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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자연에서 크는 아이들
▲ 멜버른의 흔한 하늘 풍경 광활한 자연에서 크는 아이들
ⓒ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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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멜버른에 정착을 한 지 3개월쯤이 지났을 때, 뒷마당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아들은 유치원에 보내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늘을 보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파랑이 지천이다. 쏟아져 내리는 하늘. 그래서 멜버른의 하늘은 한국의 하늘보다 낮게 걸린 느낌일까?

"애가 한 두 명 더 있었으면 좋겠어."

삶의 터전을 옮기기 전엔 머릿속에 담아 보지도 않았던 말이 부지불식간 새어 나왔다. 아들 한 명을 겨우 낳았을 때도 가족들은 '네가 애를 낳다니 믿기지 않는다'는 말을 달고 축하했었다.

한국에 살면서 출산에 대한 공포는 극심했었다.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아이 키우기에 불편한 아파트 위주의 주거환경, 경제적 부담, 독박 육아의 공포, 교육환경의 비정상성, 사회 안전망의 부재 등.

그나마 아이 한 명을 얻게 된 것도 순전히 브라질 출신의 남편 덕이다. 독박 육아는 면할 것이란 확신, 시월드와 겪을 갈등 제로, 양육과 교육방식에서 발생할 낮은 언쟁 확률 덕에 감행할 수 있었다.

건강 약자에 이미 노산 언저리를 기웃대던 나에게 출산 결심이 곧 임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어서, 결국 핏줄로 맺어진 인연을 포기하고 입양을 준비하려 할 때 아이가 나에게로 왔다.

한국과 호주, 육아의 '질적 차이'
멜버른에는 다자녀 가구가 많다
▲ 교실에 붙은 그림 멜버른에는 다자녀 가구가 많다
ⓒ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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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아들이 다니던 어린이집에는 총 20여 가구가 있었고, 그 중 한 가구만이 세 자녀 가정이었다. 반면 현재 아이가 소속된 학급에는 21명 기준에 세 자녀 이상을 둔 가정이 9가구다.

멜버른에 산다고 해서 출산과 양육과 교육이 품을 들이지 않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바쁜 것은 한국이나 멜버른이나 매한가지인데, 질적으론 상당한 차이가 있기에 다자녀 가정이 흔할 뿐이다.

호주의 복지제도는 북유럽 국가들과 한국의 중간 어디쯤에 걸쳐 있기에, 한국과 마찬가지로 출산과 함께 경력 단절을 경험하는 여성들이 많다. 저소득층과 맞벌이 부부, 다자녀 가구를 위한 부분적 복지가 마련되어 있으나, 보편적이고 전면적이지 않기 때문에 초등 입학 전까지는 비용이 꽤 발생한다.

예로 한국의 어린이집과 유사한 데이케어는 하루 대략 100불(한국 돈으로 8만4천 원) 정도의 비용을 예상해야 하기 때문에, 엄마의 수입이 높지 않은 경우에는 집에서 아이 돌보기를 선택하기 쉬운 구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여성들이 느끼는 육아에 대한 압박은 상대적으로 낮다. 주 38시간 근무에 야근이라는 개념이 적고, 회식 문화가 없는 사회의 아빠들은 가족과 함께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 받을 수 있다.

정착 초기에 멜버른 곳곳에서 목격되는 아이 둘셋을 데리고 홀로 외출한 아빠들의 모습은 생경한 풍경이었다. 갓난 아이는 유모차로 밀고, 둘째는 아기띠로 매고, 첫째는 옆에 대동한 아빠라니! 북유럽에 '라떼파파'가 있다면 멜버른엔 '멀티태스킹파파'가 있다.

자녀의 수가 경제적 부담과 비례하지 않는 이유도 한 몫 한다. 공립병원을 이용한다면, 한마디로 지갑 한 번 열지 않고도 임신부터 출산 양육이 가능하다. 초등부터 공교육은 무상이며, 자녀 수 대비 부모의 수입이 적으면 자녀 수당과 함께 월세까지도 현금으로 보조를 받는다. 한국처럼 사교육에 대한 병적인 쏠림이 없고, 대학입학을 자녀 양육의 필수조건으로 여기지 않으니, 교육이 곧 노년 빈곤으로 전락할 우려도 적다.

"여긴 한국이 아니잖아요"
바다가 삶의 일부가 되는 곳
▲ 소렌토의 백비치 바다가 삶의 일부가 되는 곳
ⓒ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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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아이들을 쇼핑몰, 멀티플렉스, 실내 놀이터 같은 자본과 결탁된 인공 시설물들이 키워낸다면, 멜버른에선 사방에 널린 자연이 아이들을 품어 키운다. 어디에 살든 10여분만 걸으면 한적한 공원이 나타나고, 30여 분만 운전하면 망망대해가 펼쳐지고, 어느 곳을 가든 아이를 동반한 가족을 위한 무료 편의시설들이 설치되어 있다.

자연을 접목한 놀이터, 캠핑장, 바베큐 시설, 공원 한쪽에 모닥불용 통나무들마저 제공해주는 사회에서는 부모가 특별한 노력과 돈을 쏟아 붓지 않아도 부모 노릇 하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사실 그랬다. 이곳에 살아보니 아이를 키우는 일이 제법 다양하고 근사한 경험이 되곤 한다.

며칠 전, 멜버른에서 만난 홈클리닝 사업을 하는 J와 저녁을 먹었다.

"누나, 요새 다시 둘째를 갖기로 마음을 바꾸었어요."

작년말에 사업을 확장하느라 몸을 돌볼 수 없었던 J는 건강이 좋지 못했었다. 건강 때문에 둘째를 포기했다가 몇 달 만에 마음을 바꾸었다는 그가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여긴 한국이 아니잖아요. 설령 제게 나쁜 일이 닥쳐도 사회가 아이를 책임져 주잖아요."

많은 이민자들이 한국을 떠난, 또는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내가 한국을 떠난 결정적 이유도 아이다.

'비로소 정착했다고 안심한 곳이 허공'(<바깥은 여름>, 김애란)일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도시는 신비한 힘을 지닌다. '무자식 상팔자'를 입에 달고 산 한 인간의 정체성을 순식간에 흔들며, 출산의 의지를 불타 오르게도 한다.

'몇 년만 젊었을 때 왔다면 둘째도 시도해봤을 텐데…!'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와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태그:#멜버른, #호주, #이민, #출생률, #다자녀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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