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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설에 대해, 명절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대구가 거주지고, 시댁은 대전이며, 친정은 서울인 나는 명절 때면 늘 정신없이 바빴다. 명절 하루 전날부터 대전 시댁에 가서 음식을 준비하고, 다음 날 아침이면 차례상을 차리고, 시댁서 점심을 먹고 나면 서울 친정으로 부랴부랴 이동하느라 바빴었다.

늘 마음은 바쁘고, 몸은 힘들고, 때론 짜증도 나고, 여자들이 명절에 겪는 설움에 공감하다 화가 나다 하면서도 그래도 우리 시댁은 이정도면 다행이지 하면서 지냈었다.

지금 난 캐나다 밴쿠버에 있다. 고로 설 연휴는 없다. 가톨릭 신자인 나의 가족(남편과 아들로 구성된 내가 꾸린 가족)에게 이곳에서 명절이란 지난 일요일 참석한 합동위령미사가 전부였다. 그 날 신부님께서는 한국에서 어렸을 때 보낸 설의 따뜻한 추억에 대해 말씀하셨다.

"설이면 전날부터 온 식구가 모두 모여, 남자들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막걸리를 마셨고, 여자들은 부엌에서 음식준비를 하느라 분주했습니다. 남자들이 텔레비전을 보며, 막걸리를 가져와라, 전을 가져와라 하면 어머니들(큰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 등을 지칭했던 것으로 여겨짐)은 툴툴거리면서도 음식들을 가져다 주셨죠. 그리고 저녁이면 만두제사라는 걸 지냈는데, 저희는 유교식 전통을 지키느라 남자들만 제사를 지내고 여자들은 음식만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좁은 집에 서로 몸을 부대끼며 함께 잠을 자고, 다음 날 차례를 지냈죠. 그 후엔 윷놀이며, 고스톱을 치며 모두 정겨운 시간을 보냈죠. (중략) 그런데 요즘엔, 사촌 형들도 모이면 그 다음날 차례만 지내고 곧바로 일터에 복귀하기 위해, 혹은 친정에 가기위해 서둘러서들 집을 나섭니다.(후략)"

대략 이런 정도의 추억들을 들려주시면서 신부님은 그 따뜻한 가족의 분위기가 무척이나 그립다고 하셨다. 물론 알고 있었다. 신부님께선 먼 타향에서 명절 분위기조차 없이 지내는 이 곳 이민자들에게 따뜻한 명절의 분위기를 전하고 싶어 하신 말씀임을, 그리고 가족공동체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신 것임을 말이다.

문득 부엌에서 일을 하던 그 어머니들도 명절이 그리울까, 이런 분위기를 진정 즐기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나의 마음은 한국에서 지냈던 나의 어린 시절 명절로 향하고 있었다.

친정에 가지 못한 외숙모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한국전통음식연구소에서 열린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와 함께하는 설 차례상 차리기'에서 한복을 입은 가족이 차례 시연을 하고 있다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한국전통음식연구소에서 열린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와 함께하는 설 차례상 차리기'에서 한복을 입은 가족이 차례 시연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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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기 전, 그러니까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살 때, 나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서울에 있었다. 그래서 우린 설 아침이면 큰 아버지 댁에 가서 세배를 하고 가족이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큰 댁에서는 종교적 이유로 제사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차례를 지내지 않고, 떡국과 식구들이 좋아하는 한과 등을 먹으며 담소를 즐겼다.

때로는 윷놀이도 하고 가끔은 점심도 큰 집에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큰 집엔 사촌오빠들이 셋 있었는데 음식을 먹고 나서 집을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것들은 오빠들이 나서서 도왔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우리 어머니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집안으로 시집을 가셨던 것 같다. 명절이 아닌 다른 일들로 속을 끓이신 일은 있었지만, 나의 큰 집에서의 명절은 그 때의 시대적 상황과 비교해 볼 때 꽤 양성평등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오후에 외가로 갔다. 어머니에겐 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셋, 그러니까 내겐 외삼촌 한 분과, 이모 셋이 계시는데 모두 결혼을 하고 아이가 둘씩 있었다. 때문에 외가엔 어른만 해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까지 12명, 아이들이 모두 10명, 합 22명의 대가족이 모여 늘 시끌벅적했다.

난 외가의 사촌형제들과 매우 친하고, 이모들도 너무나 좋아했었기에 늘 외가에서의 시간을 기다렸고, 신나게 놀았다. 그리고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는 그 시간은 어른이 되기 전 내게 설의 하이라이트와 같은 순간이었다. 여기까지는 신부님이 기억하고 계신 가족의 정이 듬뿍 넘치는 명절 그대로였다.

그런데 신부님의 이야기 속 어머니들은 신부님이 '따스하고 행복하게' 생각하시는 명절을 어떻게 기억하실까가 궁금해지자, 문득 나의 외숙모님이 생각났다. 우리가 설날 저녁에 외가에 가서 신나게 놀던 그 때 나의 외숙모님은 거기에 계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외숙모님이 친정에 가시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 오전에는 큰댁에 가서 차례를 지내고 오셨을 텐데, 외숙모님은 다른 며느리들이 친정에 가서 비로소 편안한 명절을 맞고 있는 그 시간에도 시댁인 나의 외가에 계속 계셨던 것이다. 어머니와 이모들은 모두 오전에 시댁에 들러 일을 하고 오후엔 친정인 외가에 가서 명절을 즐겼지만, 외숙모님만은 시누인 나의 엄마와 이모들을 그리고 우리 조카들을 위해 거기 계셨던 거다.

떠올려보면 외가에서 이모부와 외삼촌, 아버지는 늘 거실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고, 이모들과 어머니는 부엌의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외숙모님은 식구들이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어느 자리에도 계시지 않았었다. 아마도 부엌에서 계속 음식을 만들고 계셨으리라.

내가 기억하는 신났던 어린 시절의 명절을 외숙모님도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실까. 직접 묻지 않아 모르겠지만, 결혼 후 명절을 치러 본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결코 따스하지만은 않으셨을 것 같다. 그리고 신부님 댁 어머니들도 신부님과는 조금 다르게 설날을 기억하시라 여겨진다.

명절에 대한 다른 기억

또한 안다. 누군가에게 따스하고 행복한 명절의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힘들고 고되며 억울함을 가져오는 기억일 수도 있음을
 또한 안다. 누군가에게 따스하고 행복한 명절의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힘들고 고되며 억울함을 가져오는 기억일 수도 있음을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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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그토록 명절을 기다려왔던 나였지만, 결혼 후엔 달라졌다. 며느리가 되고 겪은 명절은 더이상 유쾌하고 즐겁지 않았다. 나의 시댁은 일을 많이 하는 분위기가 아닌데도, 명절만 되면 괜히 긴장되고 피곤했다.

남자들은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있고, 여자들은 쉼없이 음식을 해야 하는 그 분위기 자체가 그냥 피곤했고, 가끔은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다. 명절이면 더욱 기승을 부리는 가부장적인 분위기 자체가 답답하고 화가 났다. 아마도 나의 외숙모님도, 신부님의 어머니들도 결혼 후 내가 느낀 명절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셨을 것이다. 하지만 내색도 않고, 가족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열심히 노동을 제공하셨으리라.

이제는 안다. 어린 시절 즐거웠던 나의 명절은 명절 내내 부엌을 떠나지 못했던, 나의 외숙모님 덕분이라는 걸. 그리고 신부님의 명절에 대한 따스한 추억도 신부님 고향집의 작은 부엌에서 종종거리셨던 어머니들 덕분이었을 것임을.

또한 안다. 누군가에게 따스하고 행복한 명절의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힘들고 고되며 억울함을 가져오는 기억일 수도 있음을. 그리고 이 모든 기억의 불일치는 가부장제의 그림자에서 비롯된 것임을.

또 다시 설이다. 해외에 살고 있다는 특혜(?)로 인해 나는 이번 설에 가부장제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때문에 비록 전화 한 통이지만, 피로와 억울함을 느끼지 않고 양가 어른들께 보다 진심으로 안부를 묻고 새해 인사를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의 많은 가정에선 여전히 서로 다른 명절의 기억들이 기록되고 있을 것이다.

과연, 모두가 따스하고 정겨운, 기다려지는 명절을 보내게 될 날이 올 수 있을까? 멀리 밴쿠버에서 설을 회상하며 질문을 던져본다. 아마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린 시절 우리에게 따스한 명절을 선물했던 그 어머니들의 노동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인식할 수 있을 때, 변화는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 조심스레 믿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태그:#설, #페미니즘, #양성평등, #명절문화, #가부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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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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