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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수도권에서 400㎞ 가까이, 자동차로 쉬지 않고 달리면 5시간쯤. 길이 잘 닦인 오늘날에도 짧지 않은 길이다. 다산은 이 먼 길을 수레를 타거나 걸으며 내려갔다. 그 걸음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유배지까지 가기 위해선 여러 날 걷고, 도중에 문초 받은 몸을 달래며 가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을 귀양 보낸 임금과 정적을 원망하며 걸었을 수도 있다.

나는 여행 삼아 내려간 길이라 어디를 또 들를지, 언제 올라갈지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기약 없는 유배 생활의 계획을 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함께 유배를 떠나 나주에서 헤어진 형, 흑산도로 떠나는 정약전을 본 그때가 마지막이었는지도 몰랐으니까.


다산초당에서 바라본 하늘.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 다산초당 다산초당에서 바라본 하늘.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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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원망의 세월을 살았을 수도 있는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유했고, 함께한 제자들과 600여 권의 책을 편찬했다. 아들과 형제 그리고 지우들에게 보낸 편지 대부분이 학문에 대한 것이다.

아들들에게는 무슨 책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정리하라는 당부를 하고. 흑산도의 형이 쓴 '자산어보'를 읽고는 의견을 회신하고, 전국의 지우들에게 새로 읽은 책에 주석을 달아 보내고는 의견을 구했다.

강진만 한 구석에 있는 다산초당 입구는 한적했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한옥이 있는 마을은 고즈넉해 보였지만 식당과 카페가 있는 모양이 주말이나 방학에는 떠들썩한 분위기일 듯싶다.

다산초당 올라가는 길. 소나무의 뿌리가 얽혀서 마치 계단처럼 솟았다.
▲ 뿌리의 길 다산초당 올라가는 길. 소나무의 뿌리가 얽혀서 마치 계단처럼 솟았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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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정호승이 노래한 '뿌리의 길'처럼 뿌리로 이루어진 길이다. 계단처럼 솟아오른 뿌리. 나무들도 자라면 숨을 쉬고 팔을 뻗을 공간이 있어야 하고, 뿌리도 땅 깊이 멀리 뻗어 나가야 높게 넓게 잘 자랄 수 있다. 그렇지만 서어나무, 동백나무, 대나무들이 촘촘한 숲은 네 가지 내 가지 가리지 않고 손 잡았고, 땅속으로 뻗어가지 못한 소나무 뿌리들은 길 위로 솟아올랐다.


정약용은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제자들과 600여권의 책을 편찬했다.
▲ 다산초당 정약용은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제자들과 600여권의 책을 편찬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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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다산초당의 모습도 그러했을 것이다. 신분 따지지 않고 모인 제자들이 한데 어울려 정약용과 함께 공부하는 모습. 다양한 나뭇가지와 뿌리가 얽혀있는 모습이 그 광경을 상상케 한다. 원래는 초가집이었을 것이다. 이름처럼. 올라가서 본 초당은 1957년에 '다산유적보존회'에서 새로 지은 기와집이다.


초가에 무릎을 맞대고 모인 다산과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 본다. 18년간 강진 유배 중 이곳 초당에서 약 11년간 있으며 600여 서적을 편찬하는 모습. 얼마나 몰두했는지 방바닥에 맞댄 복숭아뼈에 구멍이 여러 번 뚫렸다던데, 그 고통에 상상이 안 간다. 그러다 머리를 식히러 강진만이 보이는 언덕에 올랐을 것이다. 백련사로 넘어가는 오솔길에 있는 그곳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흑산도로 유배 간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언덕에 있는 정자다. 다산이 가족을 그리며 마음을 달랬던 자리에 새로 지은 정자로, 다산 유배 당시에는 없었다.
▲ 천일각에서 바라본 강진만 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언덕에 있는 정자다. 다산이 가족을 그리며 마음을 달랬던 자리에 새로 지은 정자로, 다산 유배 당시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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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곳에는 '천일각'이 있다. 당시에는 없었고 수년 전에 지은 정자다. 그곳에 올라 강진만을 바라보니, 바다라기보다는 넓은 강을 보는 듯하다. 건너편 육지가 손에 잡힐 듯 보이고, 바닷가에 앉아 있는 하얀 새들이 보인다. 철새가 찾아오기에 바다라 느끼지 않았을까. 정약용도 겨울이면 찾아오는 나그네 새를 보며 흑산도에 있는 형을 떠올렸을 것이다.

귀양 떠나던 그해, 1801년에 나주에서 헤어지며 바라보았을 뒷모습이 형제가 마주한 마지막이었다. 1816년 정약전이 죽자 아픈 마음을 담아 띄운 편지가 애절하다. 다산이 쓰고 박석무가 편역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꺼내 읽었다.

'슬프도다! 어지신 이께서 이처럼 곤궁하게 세상을 떠나시다니··· (중략)
형제지만 서로를 알아주는 지기였는데 이제는 그분마저 잃고 말았구나.'
 
그 구절을 읽어보니 강진만이 더 쓸쓸히 다가온다. 책을 꺼낸 김에 정약용이 아들과 지우들에게 보낸 편지 몇 편을 더 읽었다. 저 아래 초당에서 다산이 직접 썼을 것으로 생각하니 그 마음이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다산초당에 있는 연못이다. 연못 한가운데 돌로 산을 쌓고 나무 대롱으로 폭포도 만들었다.
▲ 연지석가산 다산초당에 있는 연못이다. 연못 한가운데 돌로 산을 쌓고 나무 대롱으로 폭포도 만들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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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를 마치고 올라가는 길을 그려 본다.

600여 권의 책을 여러 수레에 나눠 끌고 올라가는 노인. 그의 몸은 풍을 맞아 기울어 있고, 머리와 이는 다 빠졌다.

18년 전 죄인의 몸으로 부서져 내려간 길을, 18년 후에는 책 그 자체가 되어 올라간다.

강진에서 올라오는 길도 참으로 멀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태그:#다산초당, #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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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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