽니다. 함께 일하고서 함께 배우고, 함께 노래하며 함께 춤춥니다. 누가 일을 더 많이 하거나 적게 하는 틀이란 없습니다.

기계에 기대어 살림을 짓던 때가 아니니,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함께 해야 합니다. 밥을 먹으려면 누구나 땅을 부쳐야 하고, 하늘하고 바람하고 흙을 알아야 합니다. 물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가를 누구나 알아야 하며, 집을 어떻게 짓고 건사하는가까지 누구나 알아야 하지요.

모지스 할머니는 어릴 적부터 늘 하던 대로 '일을 솜씨 있게 할 줄 아는 어른'인 셈입니다. 모든 일을 눈감고도 척척 해낼 수 있는 삶을 걸어왔기에, 쉰 해나 일흔 해가 지난 옛 일까지 마치 사진으로 찍어서 옮기기라도 하듯이 그림으로 술술 풀어낼 수 있었지 싶어요.

"월요일엔 빨래를 했고, 화요일엔 다림질과 수선을 했고, 수요일은 빵을 굽고 청소를 했고, 목요일엔 바느질을 했고, 금요일엔 바느질과 더불어 정원이나 화단 가꾸기 같은 잡다한 일들을 했어요." (189쪽)


그림 할머니는 언제나 '즐거움'을 그림에 담으려고 생각했다고 밝힙니다. 아무리 고되게 일하던 옛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더라도 싱그러운 바람을 쐬며 좋았고, 다 같이 일하며 노래(일노래)를 부르기에 좋았다고 합니다. 옛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면서 이제는 (죽어서) 없는 그리운 이를 떠올릴 수 있어서 좋으며, 그림을 그리는 오늘날 다시는 찾아보기 어려운 새파랗거나 눈부신 하늘을 다시 헤아릴 수 있어서 좋다고 해요.

모지스 할머니 그림
 모지스 할머니 그림
ⓒ 수오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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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마다 더 힘을 들여서 해야 하는 일을 밝히는 대목을 읽다가 빙그레 웃습니다. 날마다 똑같이 하는 일이 있었을 테고, 요일에 맞추어 온힘을 쏟아야 하는 일이 있었을 텐데, 집이 마치 학교와 같았다고 할까요. 집에서 밥(빵)을 짓는 살림이란 삶을 이루는 바탕을 배우는 셈입니다. 집에서 요일마다 달리 짓는 살림이란 삶을 한결 아름다이 가꾸는 길을 배우는 셈입니다.

오늘날에도 여느 초·중·고등학교에서 요일마다 '텃밭짓기·옷짓기·집짓기·살림짓기·아이돌보기'를 배워 본다면, 이러면서 날마다 '밥짓기'를 스스로 해 볼 수 있다면 매우 멋지리라 느껴요. 이 모두는 학생 때뿐 아니라 어른이 되어도 날마다 누구나 늘 마주하는 살림이거든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샘에서 물을 길어와야 했지만 길어올 물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어요. 꾀를 부리지 않으면 열한 시가 되기 전에 눈처럼 하얗게 빨아서 널은 빨래가 바람에 팔락거렸지요." (223쪽)
"사람들은 내게 이미 늦었다고 말하곤 했어요. 하지만 지금이 가장 고마워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꿈꾸는 사람에겐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젊은 때이거든요. 시작하기에 딱 좋은 때 말이에요." (256쪽)


일흔이 넘어 그림길을 걷는다 하더라도 백 살이 넘도록 살면, 서른 해 즈음 그림살림을 가꾸는 셈입니다. 그림 살림을 쉰 해나 일흔 해쯤 걸어야 대단하지 않습니다. 서른 해쯤만(?) 걸어도 훌륭해요. 스무 해나 열 해만(?) 걸어도 아름답고요.

꿈꾸는 사람한테는 늦을 때란 없이 언제나 처음 하기에 딱 좋은 때만 있다지요. 이와 맞물려 생각한다면, 젊기에 더 이른 때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더 어리거나 더 젊기에 모든 일을 다 해 볼 만한 나이라고는 여기기 어려워요. 아직 겪거나 누린 삶이 없다면 '그림을 그리는 살림'이라 하더라도 무엇을 그림으로 담아야 할는지 모를 수 있거든요.

일흔 해라는 나날을 조용히 집살림을 짓는 길을 걸었기에, 이 일흔 해치 살림길을 그림으로 1600점이 넘는 이야기꽃으로 피울 수 있었지 싶습니다. 글살림이나 사진살림이나 노래살림에서도 이와 같을 만해요. 늦깎이란 없어요. 열다섯 살이나 스무 살쯤이어야 뛰어드는 새길이 아니라, 서른이든 마흔이든 쉰이든 예순이든, 또는 일흔이든 여든이든 아흔이든, 그리고 백이든 이백이든, 꿈을 품고서 이 꿈으로 한 걸음을 내딛으면 될 노릇이라고 봅니다.

모지스 할머니 그림
 모지스 할머니 그림
ⓒ 수오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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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가 정말 발전하고 있는지 때로는 의문이 듭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여러모로 지금보다 느린 삶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시절이었지요. 사람들은 저마다 삶을 더 즐겼고 더 행복했어요. 요즘엔 다들 행복할 시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 (202쪽)


즐거우려고 한 걸음을 내딛어요. 아장걸음을 내딛는 아기도, 일흔을 훌쩍 넘은 나이에 붓을 손에 쥔 할머니도, 새롭게 한 걸음을 내딛으며 즐겁기에 활짝 웃습니다. 꿈을 품기에 일흔다섯 살도 젊습니다. 꿈을 품지 못하기에 스물다섯 살도 늙습니다. 꿈을 떠올리기에 여든다섯 살도 싱그럽습니다. 꿈을 떠올리지 못하기에 서른다섯 살도 주름집니다.

바로 오늘을 첫날로 여겨 한 걸음을 떼어 봐요. 무엇이든 좋아요. 붓을 쥐든 연필을 쥐든, 외국말 한 가지를 배우든 자전거를 타든, 새로 배우며 새로 걷는 길이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 류승경 옮김 / 수오서재 / 2017.12.16.)

+ 2018년 1월에 모지스 할머니 그림만 따로 담은 '그림엽서 묶음'이 나왔습니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 모지스 할머니 이야기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지음, 류승경 옮김, 수오서재(2017)


태그:#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모지스 할머니, #모지스, #그림할머니, #인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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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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