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3.05 17:37최종 업데이트 18.03.05 17:37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사람들-국가폭력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의 억울함을 듣고 조사하는 과거사 위원회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만나는 일을 해왔다. 나는 국가폭력피해자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편집자말]
단단한 덩치에 압도적 인상을 가진 사람일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절룩거리는 걸음에 작은 키를 가진 사람이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변 조사관입니다."


명함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네, 임이라고 합니다. 전 명함 같은 것이 없어서..."

명함을 받으며 그가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대신 혹시 신분증 가지고 오셨나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내밀었다. 지갑에서 꺼내지 않고 윗주머니에서 바로 신분증을 꺼내는 것을 보면 그는 미리 신분증을 제출한다는 것을 예상했던 것이다. 신원확인을 하는 동안 무슨 차를 드시겠느냐고 물었으나 괜찮다고 했다. 으레 거절하는 말이겠거니 하고 녹차를 내드렸다. 물론 나는 커피를 마시고.

그의 앞에 녹차를 내놓고 자리에 앉았다.

"제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십니까"

함께 식사하는 임문준 씨. ⓒ 변상철


일본 출생 교포 2세.
일본에서 고교 졸업.
일본에서 결혼 후 한국으로 입국하여 사진관 개관
1년도 되지 않아 중앙정보부 연행
무기징역 선고
20년 복역 후 출소

그가 지닌 이력이다.

"일본간첩 사건으로 함께 기소되었던 최종수씨가 진실규명을 신청했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함께 공동정범으로 기소되었던 선생님께 몇 가지 여쭈려고 왔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출소하실 때 나이가?"
"나올 때 50세가 이미 훌쩍 넘었더라고요. 잡혀갈 때 뱃속에 있던 놈이 어느덧 대학시험을 봤더군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이미 저에 대해서 대충 알고 오셨을 테니 다 아실 거 아닙니까? 저야 일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 여기 제주는 아는 사람이 없어요. 아내 고향이 이곳이다 보니 출소 후에 아내가 있는 곳으로 온 것뿐이지요. 일본에 계셨던 부친은 제가 중앙정보부에 잡혀 온 뒤에 연행돼 조사받다가 돌아가셔서 일본으로 돌아갈 곳도 없었지요.

제가 가지고 있는 건 사진 찍는 기술뿐이었죠. 출소 후에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데 어느 날 옆집에서 찾아와서는 일본에서 손님이 오는데 일본어를 잘하니 며칠 가이드를 좀 해달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제주 이곳저곳 가이드를 해주면서 사진을 몇 장 찍어주었더니 아주 좋아하더라구요. 그 뒤로 여행사에서 연락이 와서는 일본 단체 관광객들 안내하는 가이드를 맡아줄 수 있느냐고 해서 지금까지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에 들어와서 D.P점(사진관)을 냈던 건 북한의 지령에 따라 그렇게 한 건가요?"
"지령요? 조사관님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시나 보군요. 전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여기에 왔는데."
"무슨 생각을 한다는 겁니까?"
"절 간첩으로 확신하고 계신 것 아닌가요?"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다. 난 확신하고 있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정말 간첩이라는 걸....

"아닌가요?"

그의 표정이 싸늘해지며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대답 대신에 그의 앞에 한 뭉치의 서류를 꺼내 놨다.

"이게 뭡니까?"

그가 물었다.

"모르시겠어요? 북한과 주고받았던 통신자료잖아요."

그는 서류에 눈길 한번, 손길 한번 주지 않았다. 알 듯 말 듯 한 표정의 미소만 지어 보냈다.
한참을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언뜻 그의 눈가가 반짝였다. 난 이해되지 않았다. 저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슬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표정에서 흐르는 눈물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조사관님, 제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십니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중정에서 조사를 받고 검찰로 이송된 후에 뇌출혈로 사망하신 걸로 압니다만."

"저 역시 서대문구치소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곳 미결수동에서 근무하던 교도관이 혼자 수용되어 있던 저의 방에 오더니 부친이 사망했다는 것을 알려주더군요.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 역시 수감자의 몸이기 때문에 부친의 시신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공항에서 체포되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조사받는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시신을 인계받을 사람이 없는 신원불상자로 처리되어 화장이 되어 벽제에 묻혔습니다."

"기록을 보니 뇌출혈이더군요. 아마도 평소 혈압이 높으셨던 것 아닐까요?"
"평소 혈압이 높으셨다면 해외여행 때도 혈압 약을 가지고 다니셨겠죠? 조사관님도 수사기록을 보셨겠지만 저희 아버님이 공항에서 체포될 때 압수목록을 한번 보십시오. 혈압약이 목록에 있었습니까?"

그래, 없었다. 압수목록에 의약품이 있었다면 눈에 띄었을 텐데 분명 압수목록에서 혈압 약 같은 의약품목은 보지 못했다.

"혹시 잊고 온 건 아니었을까요?"
"잊고 왔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면 수사기관에서 조사받는 동안 높은 혈압 때문에 혈압약을 달라고 요구했을텐데 처방받았다는 기록은 없었습니다. 제 아버지의 혈압은 정상이었어요."
"그럼 부친의 뇌출혈이 다른 이유라는 겁니까?"

"내가 내 몸 살자고 부친을 팔았습니다"

1969년 11월 3일 동아일보 기사. 임문준 등이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기사. 임문준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 변상철


그의 설명은 이랬다. 1969년 부산에 입국한 그는 일본에서 구입한 사진기계와 인화장비를 가지고 고국에서의 생활을 꿈꿨다. 그러나 그 꿈도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건장한 수사관들이 찾아와 자신을 연행해 갔다. 중정 부산지부에서 하룻밤을 자고 서울 남산으로 옮겨졌다. 자신의 가게에 있던 고가의 카메라들도 모두 압수되었다.

일본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의 아버지가 조총련계 사람이었는데 그로부터 북한공작지령을 받고 한국에 잠입한 혐의였다. 아니라고 할 때마다 상상도 하지 못한 고문과 폭력이 자행되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하나 혐의가 추가 되었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북한에도 다녀온 것으로 되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조작된 수사기록을 어디서든 잊지 않도록 암기하는 것이었다. 살기 위해 암기했다. 암기하면 그만큼 그에게 쏟아지는 폭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간첩이 되는 것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수사관들이 가져온 통신문이라는 것을 달달 외우면 그만이었다. 2년치 분량의 통신문을 외우고 그 통신문에 기재된 내용대로 지령사항을 수행했다고 하면 완성이었다. 그렇게 간첩으로 완성되어 가던 어느 날 완벽한 간첩이 되기 위한 마지막 작업이 남아 있었다.

한국에 들어온 뒤에 일본에서 지령사항을 전달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수사관은 일본에 살고 있는 부친에게 연락을 취하라고 강요했다.

"니 부친도 같이 포섭 됐을거 아니야. 전화해서 사업 의논할 게 있으니 들어오시라고 해. 그럼 니 죄도 가벼워지고 금방 나갈 수 있어."

아무리 힘들었지만 부친을 이 죽음의 구덩이로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이 지옥의 고통을 경험한 내가 어찌 부친을 이 사지로 내몰 수 있단 말인가? 할 수 없다고 버텼지만 그때마다 지속적인 폭력이 쏟아졌다. 전기고문을 받을 때마다 코끝에 전해지던 고기 익는 냄새는 정말 잊을 수 없었다.

온몸 구석구석이 말라가는 느낌의 참을 수 없는 고통. 차라리 죽고만 싶은 전기고문의 고통은 그를 너무 쉽게 굴복시켰다. 결국 수화기를 집어 들었고, 부친에게 입국을 부탁했다. 부친은 의심 없이 승낙했고, 결국 김포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사관들에게 체포된 것이다.

"부친을 내가 죽인 셈이죠. 나와 같은 고문을 받았을테니...내가 내 몸 살자고 부친을 팔았습니다."

부친이 체포되었다는 말을 수사관들로부터 들었다. 그날부터 수사관들의 대우가 달라졌다. 일주일간 매일같이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도록 했다. 그런데 목욕물에서 파스 냄새 같은 것이 났다. 안티푸라민을 여러 통 풀었다고 했다. 안티푸라민을 섞은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면 멍이 금방 사라진다고 했다.

그리고 잘 때는 얇게 저민 생소고기를 상처 부위에 붙이고 잠을 잤다. 아침이면 쇠고기가 까만색이 되어 역한 냄새를 풍겼다. 그렇기를 일주일 정도 하자 내 몸의 상처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상처가 사라지자 수사관들은 그를 검찰로 이송했다. 마치 중정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고기로 없앤 고문의 흔적

동성식당 상차림. ⓒ 변상철


'동성 식당'

대정읍사무소에서 나와 근처 함께 밥을 먹자고 했더니 간 곳이 '동성식당'이란 곳이었다.
하긴 여기가 최남단이긴 하지.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주문을 받기 위해 왔다.

"여기 한 상 주라."

주문은 이 한마디가 끝이었다. 소위 '스끼다시'라고 하는 음식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광어와 우럭회가 나왔다. 한상 차림이 너무 푸짐해서 가격이 만만치 않을 거라 생각했다.

"회 좋아하십니까?"
"회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고기를 못 먹습니다. 고기만 보면 상처에 붙였던 역한 냄새가 떠올라서요. 그러다보면 부친 생각도 나고..."
"아, 네."

튀김과 탕을 먹고 나니, 과일화채가 나왔다. 화장실을 간다면서 슬쩍 계산을 하는데 가격이 6만 원이었다. 서울에서 이 정도 한상이라면 10만 원도 넘을 차림이었다. 몰래 계산했다며 섭섭해 하는 그와 함께 식당을 나왔다.

"조사관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나도 우리 아버지도 간첩 아닙니다."
"서울에 올라가면 저도 다시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부친의 일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말을 꺼내놓고 곧바로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 분들에게 '유감'을 말하는가. 유감을 표한다면 죽음으로 내몬 당사자와 국가여야 할 텐데.

서울에 올라온 나는 이 사건을 수사했던 수사관을 찾아냈다. 통신문을 입수하고 조사한 경위를 확인하기 위해 그와 면담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놀랍다 못해 허탈했다.

"우리 임무는 북에서 누군가에게 보내는 무작위 암호전문을 가로채 분석하는 일이었습니다. 몇 년간 북에서 날아오는 지령통신을 누구에게 보내는지 몰라 우리가 애를 꽤 먹고 있었죠. 아마도 해외로 보내는 듯한 통신내용이었는데 누구에게 보내는지 몰라 골치 아팠거든요. 그때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용의자가 체포되었다고 하면서 수사국에서 이 통신문을 가져갔습니다. 그러더니 통신문과 용의자의 범행행적이 일치한다고 하더군요."
"그럼 통신문의 내용이 국내로 보내는지 해외로 보내는지도 알지 못했다는 겁니까?"
"그럼요. 용의자를 잡기 전에 어떻게 알겠습니까?"

"법정에 증인으로도 나가셨던데요."
"아, 네, 제가 그 일 때문에 고생 좀 했죠. 증인으로 출석하라고 해서 나갔는데 대공수사국에서 정말 엉망으로 조사를 했더라구요. 아니 세상에 지령 통신문 날짜와 지령 수행날짜가 같으면 어떻게 하자는 건지. 지령 받은 날 어떻게 간첩활동을 하냐는 말입니다. 용의자 국선변호인이 그 문제를 제기해서 하마터면 이 사건이 무죄가 될 뻔했지 않습니까? 당시 수사관의 자질이 그 정도로 엉망이었던 시절이죠."

임문준은 지금
임문준은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한 재일교포다.

임문준은 오사카에 살면서 사진공부를 하였다. 1968년 부산에서 사진점을 열고 아내와 아들과 함께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69년 3월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에게 연행되어 조사받으며 그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수십 일간의 고문을 통해 북한에 다녀온 간첩으로 둔갑하였고,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의 회유에 일본에 살고 있던 부친을 한국으로 들어오게 하여 부친 역시 모진 중앙정보부 조사를 받게 되었다. 모진 고문은 결국 부친을 사망케 하였고, 그는 이 소식을 구치소에서 들었다. 부친을 사망케 한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원망을 평생 가지고 살고 있다.

출소 후 제주에서 살게 된 그는 일본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관광안내와 통역을 해주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고문후유증으로 망가져버린 무릎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2012년, 임문준은 재심에서 43년 만에 무죄 선고를 받았다. 현재 그는 대정읍 무릉리에서 아내와 함께 조용한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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