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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등에 진 남자들의 헛기침 소리와
고물장수, 엿장수 재첩국 장수, 찹쌀떡 메밀묵 장수들이
머리에 어깨에, 가난의 방물을 지고 흘러가던 길

숨 가쁘게 먹이 물어 나르던 어머니 돌아가신 이듬해
소방도로에 입적되어
사리하나 남기지 않은 길
전순복 시인이 지은 <골목>이란 시다. 그의 말마따나 '골목'은 누군가에게 그 옛날 어리고 가난했던 시절의 기억이 서린 곳이자, 지금은 여기저기 들어선 아파트에 밀려 사라진 곳이다. 그렇다고 골목이 모조리 사라진 건 아니어서 또 다른 누군가에겐 여전히 매일같이 오가고 머무는 길이자 쉼터이기도 하다. 그렇게 골목은 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구불구불 이어져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고개 돌리는 곳마다 아파트가 눈에 들어오는 서울에서 골목은 '아직' 아파트가 들어서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대개는 오래되고 나지막한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들. 그래서 골목을 끼고 사는 삶은 어딘가 불편해 보인다. 차량과 쓰레기가 뒤엉키고, 밤이면 뒤따르는 발소리에 지레 겁을 집어먹게 만드는 좁은 길, 우리에게 골목은 으레 그런 곳이다.

골목을 바꾸겠다고 나선 한국 첫 민간인 동장

여기 다른 골목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황석연 전 동장을 비롯해 서울 금천구 독산4동 주민들이다. 황 전 동장은 2016년 1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2년간 독산4동의 동장으로 일했다. 우리나라의 첫 민간인 동장이었다. 임기를 마치고 다시 금천구 주민으로 돌아온 그를 지난 5일 서울의 어느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요즘 동장이던 때보다 더 몸값이 높다. '혁신 동장'으로 여기저기 강연에 불려 다닌다. '지방분권'과 '사회혁신(Social Innovation)'에 대한 높아진 관심도 한몫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전남 순천시까지 내려가 시 공무원 정례조회에서 독산4동 이야기를 들려주고 왔다.

 금천구 독산4동 황석연 전 동장
 금천구 독산4동 황석연 전 동장
ⓒ 김경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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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2년간 지켜본 주민센터는 어땠을까.

"동 주민센터는 뇌가 없다. 어딘가 문제가 생기면 손발이 나서서 해결하도록 뇌가 명령을 해야 하는데, 주민센터는 이 기능이 없다. 계획은 정부와 구청에서 세울 뿐이다."

주민 가장 가까이 있는 곳이지만 정작 주민이 겪는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는 곳. 그가 처음 맞닥뜨린 주민센터는 그런 곳이었다. 그가 쓰레기 문제에 손을 대겠다고 하자 공무원들은 하나같이 "미쳤다"고 했다. 그는 오기가 생겼다.

주민센터 3층에 있던 동장실을 나와 1층 민원실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나중엔 아예 동장실 벽을 허물고 주민과 토론할 수 있는 널찍한 공간을 만들었다. 주민과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뜻이었다. 그가 '솔루션 테이블(Solution Table)'이라고 부른 이곳에 올린 첫 의제가 바로 골목길 쓰레기 문제였다.

"서울의 모든 동네가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주택가에선 쓰레기를 자기 집 앞에 버리는데(이를 '문전 수거'라고 한다), 청소업체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치우려니 쓰레기 우리 동네에만 해마다 2억 8,000만 원이 든다. 이 비용을 주민들에게 돌려주면 어떨까 생각했다."

주민들과 머리를 맞댄 끝에 골목 곳곳 50~60곳에 '재활용 정거장'을 마련하고 화요일과 금요일 낮 3~9시에만 쓰레기를 내놓도록 하기로 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니 업체에 줘야 할 비용이 줄었고, 이렇게 아낀 비용을 '도시 광부'라 불리는 주민 도우미 50~60명에게 나눠줬다. 처음엔 매달 20만 원을 주다가 나중엔 40만 원으로 올렸다.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제도가 뿌리내리도록 하기 위해 몇 달 뒤 문전수거 중단, 즉 집 앞에 내다놓은 쓰레기는 치우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그야말로 쓰레기 대란이 벌어지면서 주민의 불만이 쏟아졌다.

"두 달을 버텼다. 주민센터 트럭을 끌고 나가서 공무원들과 내가 직접 치우기도 했다. 물론 역부족이었지만, 그런 모습을 지켜본 주민들이 진심을 알아봐줬다. 그리고 결국 새 제도가 자리 잡았다."

공동체는 시장보다 힘이 세다는 믿음

 동장실이 있던 주민센터 3층은 주민들과 머리를 맞대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동장실이 있던 주민센터 3층은 주민들과 머리를 맞대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 독산4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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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더 들더라도 전문 업체에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까지 시는 이런 문제를 시장 논리로 풀어왔다. 쓰레기가 늘어나니 돈을 더 들여서 청소업체를 불러들이는 식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주민은 쓰레기를 더 버리게 되니 쓰레기와 비용은 계속 늘어난다. 분리도 제대로 안 돼 적환장에서는 또 돈을 들여 사람을 투입한다."

돈은 돈대로 들면서, 쓰레기는 계속 늘고, 재활용도 제대로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독산4동은 달라졌을까.

쓰레기를 버리는 날이 되면 '도시 광부'들이 재활용 정거장 앞을 지킨다.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몇 시간씩 일을 도우면서 이웃들에게 방법을 일러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주민들도 분리수거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자연스럽게 재활용율도 높아진다.

"서울시 평균보다 우리 동네 재활용율이 두 배가 높다. 그만큼 깨끗한 재활용품이 나오는 거다."

이게 다가 아니다. 사람이 지키고 있으니 범죄가 사라지면서 골목이 더 안전해졌다고도 한다. 골목에서 마주치는 이들이 더 이상 낯설지만은 않게 되었으니, 얼굴 없던 골목에 얼굴이 생긴 셈이다.

"쓰레기가 사라진 골목에는 꽃을 심을 생각이다. 행안부의 '마을공동체 정원사업'에 뽑혀 올해 1억 원을 지원 받기로 했다. 이 돈으로 교육장과 부엌을 갖춘 유리정원을 만들어 주민의 공간, 공동체 공간으로 쓸 것이다."

'마을공동체 정원사업'은 지역의 노는 땅에서 이웃과 함께 꽃밭 등을 가꾸며 공동체 의식을 높이려는 사업이다. 곧 공간이 지어지면 뜻을 같이 하는 주민들이 모여 못 쓰는 신발이나 버려진 용기에 꽃을 심게 하고, 주민센터가 이 꽃을 사서 골목 곳곳에 가져다 놓기로 했다.

"청년과 어르신 그리고 엄마들에게 공간을 마련해주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일거리와 친구가 생기고 돈도 벌 수 있다. 또 거리도 깨끗해지고 몸을 쓰니까 건강도 얻는다. 행복한 마을의 5가지 조건이다. 그렇게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골목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2016년 사회혁신 디자이너 에치오 만치니 교수와 하승창 서울시 정무부시장이 독산4동을 찾아 공유주차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2016년 사회혁신 디자이너 에치오 만치니 교수와 하승창 서울시 정무부시장이 독산4동을 찾아 공유주차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금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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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년간 '차보다 사람이 먼저인 골목'을 만드는 일에도 매달렸다. 지난 2년 사이 동네 골목에서 노인 한 명과 어린이 한 명이 차에 치어 죽거나 크게 다쳤다. 불법주차 된 차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차 때문이었다. 더 이상은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2016년엔 거주자우선주차구역을 '공유'하는 실험을 했다. 시흥대로 126길 T자 골목의 거주자우선주차구역 14면을 낮 시간엔 누구나 차를 댈 수 있도록 하고, 저녁 시간엔 주차구역을 배정받은 주민끼리 어느 곳에나 댈 수 있도록 했다. 혹시라도 낮에 차를 댔다 미처 빠지지 않은 차가 있더라도 다툴 필요가 없도록 한 것이다.

주민 설득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앞에 나선 건 주민들이었다. 황 동장을 비롯한 공무원들은 뒤에서 조용히 도왔다. 그러자 놀랍게도 차들로 꽉 막혔던 골목에 숨통이 트였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딸이 맘 편히 차를 댈 수 있게 됐다"며 주민들도 반겼다. 

2017년엔 실험 범위를 넓혔다. 주민센터 지하주차장을 밤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공유주차장으로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골목에 접한 연립주택과 개인주택, 어린이집 주차장 등 모두 17면을 공유 주차장으로 만들어냈다. 벽에 안내판을 달아 공유할 수 있는 시간대를 적도록 했다. 앱 같은 차가운 기술이 아닌 이웃끼리의 따듯한 믿음으로 이뤄낸 '공유'라는 점에서 더 뜻 깊다.

"주차도 쓰레기처럼 행정이 관리하던 걸 주민이 관리하도록 한 거다. 주민 사이에 싸움이 나면 다른 주민을 투입해서라도 계속 부딪히고 경험하면서 주차공간이 공유지라는 인식을 심어주려고 했다."

 골목 운동회
 골목 운동회
ⓒ 독산4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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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사람이 어우러지는 골목을 만들려 '골목 운동회'도 벌였다. 맛집들이 길게 늘어선 이른바 '먹자골목' 앞을 아침부터 막고서 신명난 주민잔치를 열었다. 폭이 제법 넓어 오가는 차들이 속도를 줄이지 않아 늘 조마조마했던 골목이다. 차들이 뒤엉키던 골목에서 떡메도 치고, 달리기와 제기차기, 줄넘기와 윷놀이를 하며 애 어른 할 것 없이 한데 어울렸다.

비록 한 번의 운동회였지만 지나는 이들에게 '골목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란 물음을 던졌다. 지금은 골목 가운데에 대형 화분을 놓아 차들이 화분을 돌며 자연스레 속도를 줄이도록 했다.

"사람중심 교통체계를 만들려면 차로를 막을 권한을 주민에게 줘야 한다. 막고 놀고 걷게 만드는 데 예산을 쓸 수 있도록, 이런 걸 총괄 예산으로 주민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는 행정의 역할이 "어떻게 하면 규제를 피해서 주민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지를 돕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행정혁신'이다.

첫 해 여름, 그는 동네 성당의 주차장을 빌려 공짜 수영장을 열었다. 예산은 주민센터가 댔지만 운영은 주민에게 맡겼다. 반응이 좋아 지난해에 다시 열었다. 동네에 있는 4곳의 어린이 놀이터도 점차 주민에게 맡겨 관리하도록 했다.

 성당 주차장에 만든 동네 수영장
 성당 주차장에 만든 동네 수영장
ⓒ 독산4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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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나 구보다 동이 더 중요하다

그는 자신이 몸소 겪은 사회혁신을 이렇게 정리했다.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과정에서 주체를 발굴하는 것, 그리고 이들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행정이 혁신하고 합리적으로 예산이 가도록 지원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대다수의 지자체들은 '문제 진단'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뭘 해야 될지 모르고 예산을 주니까 예산낭비가 너무 심하다"는 것.

그는 주민이 문제를 제기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행정이 뒷받침 하되, 주민이 힘들어할 때 적절한 시점에 전문가들이 도움을 주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도시 광부'로 일하다 지난해 11월에 암으로 사망한 80대 노인 이야기를 들려줬다. 보수정당 지지자였던 그 노인은 처음엔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도시 광부' 일을 하며 가까워졌는데, 암으로 병원에 입원해있으면서도 재활용 수거를 하는 날이면 병원복 차림으로 골목을 지켰다고 한다.

"도시 광부가 그렇게 유지됐다. 60명이 끼친 영향이 얼마나 대단했겠나. 이게 주민이다."

그는 "서울시나 구보다 2~3만 명이 사는 동이 더 중요하다"며 앞으로 10년, 공동체를 키워 골목을 바꾸고 서울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꾸는 일에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골목과 동네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고 힘주어 말하는 황석연 전 동장, 그가 바꿀 또 다른 동네의 풍경이 벌써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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