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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는 특유의 냄새가 난다. 향기라고도 할 수 없고 냄새라 부르기도 애매한 독특한 향. 그게 서고 소독 겸 방충을 위해 뿌리는 방향제라는 걸 안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도서관 자리가 있다. 누구는 칸막이로 된 열람실 자리가, 또 누군가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 자리가 외려 집중이 잘 된단다.

나는 주로 대학 도서관의 2관 5층, 아니면 3관 4층에 자리잡았다. 2관 5층은 문학 서적이 보관돼 있었고, 3관 4층은 통유리인 데다 산자락에 위치해 있어 고개를 돌리면 바로 나무들의 머리를 볼 수 있었다.

"우리 학교 도서관 책들 보면 33페이지에 도장 찍혀 있는 거 알아?" 

어느 날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동기가 불쑥 그런 말을 건넸다. 그 말에 책상에 있던 책들을 죄다 펼쳐봤다. 과연 33페이지마다 세로로 '○○대학교도서관'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우리 학교만 그랬던 건지, 지역 공공도서관 장서에도 그리 찍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때의 나는 그 무작위성이 좋았다. 그게 백면이든 아름다운 이미지로 채워진 페이지든 도장은 고르게 찍힌다. 어쩌면 우리가 무작위로 만나는 어떤 문장들에도 나름의 길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집에 있는 책 중 몇 권을 골라 33페이지를 펼친다. 그리고 그중 눈에 띄는 문장을 하나 고른다. 시집이든 에세이든 만화든, 어느 책이나 상관없다. 삼삼(33)한 문장은 어디에나 숨어 있다. 그 무작위성이 우리를 또 다른 단상으로 이끌어주리라.

스노우캣, 내가 운전을 한다 중
 스노우캣, 내가 운전을 한다 중
ⓒ 황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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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 뒷좌석에 처음 짐을 실은 순간도 소중합니다."
_스노우캣, <스노우캣의 내가 운전을 한다>, 미메시스, 2017.

2017년의 개인적 10대 사건 중 하나는 바로 운전면허 취득이다. 그게 무슨 10대 사건씩이나 되느냐고 코웃음치는 여러 사람들의 비웃음이 여기까지 들리지만, 운전면허를 따고 처음 운전대를 잡았을 때의 에피소드는 거의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만큼이나 저마다의 무용담으로 가득하다.

이 책 구매에 지대한 작용을 한 건 띠지를 초보운전 스티커로 활용할 수 있다는 거였는데, 실제로 차 뒤에 붙이고 다녔다. 검은색 스티커인데 뒷유리에 선팅을 한탓에 초보운전 글씨가 다른 운전자들에게 안 보였다는 게 함정이지만…

아무튼 올해 초보운전자의 가장 큰 굴욕은 홍대 유니클로에 가서 잘못 산 옷을 교환하고 자유로를 달려 파주까지 출근을 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홍대 유니클로 근방에 차를 세우려다 주차할 곳을 못 찾고(혹은 주차를 못해서) 2시간 동안 빙빙 돌다 패잔병처럼 옷을 그대로 들고 집으로 귀환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서 소중한 교훈을 두 가지 얻었는데, 하나는 토요일 오후에 홍대 심장부에 차를 끌고 가는 건 운전 5년차 이상은 되어야 할 수 있다는… 그러니까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다는 것과 하나는 내비게이션을 절대 믿지 말라는 거였다. 공사중인 경의선 책거리 근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내비가 자꾸 그쪽만 알려줘서 정말이지 한겨울에 진땀을 주룩주룩 흘렸더랬다.

권혁웅,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중
 권혁웅,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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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것도 쎌프서비스였지."
_권혁웅,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창비, 2013.

시집 33페이지엔 오직 이 문장 하나뿐이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의 제목은 대체로 이렇다. <김밥천국에서> <조마루감자탕집에서> <도봉근린공원> <금영노래방에서 두 시간> <CGV에서 두 시간>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일상의 페이소스를 진하게 우려낸 국물 같은 시들을 한 모금 들이켜면 속이 뜨끈해지면서 마음이 풀어진다. 내 고민이 별것 아닌 일처럼 느껴진다.

광화문 근처에 좋아하는 카페가 있다. 경사가 있는 데다 지하철역에서도 멀어 겨울엔 찾아가는 길이 쉽지 않다. 춥네, 추워를 반복하며 종종걸음으로 올라가다 카페 문을 열면 갑자기 온몸에 온기가 들어차는 그 느낌이 좋아서 겨울에도 광화문 인근에 갈 일이 있으면 빼놓지 않고 들른다.

셀프서비스가 아닌 곳을 찾기가 힘든 요즘 프랜차이즈 카페들과 달리, 이곳은 주문한 커피를 자리로 가져다준다. 점심 때나 주말 오후면 손님들로 빼곡한데 이상하게 붐빈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장인처럼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의 모습을 보며 느긋이 기다리면 어느새 한 잔의 커피가 내 앞에 놓인다.

한 모금을 마시면, 그렇다. 역시 내 고민이 별것 아닌 일처럼 느껴진다. 이럴 때는 정말 셀프서비스보다 누군가의 정성이 담긴 한 잔이 소중하다. 한 잔의 커피와 한 줄의 시처럼 마음을 데우는 무언가가.

존버거, A가 X에게 중
 존버거, A가 X에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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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 함께 과거를 만들어봐요."

_존 버거, <A가 X에게>, 열화당, 2009.

<A가 X에게>는 독방에 갇힌 사비에르와 그의 연인 아이다가 주고받은 편지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사비에르는 이중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다.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나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죽어서도 감옥에 감금돼야 하는 혹독한 형벌이다. 결혼한 사이가 아니면 면회가 허용되지 않던 시절. 그들은 더이상 미래를 약속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함께했던 과거가 있다. 달콤한 미래를 상상하는 대신, 그들에게 익숙한 과거를 다시 상상해보기 시작한다. 처음 만난 날, 서로의 가족, 살았던 집… 천 갈래 만 갈래의 상상으로 그들은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 그리고 천 번을 다시 만난다. 그렇게 단단히 사랑을 붙들어맨다.

우리는 자주 미래를 약속한다. 내년에도, 그 다음해도 이렇게 같이 있자고. 그러나 정말 어려운 건 쉽게 건네는 한마디 말이 아니라 '지금 그 순간' 함께 있는 거다. 모든 현재가 미래의 과거이듯, 모든 과거는 현재를 보내야만 만들어진다. 종종 그걸 잊고 산다. 그래서 미래만을 꿈꾸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달 뒤에 만나자는 약속보다 지금 당장 누군가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지금 우리가 함께하는 그 순간이 필요한 때가. 이제는 이렇게 말해보는 것도 좋겠다.

"우리 함께 과거를 만들어봐요."

과거를 만들자는 말은 현재를 함께하자는 것이니까.

존 윌리엄스, 스토너 중
 존 윌리엄스, 스토너 중
ⓒ 황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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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토너는 부모가 식사를 하기 전에도, 식사를 마친 뒤에도 자신의 계획이 바뀌었음을,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했음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한두 번 말하려고 해보았지만 새 옷을 입은 부모의 적나라한 갈색 얼굴을 보니 두 사람이 여기까지 먼 길을 온 것과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보낸 그간의 세월이 생각나서 말하지 못했다."
_존 윌리엄스, <스토너>, 알에이치코리아, 2015.

농학을 공부하러 대학에 입학한 스토너는 영문학에 빠진다. 그는 대학에 남아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정한다.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는 그가 어서 대학을 졸업해 자신을 도울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주저하면서도 결국 말한다. 가기로 마음먹은 길에 대해, 자신을 사로잡은 학문에 대해. 대학이 지금처럼 보편적인 교육과정이 아니던 시절, 하나뿐인 아들이 '쌀이 나오지도, 밥이 나오지도 않는 학문'에 뛰어들겠다는 건 그야말로 살 길이 막막해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평생 땅을 거스르지 않고 묵묵히 일해온 부모는 그 운명 또한 받아들인다.

진짜 어른이 되는 순간은 부모를 거스르는 때부터가 아닐까. 부모와 한 번도 이견이 없었던 사람은, 혹은 부모의 말에 그건 아닌데,라며 한번쯤 고개 갸웃거려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제대로 살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는지도. 부모와 나 사이엔 30년의 시간차가 있다. 접해온 세상이 다르니 내려야 할 결정의 판단 기준이 다른 것 또한 당연하다. 부모와 이별하기, 그들의 희생 그리고 죄스러움과 이별하기… 수많은 이별들이 우리를 키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계간 <딴짓>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태그:#스노우캣, #권혁웅, #존윌리엄스, #존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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