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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소풍 가기 전날이 가장 행복하듯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가 가장 즐거운 순간이 아닐까? 백화점이나 쇼핑가에서 물건을 고르는 것보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것이 물리적인 에너지가 덜 소비된다. 이동 경로가 훨씬 짧다. 사람이 많지 않고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서점 구석에 주저앉아도 되고 벽에 기댈 수도 있다.

읽기 전 단계에서 독자들은 즐거운 순간이 많다. 책을 고르고, 배송을 받고, 포장을 뜯어서 새 책 냄새를 맡고,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는 재미 말이다. 책을 고르는 일은 즐거운 일인데 가능한 그 즐거움이 오래가도록 좋은 선택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독서를 오래 하고, 서점 밥(서점을 많이 다닌다는 뜻)을 많이 먹으면 자연스럽게 책을 보는 안목이 길러지고 좋은 책을 고를 확률이 높아지기는 하다.

오랜 세월에 걸려서 터득하게 되는 것보다는 간단한 요령을 먼저 알고 책을 고른다면 수업료는 훨씬 낮아질 것으로 생각한다. 잘못 산 책이야말로 계륵 중의 계륵이다. 헌책이라는 물건은 보통 값어치가 없어서 팔 수도 없고, 그렇다고 쉽게 버리지도 못한다.

오직 좁은 서재 공간을 차지하고 먼지를 양산하는 존재일 뿐이다. 또 주인이 볼 때마다 자신이 잘 못 산 책이라는 좌절감을 안겨준다. 그럼 우리가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책에 표시된 정보만으로 책을 고르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이 출판사다. 내 딸아이가 어렸을 적에 나는 '보리'출판사에서 나온 그림책을 보면 무조건 샀더랬다. 무엇보다 삽화가 아름답고 따뜻하다. 이 출판사에서 나온 아동서나 유아서를 보면 알겠지만, 아이들에게 따뜻한 정서를 줄 수 있으며 교육적인 책이 대부분이다.

폭력적이거나 지나치게 유행에 민감한 자극적인 책이 없다. 아이들에게 '아빠 어렸을 적엔 말이야'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을 때 이 책을 미리 읽어 둔다면 아이들에게 '우리 아빠는 최고 이야기꾼이에요'라는 찬사를 들을 것이 분명하다.

분야별로 믿고 살 수 있는 출판사가 있기 마련이다. 해외 문학을 읽는다면 단연 '열린책들'이 좋다. 애초부터 해외 문학 특히 러시아 문학을 출간하기 위해서 설립되었으니 오죽하겠는가?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들은 표지디자인이 우수하고, 번역 질이 높고,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한 것이 장점이다. 어떤 책을 사도 평균 이상은 하지만 러시아 문학서는 우리나라 최고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민음사는 국내 최대 출판사답게 다양한 책을 다량으로 낸다. 디자인이나 번역, 가격 등 특별한 구석이 없이 고르다. 워낙 안정적으로 꾸준히 책을 내다보니 특별히 모험하지 않는 것 같다. 민음사의 장점은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을 생각하면 되겠다. 문학 전집 중에서 가장 많은 권수를 자랑한다.

문학과지성사는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가 있는 곳이다. 누가 시집을 냈다고 하면 그런가 하고 넘어가는데 표지에 시인 얼굴이 삽화로 그려진 문학과지성 시인선이라면 시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작품성이 뛰어난' 시라고 생각하게 된다.

시를 잘 읽지 않지만, 문학과지성 시인선이라면 구매라도 하고 싶고, 시를 잘 모르지만, 문학과지성 시인선이라면 한번 읽어보려고 시도는 해본다. 굳이 시집이 아니더라도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은 꼭 읽어봐야겠다라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런 출판사다.

을유문화사, 창작과 비평, 문학동네도 괜찮은 선택이다.

비문학으로 넘어가 보자. 동아시아는 과학 분야에서 최고를 자랑한다. 필자가 <독서평론>이라는 잡지에 연재한 적이 있는데 어느 달에 편집자가 급하게 연락이 왔다. 연재 필자들로부터 원고를 받고 보니 5개 중의 3개가 동아시아에서 나온 책이라고. 곤란한 상황이긴 하지만 필자더러 다시 원고를 써달라고 할 수 없으니 그대로 나가긴 했다.

인문 분야 연재를 맡았던 내가 동아시아에서 흔치 않은 인문서 즉 <도쿄대 불교학과>를 소개했는데 다른 두 필자가 동아시아에서 나온 사회과학과 과학서를 소개했다. 누가 봐도 학생들에게 유익한 책을 많이 내는 출판사다. 동아시아라고 해서 고르는 것이 아니고 고르고 보니 동아시아에서 나온 책임을 알게 된다.

한길사에서 나온 책은 믿고 사도 된다. 아니다. 거의 최고 수준에 가깝다. 한길사에서 나온 책이 잘 팔리는 시대가 온다면 아마도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독서 국가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한길사를 대표하는 책은 <로마인 이야기>가 아니고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다. 권당 500권도 팔기 힘들다는 인문고전시리즈를 오랜 세월 동안 150권 이상 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는 헌책방에서 대접받는 몇 안 되는 국내서이기도 하다. 물론 한길사에서 나온 다른 책도 좋은 선택이다.

열화당과 눈빛 출판사는 미술과 사진 분야에서 최고를 자랑한다. 열화당이야 워낙 전통이 깊고 유명하니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눈빛 출판사는 오직 사진집만을 내는 몇 안 되는 출판사 중에 하나다. 예술사진보다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많이 내는데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관한 시각 자료는 가장 많이 소유한 출판사라고 생각한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라는 취지에 따라 그 시대를 잘 보여주는 사진 작업이 압권이다.

푸른역사,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역사서는 믿을 만하다.

까치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은 무조건 좋은 책이고 사야하며 읽어야 한다. 아무리 표지 디자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더라도 그 신념은 까치출판사에는 양보했으면 좋겠다. 까치출판사가 언제 출간되었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설립 이래로 표지디자인이 전혀 발전이 없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진집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그는 누구인가?>는 이 출판사가 고집하는 무성의한 표지에 반기를 든 유일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사진집답게 화려하고 장정도 고급스럽고 또 고급스럽다. 초판이 절판되었고 재판이 출간되었는데 재판마저 절판되었다. 어쨌든 참 좋은 출판사다.

책을 고를 때는 번역가도 고려해야 한다. 언어별로 최고라고 인정받는 번역가가 있기 마련이다. 프랑스 문학이라면 김화영 교수가 되겠고, 고대 그리스 고전이라면 선택할 여지조차도 없이 천병희 교수인데 다만 가격이 비싼 것이 흠이다. 번역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다만 교수신문에서 발표한 <최고 번역본을 찾아서> 자료를 참고하는 것이 좋겠다.

완역인지 축약본인지도 중요하다. 원전을 고스란히 번역한 판본도 있고 요약해서 번역한 축약본도 있다. 독자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보통 축약본이라고 해서 누구나 알아보기 쉽게 축약본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번역서를 살 때는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과 비교를 해서 분량이 턱없이 작다면 축약본인지 아닌지 잘 살펴보고 사야 한다.

직역인지 중역인지를 살펴야 한다. 열린 책들에서 나온 도스토옙스키 문학 전집의 번역이 유명한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직역본이라는 것이다. 즉 러시아 말을 우리말로 옮겼다는 것.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열린책들에서 이 시리즈가 나오기 전까지는 영어나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했다. 이것을 중역이라고 하는데 당연히 번역에 오류가 많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중역을 한 책이 중역했다고 알아보기 쉽게 표시가 된 경우가 드물다. 직역본은 나름대로 홍보를 하는 편이니 잘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가능한 최신 번역본이 좋겠다. 당연한 이야기다. 오래된 번역은 아무래도 번역상의 오류나 구시대적 어휘가 많을 수 있으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최근에 번역된 판본이 더 좋은 선택이 될 확률이 높다. 새로운 세대에는 새로운 번역이 필요하다.


태그:#출판사, #책,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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