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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화가겸 조각가인 프랑스인 세라 잉이 만든 이 동상작품은  최근까지 길 건너편 프랑스대사관이 보이는 작은 공원내 있었다.
 미술화가겸 조각가인 프랑스인 세라 잉이 만든 이 동상작품은 최근까지 길 건너편 프랑스대사관이 보이는 작은 공원내 있었다.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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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1970년대 '킬링필드' 아픈 역사를 상징하는 동상 조형물이 어느 날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 동상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프랑스대사관 맞은 편 길 건너 작은 공원 안에 설치되어 있었다. 

두 팔을 가슴에 모은 채 다리는 하늘을 향해, 머리는 땅을 향해, 마치 덤블링을 하듯 허공에 떠 있는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 이 추상 작품은 폴 폿 정권이 자행한 '도시민 강제이주정책'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동상 앞 바닥 대리석판 위에는 이 동상이 세워진 이유와 과거 역사를 포함한 상세한 내용이 크메르어와 불어로 새겨져 있었다.

동상 작품이 세워진 지 불과 수개월이 지나지 않았지만, 크메르루즈 희생자가족들 뿐만 아니라, 많은 일반시민들도 이 동상을 찾아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당시 폴 풋 정권에 의해 자행된 아픈 자국 역사를 마음속으로나마 되새기곤 했었다.

프랑스출신 화가이자 삽화소설작가, 그리고 조각가로 알려진 세라 잉(Séra Ing, 57)의 작품이다. 작품명은 '이곳에 더 이상 있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원작품명 : À Ceux Qui Ne Sont Plus Là)이다.

우여곡절 끝에 동상 제막식 가져

 1970년대 크메르루즈정권 당시 자행된 도시민강제이주정책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동상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
 1970년대 크메르루즈정권 당시 자행된 도시민강제이주정책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동상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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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프놈펜주재 프랑스대사관과 캄보디아동포협회(Anvaya), 그리고 일반 독지가들의 성금을 모아 완성된 가운데 지난해 12월 7일 동상제막식이 거행됐다. 이날 행사에는 프랑스대사관과 20여개 시민단체, 크메르루즈 희생자가족, 그리고 시당국을 포함한 현지 정부관료들이 여럿 참석했었다.

이에 앞서, 유엔이 주도하는 크메르루즈전범재판소(ECCC)는 도시민들에 대한 강제이주 명령을 내리고, 이를 주도한 협의로 기소된 크메르루즈 핵심지도부 누온 체아(권력 2인자)와 키우 삼판(당시 대통령)의 재판(재판번호:002/01)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당시 희생자들에 대한 정신적, 육체적 치유 및 보상을 위한 목적으로 지난 2014년 이 동상 건립을 지원키로 결정한 바 있다.

이미 수년전부터 이 작품을 구상해온 미술작가 세라 잉은 수도 프놈펜이 함락된 지 정확히 40년이 되는, 지난 2015년 4월 17일에 동상제막식을 갖는 것을 목표로 기금마련에 나선 적이 있다. 현지 언론뿐만 아니라 국제인권사회단체들도 그의 열정과 노력에 주목했다. 그 사이 그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도 2편이나 제작됐다. 하지만, 최소 90만불~120만불이 소요되는 동상제작 건립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당초 예상했던 목표액의 1/10도 채 걷히지 않아 수년간 공을 들인 동상제작 프로젝트 자체가 좌초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이후 프랑스대사관이 늦게나마 자금 지원에 나서기로 최종결정함에 따라, 급물살을 타 지난해 연말이 되서야 간신히 이 장소에서 동상제막식을 가질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아직까지도 완성된 작품으로 보긴 어렵다. 작품의 일부만 완성된 탓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동상 아래 검은색 대리석으로 만든 작은 연못이 놓여지고, 동상 뒷면에는 물이 흐르는 동판 벽이 완성되었어야 했다. 역시나 부족한 자금이 발목을 잡았다.

그럼에도 작가는 지난해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당시 강제이주로 인한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공간이 따로 마련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체로 만족하다는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캄보디아 출신 아버지 둔 소년이 목격한 것

 크메르루즈에 의해 자행된 도시민강제이주정책 희생자들을 기리는 동상작품제작에 앞서 프랑스 미술작가 세라 잉이 직접 그린 스케치 작품중 하나.
 크메르루즈에 의해 자행된 도시민강제이주정책 희생자들을 기리는 동상작품제작에 앞서 프랑스 미술작가 세라 잉이 직접 그린 스케치 작품중 하나.
ⓒ Sera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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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루즈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동상 건립 아이디어를 내고, 직접 작품제작에도 참여한 작가 세라 잉의 본명은 '포우세라 잉(Pouséra Ing)'이다. 세라는 필명이다. 이름에서 대략 짐작할 수 있듯, 그는 캄보디아출신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캄보디아에서 보냈다. 당시 13살에 불과했던 어린 소년은 수도 프놈펜이 공산게릴라들의 손에 의해 함락될 당시, 동상이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역사의 현장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는 또한 폴 폿 정권에 의해 자행된 '도시민 강제 이주정책'의 생생한 현장을 본 목격자인 동시에 이로 인해 희생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들의 자식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이제 나이 57세가 된 작가 세라 잉은 크메르루즈 공산게릴라 군인들이 무기를 들고, 마치 개선 장군처럼 시내를 활보하며 물밀 듯이 들어오던 그날을, 무려 4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1975년 4월 17일, 바로 그날은 자신이 그리도 사랑하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바로 그날이자, 소년 자신의 순수하고 맑았던 영혼과 어린 시절이 동시에 끝난 날이기 때문이다.

"검은 옷에 붉은 끄로마 천을 목에 맨 낯선 군인들이 시내로 행진해 왔을 당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환영인파속에 파묻혀 있었다. 나는 신기한 눈빛으로 이들을 지켜봤다. 옆에 있던 아버지에게 '드디어 크메르루즈군이 왔어요'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아버지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버지는 내 뺨을 세차게 때렸다. 단 한번도 손찌검을 해본 적이 없던, 자상한 아버지였다. 왜 아버지가 내 빰을 때렸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때의 기억을 지금도 나는 지울 수가 없다. 어쩌면, 그때 아버지는 자신에게 닥칠 운명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춘기에 막 접어든 소년 세라 잉은 그때 일어난 상황들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크메르루즈군의 최고지도자였던 폴 폿은 급진적 성향을 가진 공산혁명주의자였다. 그는 '부르주아'로 통칭되는 도시부유층과 지식인들을 싸잡아 증오했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농업을 기반으로 한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지상에 건립하는데 있어, 도시민들이야 말로 '인민의 최대 적' 쯤으로 간주했다. '앙카'라고 불리던 당시 지도부는 대도시를 가진 자와 배운 자들이 득실되는 '모든 부정부패의 근원지'라고 확신한 나머지, 급기야 도시 자체를 없애기로 결정했다.

그 실행 첫 단계로 당시 정권은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키자마자, 곧 바로 다음날부터 도시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농촌으로의 강제이주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의식개조와 사상교육을 통해 농업을 기반으로 한 지상낙원을 건설하겠다는 게 그들이 갖고 있던 야심찬 계획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권은 도시민들을 강제로 시골로 쫓아내려는 실제적 이유에 대해서만큼은 대외적으로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프놈펜시민들에게는 곧 닥칠 미국의 비행공습을 피해 3일만 도시를 비워줄 것을 명령했다. 이미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도시민들을 농촌으로 내몰리기 위해 꾸며낸 날조된 거짓말이었다.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도시민들은 무작정 시골로 끌려갔다. 소련제 AK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의 협박에 그 누구도 감히 저항할 수 없었다. 저항은 곧 즉결 처형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자가용이나 트럭 등 교통수단은 이미 게릴라군에 압수당한 상태였다. 도시민들은 무거운 짐을 들고 최종 목적지도 모른 상태로 무작정 수 백 킬로 길을 걸어야만 했다. 어린 아이들과 노약자, 심지어 병든 환자들도 예외는 없었다. 먹을 식량도 구급약조차 제공받지 못한 가운데 수 십 만 명에 이르는 도시민들은 이런 방식으로 시골로 보내졌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이러한 이동과정에서만 최소 2000명에서 많게는 2만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 대사관의 비인도적 처사로 사지로 몰린 희생자들

 캄보디아주재 프랑스대사관의 높은 담벽의 모습. 당시 외국여성과 결혼해 자녀까지 둔 캄보디아남성에게 이 벽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높디 높은 장벽이었다.
 캄보디아주재 프랑스대사관의 높은 담벽의 모습. 당시 외국여성과 결혼해 자녀까지 둔 캄보디아남성에게 이 벽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높디 높은 장벽이었다.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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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버지 역시 다른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시골에 있는 강제수용교화소로 끌려가 결국 1978년 끝내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기근과 질병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잃거나, 혹은 세라 잉의 아버지처럼 과거가 드러나 공개 처형을 당한 사람들은 그 수를 합쳐 무려 200만명이 넘는다. 당시 전체 인구의 1/4에 해당되는 숫자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절대 놓쳐서 안 될 부분이 또 한 가지가 있다. 당시 프랑스대사관이 연루된 범죄행위와도 관련이 있는 문제다. 당시 프랑스대사관은 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일정부분 책임을 결코 피해갈 수가 없었다. 이는 이미 드러난 역사적인 진실이며, 프랑스정부도 스스로 인정한 부끄러운 역사다. 

당시 프놈펜주재 프랑스대사관은 미국과 일본, 우리나라 대사관 등 남은 대사관들이 모두 철수한 가운데 유일하게 버티고 있던 대사관이었다. 이 곳은 당시 이 나라를 떠나지 못한 외국인들과 종군기자들에게는 마지막 남은 피신처나 다름없었다.  정권에서 일하던 고위 공무원들과 그 가족들도 스스로 목숨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대사관 안으로 대피를 시도했다. 하지만, 프랑스대사관은 외국 여권을 소지한 자만 안으로 들어오게끔 허용했다. 단, 외국여권을 소지한 남성과 결혼한 캄보디아 현지 여성과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만큼은 여권이 없더라도 결혼을 입증할 서류가 있으면,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하지만, 예외는 있었다. 외국 여성과 결혼한 캄보디아 남성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프랑스대사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외국 여성과의 결혼증빙서류를 보여 주어도 대사관의 단단한 철문은 끝끝내 열리지 않았다. 결국 캄보디아출신 남편들은 외국인 아내와 자식들을 남겨둔 채 죽음이 기다리는 대사관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대사관 밖은 살기가 가득한 크메르루즈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참고로〈미션>이란 영화로 널리 알려진 롤랑 조페 감독이 만든 대작영화 〈킬링필드>의 한 장면에서도 캄보디아인 남편을 껴안고 절규하는 외국인 아내의 모습이 잠시나마 나온다.

세라 잉의 아버지는 당시 정권이 저지른 도시민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였다. 동시에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대사관의 비인도적인 결정으로 인해 사랑하는 아내, 자식들과 결별한 채 결국 죽음의 사지로 내몰린 여러 피해자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결국 아버지를 죽음의 땅에 홀로 남겨 둔 채, 세라 잉은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태국을 거쳐 무사히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남은 성장기를 보낸 그는 프랑스 명문대학인 소르본느에 입학해 미술학을 전공했다. 그는 현재까지도 프랑스 화가이자 조각가로 왕성한 활동 중이며, 20여 편이 넘는 삽화소설을 쓴 작가로도 프랑스출판계에 널리 알려진 중견작가다.

동상 옮기고도 침묵으로 일관

한편, 프랑스 대사관이 바로 보이는 곳에 동상을 설치하게 된 이유에 대해 작가 세라 잉은 "어린 시절 강제이주민들이 떠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본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이 같은 아픈 개인사가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현지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도 여러 차례 그 같은 사실을 털어 놓은 바 있다. 

그는 또한 "과거 자신의 아버지처럼 희생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과거 아픈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고, 전후세대가 과거 역사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무려 40년이나 지나 50대 중년이 다 되어서다. 어린 시절 겪은 트라우마가 그를 평생 괴롭혔을 것이 분명하다.

확인 결과, 이 동상은 프놈펜 광역시청 당국 공무원들에 의해 제3의 장소로 옮겨진 것으로 밝혀졌다. 시청 관계자에 따르면, 이미 이 동상은 뚜얼슬렝 대학살박물관 창고로 옮겨진 상태다. 이 박물관은 과거 중고등학교건물을 개조해 감옥으로 사용했던 곳으로, 킬링필드 당시 무고한 양민 1만 4000여 명을 고문한 끝에 학살한 역사의 현장으로 더 유명하다. 유태인 대학살로 악명 높은 폴란드 아우쉬비츠감옥의 '캄보디아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이곳은 과거 크메르루즈 희생자들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적인 장소라는 점에서 비슷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동상을 굳이 뚜얼슬렝 박물관으로 옮긴 것에 대해선 현지 국민들과 역사학자를 포함한 관계전문가들도 납득하기 힘들다는 반응이다. 이 동상은 오로지 크메르루즈 정권의 강제이주정책으로 말미암아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추모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프놈펜 시청 당국은 동상을 뚜얼슬렝 박물관으로 옮겼다는 정보를 현지언론에 흘린 것 외에 현재까지도 침묵으로 일관중이다. 시청 대변인조차 현지 언론을 상대로 한 줄 논평조차 내놓지 않은 상태다. 

이에 대해 군소정당을 대변하는 사회인권변호사로 활동중인 프랑스인 매리 구이로드씨는 "유엔 크메르루즈전범재판소(ECCC)가 장소까지 최종결정한 사항을 시당국이 아무런 사전통보도 없이 다른 곳으로 이전한 건 이해할 수 없는 처사다. 동상 제막 당시 프놈펜광역시당국도 장소 선정에 대해 이미 동의한 바 있다. 이 동상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그대로 갖기 위해선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일반시민들도, 유엔전범재판소가 최종결정한 장소에 대해 프놈펜시당국이 아무런 사전 상의도 없이 제3의 장소로 옮긴 사실에 대해 분개했다.

대학생 찬 씨톨(21)씨는 "역사의 현장에 남아 있어야 할 동상을 (프놈펜시청이) 왜 없앴는지 모르겠다"고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캄보디아출신 아버지를 죽음의 땅에 둔 채 결국 프랑스로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소년 세라 잉은 훗날 유명미술화가로 성장해 돌아와, 도시민강제이주정책으로 인해 희생된 자들을 위한 추모동상건립을 위해 수년 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캄보디아출신 아버지를 죽음의 땅에 둔 채 결국 프랑스로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소년 세라 잉은 훗날 유명미술화가로 성장해 돌아와, 도시민강제이주정책으로 인해 희생된 자들을 위한 추모동상건립을 위해 수년 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Nicholas F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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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프랑스 파리에 거주, 뒤늦게 소식을 접한 작가 세라 잉 역시도 프놈펜시당국의 이 같은 일방적 결정에 대해 놀라움과 더불어, 짙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최근 현지영자신문 〈프놈펜 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도시가 과거 역사를 부디 잊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이 같은 역사가 비극적인 역사에 관한 것이라면, 더 더욱 잊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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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프라자 뉴스 편집인 겸 재외동포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