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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걷는 이유

 입체적인 구름이 떠 있는 광활한 푸른 하늘 아래 동네(수비리 가는 길)
 입체적인 구름이 떠 있는 광활한 푸른 하늘 아래 동네(수비리 가는 길)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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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순례자들의 최종 목적지가 된 데에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성 야고보(Saint Jacques)와 관련이 있다. 그는 포교 활동을 하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42년에 헤롯왕에게 참수형 당한다.

그가 순교한 뒤, 제자들은 그의 사체를 파드론을 경유하여 '세계의 끝'이라는 피니스테레(Finis Terre)에 묻는다. 하지만 이교도 여왕인 루파(Queen Lupa)와 로마 사절단이 공모하여 성 야고보 사체와 그의 제자들을 없앨 계획을 세운다. 제자들은 다시 사체를 옮겨야 했다.

그로부터 771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펠라요(Pelayo) 수도사는 유난히 '밝은 빛(혹은 별)'이 하늘에서 반짝이는 것을 본다. 그 빛에 이끌려서 가게 된 곳이 리브레돈 들판이다. 그곳에서 성 야고보의 무덤을 발견한다. 이 사실이 알려진 뒤부터 사람들은 리브레돈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라고 불렀다. 즉, '성 야고보(Sant Iago)가 있는 별(Stella)들의 들판(Compos)'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산티아고 대성당 지하에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 무덤 위에 성당을 세웠기 때문이다. 대성당을 성 야고보의 무덤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 야고보의 무덤은 중세시대에 수많은 순례자들을 불러들였다.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도 많았다. 유럽 각지에서 순례자들이 왔기 때문에 그 길도 다양하다. 현재에는 네 개의 유명한 순례길이 있다. 프랑스길, 은의 길, 북쪽 길, 포르투갈길이다. 프랑스길(Camino de Frances)은 198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현재에도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순례자를 자처한다(카미노는 스페인어로 '길'을 뜻한다. 그래서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된다). 순례자라고 해서 다 종교적인 이유로 걷는 것은 아니다. 복잡한 현대 사회의 욕구에 맞게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은 카미노 위에 선다.

카미노를 걷다보면 으레 왜 걷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나도 그렇게 묻곤 한다.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게 된 데에는 극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아주 단순하다. 걷고 싶어서 걸을 뿐이다. 불성실한 답변이라는 것을 알지만 가장 솔직한 답변이기도 하다. 하지만 뭔가를 더 바라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를 추동하는 그 힘이, 내가 내보이기 싫은 그 무엇이 무의식에 있을 거라고. 걷다보면, 그러니깐 걸으면서 내가 '나'와 대화를 하다보면 그 윤곽이 잡히겠지 싶었다. 그 막연함이 좋았다.

 푸른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들(수비리 가는 길)
 푸른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들(수비리 가는 길)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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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 사람들은 이 길을 많이 걷죠? 가톨릭 국가도 아니잖습니까?"

론세스바예스에서 저녁 식사를 할 때 맞은편에 앉은 이탈리아 중년 남자가 내게 도전적으로 물었다. 나는 잠깐 당황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국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같은 식탁에 동양인 두 명이 앉아있었지만 그의 일본인 친구였다.

그렇게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인가(걸으면서 이 질문을 제일 많이 받았다. 이때만도 알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이 길을 왜 걷게 됐냐고 물어도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나인데, 한국 사람의 산티아고 행을 내게 묻고 있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나 많이 오나요? 이곳에서는 저 혼자뿐인 것 같은데요? 실은, 뭐라고 답변하기가 힘들군요." 

낯선 곳에서 썩 내키지 않은 사람과 합석하는 것은 혼자 있는 것만 못하다. 식탁에 앉았을 때 몇 마디 대화가 오고 갈 때부터 이탈리아 중년 남자가 탐탁지 않았다. 그는 정년퇴임한 일본인 친구와 함께였다. 작년에 이 길을 완주해서 그들을 초대해서 같이 걷는다고 했다. 일본 사람들은 점잖고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 반면 그는 이것저것 내게 질문을 해댔다. 그 식탁에서 이방인은 나뿐이었다.

나는 가능한 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950m에 위치한 수도원을 연신 짙은 안개가 내리눌렀다. 그 축축함과 우울함이 내게 다 스며드는 듯했다. 어서 식사를 마치고 침대로 돌아가서 상비약으로 가지고 온 감기약을 먹고 자고 싶었다. 미열과 한기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내일은 어디까지 가시오?" 식탁 호스트 자리에 앉은 그는 다시 내게 질문을 했다. 왼쪽에는 일본인 친구들이, 오른쪽에는 내가 앉아서 양쪽을 거느린 형상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모든 사람을 좌지우지하겠다는 듯이 굉장히 컸다. 목소리만큼이나 등치도 친구 두 명을 합한 것과 같았다. 붉은 코와 불룩 튀어나온 광대뼈. 자칫 잘못하면 그가 매번 화를 낸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인상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27.4km 지점인 라라소아냐까지 간다고 했다. 그는 휴대폰에서 지도를 꺼내 보여주면서 그곳은 알베르게가 몇 개 없다면서 왜 21km 지점에 있는 수비리(Zubiri)까지 가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들끼리 그곳 모 알베르게에 대해서 한참을 떠들었다. 저녁과 아침 식사를 주는데, 그 양이 엄청나다는 등. 지난해에 그곳에서 이탈리아 남자가 머물렀던 모양이다. 그는 나도 그곳에서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미소로 응답했다. 본식으로 나온 치킨과 포테이토가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먹을 수 있을까, 라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닭다리는 어떤 양념도 없이 달랑 하나만 나왔고 그 빈 공간을 대부분 포테이토가 차지했다. 접시 바닥으로 기름이 흐르고 있었다. 왜 치킨을 먹는다고 했을까. 수도원이 운영하는 알베르게 리셉션에서 식사를 주문했다. 저녁 식사는 10유로이고 아침 식사는 5유로라고 했다. 아침식사는 7시부터라고 해서 주문하지 않았다. 순례자들에게 제공하는 순례자 메뉴다. 전식 본식 후식과 포도주가 나온다. 다른 곳보다 저렴하지만 메뉴가 다양하지 않다. 이곳에서는 닭고기와 생선 중에 골라야했다.

한때 채식주의자가 되려고 했다. 고기를 끊은 적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모임에서 뒤풀이 장소로 고깃집에 가면 몇 점 먹다 말았다. 기름으로 튀긴 음식도 햄버거나 빵도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내가 닭고기를 골랐다. 고기를 먹어야 힘이 난다는 말을 신뢰한 것일까. 배고프면 본능적으로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을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요 며칠 거의 굶다시피 했다(순례길을 걷는 동안 내내 음식이 나를 괴롭혔다. 완주하고 나니 10kg이 빠져 있었다. 스페인은 고기가 흔하고 싸다). 

식탁에 올라온 본식을 보는 순간, 그렇지 않아도 없던 입맛이 싹 가셨다. 생선을 주문한 이탈리아 중년 남자 접시도 볼품이 없었다. 뱃속에서는 어서 음식을 들여보내주라고 하는데도 섣불리 포크가 가지 않았다. 닭다리에 포크와 나이프를 대고 끄적거리듯이 살점을 뜯어냈다. 그때였다, 이탈리아 남자가 내게 물은 것이. "이해했어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봤다. 그는 나이프와 포크를 양손에 든 채 내게 답변을 요구하고 있었다. 무슨 답변을 요구한 거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그의 일본인 친구들에게 그렇게 좋은 숙소가 있는데 저 한국인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분명하게 귀에 꽂혔다. 닭살을 헤집다말고 나는 빠른 어투로 대거리를 했다.

"아, 이곳에 오기 전에 세운 계획이 있어요. 오늘 잠깐 수비리가 좋다는 말을 듣고 그 계획을 한순간에 변경할 수는 없잖아요. 식사하고 나서 차분히 수비리와 라라소아냐에 대해서 상세하게 살펴본 뒤에 결정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내 음성이 조금 억양됐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묵을 숙소를 알려주며 수비리에서 잘 거면 꼭 오라고 했다. 

그는 그가 초대한 비즈니스 관계인 일본인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역력했다. 그 속내를 나를 매개체 삼아 친구들에게 반사되기를 원한 듯했다. 말을 자제하는 일본인들에 비해 그는 대단한 만담가였고 그 많은 말들을 힘없이 앉아있는 한국인 여자에게 쏟아내서는 끊임없이 답변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기름기 범벅인 닭다리 살을 뜯어서 입안에 가져다 넣었다. 도저히 넘길 수 없어 포도주를 마셨다. 내가 마시자 소극적인 일본인들도 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또 그때였다, 내심 조마조마하게 생각했던 질문을 그 남자가 꺼낸 것이. 나는 이 자리에서만은 정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저 만담가가 그 불문율을 깨고 질문을 던질 거라고 예상했다. 역시나 그랬다. 북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평소에 생각했던 것을 솔직하게 말을 해야 하냐, 일반적인 견해를 말해야하냐, 라고 망설이다가 전자를 택했다. 그리고는 몸이 좋지 않다고 말하면서 일어섰다. 좀 더 있다가는 소녀상 철거에서부터 일제강점기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 분명했다.

외로움이라는 안개 입자

 안개 낀 론세스바예스 수도원
 안개 낀 론세스바예스 수도원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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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왔을 때 더 짙어진 안개가 수도원 돌담을 감싸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걸리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수도원과 반대 방향을 바라봤지만 짙은 안개 때문에 산책하고 싶지 않았다. 안개 구덩이가 나를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앞서가는 사람 등도 안개가 흐릿하게 지웠다.

걷고 있으려니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전날 만났던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을까, 라며 두리번거렸다. 수도원 알베르게는 1층에서 3층에 걸쳐 거의 300명을 수용한다. 다 돌아다니면서 찾을 수는 없었다. 네 사람 중 아무나 만났으면 싶지만은 그들도 나를 찾고 있을까도 싶었다. 

왜 나는 오늘 저녁 식사를 같이 했던 사람들을 전날 만났던 사람처럼 애정을 주지 않았을까. 이탈리아 중년 남자는 나와 친해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을까. 아니면 안개 속에 외로운 입자가 있어서 더욱 나를 움츠려들게 했을까(나는 이들을 두 번 더 보게 된다. 첫날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이곳에 오후 2시 전에 도착했다. 샤워하고 빨래를 해서 야외 건조대에 널었다. 그때만도 햇살이 창창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는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야외에 널어놓았던 빨래가 걱정됐다. 잽싸게 가봤더니, 이미 다른 사람들의 빨래는 거의 걷어간 뒤였다. 촉촉하게 비를 맞고 있는 빨래를 보니 나도 산 중에 홀로 비를 맞고 있는 듯했다. 샤워를 하고 제대로 머리카락을 말리지 않아서 미열이 있었다. 휴대폰도 터지지 않았다. 유심칩을 사서 교환을 했다. 고산이어선지 연결이 되지 않았고 그때까지도 이곳 와이파이 비밀번호도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한 것이 이것뿐일까.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국경이 바뀌었기 때문에 인터넷 설정을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을 팜플로나에 가서야 알았다. 무엇보다 허기가 졌다. 아침에 딱딱한 바게트 빵에 커피를 마신 게 고작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한 시간 삼십분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와 얼마나 힘들게 피레네 산맥을 넘었는지 수다도 떨고 싶었다. 그러다가 저녁식사 자리에서 이탈리아 중년 남자와 그의 일본인 친구들을 만났다.

 는개비를 맞고 있는 수도원 야외 건조대에 널어놓은 빨래
 는개비를 맞고 있는 수도원 야외 건조대에 널어놓은 빨래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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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 첫날, 론세스바예스는 '가시 골짜기'라는 뜻처럼 내게 가혹했다. 하지만 이름과 달리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사들이 산티아고 순례자들을 지극하게 돌보던 곳이었다. 가장 오래되고 명망 높은 순례자 구호 지역이었다. 12세기 이후로는 '병들었거나 건강하거나, 가톨릭교도거나 유태인이거나, 이교도이거나 이단자거나 방랑자거나, 모든 순례자들'을 다 수용했다. 지금까지도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 사법 기관은 죄를 지은 사람을 감금하지 말고 걷게 하자고 주장했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존중하는 마음을 찾아 갱생하기를 바랐다.   

나는 안개 속에 침묵하고 있는 수도원으로 들어섰다.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포옹했던 이곳. 여전히 중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가파른 경사 지붕 아래 아이보리색 벽, 뾰족한 첨탑. 육중한 건물이 잿빛 여명에 잠기고 있었다. 하늘에 흩어져 있는 구름이 가로등에 뿌옇게 빛났다. 구름 뒤에 달이 숨어있었다. 단단한 돌벽 아래에 긴 의자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의자 위에 가로등 빛이 앉아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문 앞에 섰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자갈 마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고, 고독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외로움은 관계 속에서 발생하기에 끊임없이 사람을 갈구한다. 결코 사람이 빈 가슴을 다 채워줄 수 없기에 늘 허전할 뿐이다. 반면 고독은 '나'와의 대화 속에서 발생한다. 나를 향한 성찰이 길수록 내 내면은 살찌기 마련이다. 나는 지금, 혼자 있어서 고통스러운가. 아니면 즐거운가.

자갈이 깔린 마당에 치맛자락처럼 살랑거리면서 부는 바람이 안개를 몰아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스락, 신발 밑창에서 자갈이 몸 부비는 소리를 냈다. 잠시, 침묵이었다.

 말끔하게 안개 걷힌 다음날, 론세스바예스 수도원을 떠나며
 말끔하게 안개 걷힌 다음날, 론세스바예스 수도원을 떠나며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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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은 2017년 6월13일에 걷기 시작해서 7월12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습니다. 30일만의 완주였습니다. 그 다음 날, ‘세상의 끝’이라는 피니스테레와 묵시아까지(100km)까지 내처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4일 동안 900km 여정을 마쳤습니다. 몇 십 년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34일의 여정은 짧을 수 있으나 걸으면서 느꼈던 것들은 제게 인생의 축소판처럼 다가왔습니다. 움츠린 어깨를 펴게 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내다보게 했습니다. 이곳에서 34일 간의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을 도란도란 풀어놓으면서 함께 공유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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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차노휘는 소설가이자 광주대 초빙교수이다. 2016년부터 걷기 시작하여 도보 여행을 하면서 ‘길 위의 인생’을 실천하고 있다.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고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 여행 에세이집으로는 《쉼표가 있는 두 도시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