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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동정호 칠백리에 달이 뜰 때 무산같이 높은 사랑
끝없이 흐르는 물 푸른 바다같이 깊은 사랑
옥산 꼭대기 달 밝으니 가을산 봉로리마다 가득한 달빛 사랑
해지고 떠오른 달 사이에 복숭아 오얏꽃 피는 사랑 (중략)
어화 둥둥 내 사랑아, 어화 내 간간 내 사랑이구나
- <춘향전> 중에서

매맞아 죽은 춘향에게, 당신의 이름은 우리에게 매우 친근합니다. 영국 사람들에게 햄릿이 친숙한 만큼이나 당신 이야기 <춘향전>은 가히 국민소설이라 할 수 있지요. 원래 <춘향전>은 19세기에 유행되었는데, 현재까지도 많은 영화, 연극, 뮤지컬로 재창조 되고 인기가 높습니다. 저는 지난 2월 9일 국립국악원에서 열렸던 창극 <춘향실록>을 보고 나서, 당신에게 꼭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춘향전' 책 표지
▲ 책 '춘향전' '춘향전' 책 표지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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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춘향전>은 민음사에서 발간된 책으로 작년에 읽었습니다. 제 남편도 같이 읽었는데, 당신의 매력에 폭 빠져서 요즘 틈만 나면 판소리를 배우러 다닌답니다. 평범한 회사원인데, 일이 끝나면 창을 배우러 다니는 거지요. 종종 저를 보고도 흥이 나서 한 가락 합니다.

니가 무엇을 먹으려느냐
니가 무엇을 먹으려느냐
둥글둥글 수박 웃봉지 떼 뜨리고
강릉 백청을 따르르르 부어
씨는 발라 버리고
붉은 점 움푹 떠 반간 진수로 먹으려느냐
아니 그것도 나는 싫소
- '춘향가' 중 '사랑가' 일부

<춘향전>을 통해 알게 된 당신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퇴기의 딸로 태어났지만, 곱게 자라고 글공부도 익혀 미모와 총명을 고루 지닌 이팔청춘 소녀였지요. 마침 남원 사또의 자제인 이몽룡과 사랑에 빠져 바로 그날 밤 백년가약을 맺고 연애를 하지요. 책에 묘사된 연애 장면을 읽는데, 꽤 노골적이라 제가 다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둘이서 업고 놀고, 말 타기 놀이하고...... 한창 달콤한 연애 놀음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사또가 서울로 부임지를 옮기게 되지요. 몽룡은 나중을 기약하고 떠나고, 남겨진 당신은 변사또에게 고초를 겪습니다. 모진 매를 맞고 형틀에 씌워져 감옥에 갇힙니다. 당신이 매를 맞을 때 불렀다는 십장가를 보니, 당신의 기개와 당당함이 참 대단하더군요.

에잇 때리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굳은 마음 일부 종사(一夫從事) 뜻이오니, 일개 형벌 치옵신들 일 년이 다 못가서 일 각인들 변하리까?"
둘째 낱 붙이니
"이부절(二夫節)을 아옵는데, 불경 이부(不更二夫)이내 마음이 매 맞고 죽어도 이 도령은 못 잊겠소."
셋째 낱을 딱 부치니,
"삼종지례(三從之禮) 지중한 법 삼강오륜(三綱五倫)알았으니, 삼치 형문(三治刑問) 정배(定配)를 갈지라도 삼청동(三淸洞)우리 낭군 이도령은 못 잊겠소."
- <춘향전> 중에서

이몽룡은 장원급제 하여 암행어사로 오고, 당신을 구하고 같이 한양으로 올라갑니다. 당신은 정렬부인이 되고, 삼남삼녀를 두었는데 자녀들이 다 총명하여 부친보다도 나았다지요. 당신 이야기는 여러 판본이 있는데, <열녀춘향수절가>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신 이야기를 들으며, 절개를 지킨 열녀로서 칭송하기도 하고, 애틋한 십대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사람에 마음이 간질간질 행복해지기도 합니다. 당신에게 고초를 주던 변사또가 '암행어사 출두야' 소리에 허겁지겁 당황하는 모습에 권선징악의 대리만족도 느끼고요.

창극 <춘향실록> 한 장면
 창극 <춘향실록> 한 장면
ⓒ 국립국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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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에서 공연되었던 창극 <춘향실록>은 당신에 대한 좀 다른 이야기를 말해줍니다. 저는 이 창극을 보고 비감한 마음에 사로잡혔습니다. 일전에 KBS 역사스페셜에서 춘향전에 대한 방송을 했습니다. 춘향전 이야기 속 이몽룡이 실제 인물이라는 내용입니다. 창극 <춘향실록>은 역사스페셜에서 다루었던 내용에 영감을 얻고, 기존 춘향전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합니다. 좀더 개연성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요.

<춘향실록>에서 한양으로 떠난 이몽룡은 몇 년 안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당시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들의 나이를 보면 그렇게 젊은 나이에 급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소설의 모티브가 된 이몽룡은 늙어서 남원에 한번 들렀다는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그때 방문 기록에 '젊었을 때의 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 젊은 날의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이 당신과의 사랑 아니었을까요?

후세의 사람들은 당신이 정조를 지키고 꿋꿋이 버티어 금의환향하는 이몽룡의 정실부인이 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물론 저도 당신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변사또의 모진 매를 이기지 못했고, 결국 죽음을 맞습니다. 당신의 쓸쓸한 죽음을 이몽룡은 알지도 못했고, 지켜주지도 못했습니다.

당신은 매를 치는 사또에게 외칩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맞습니다. 당신은 아름답고 절개가 높을 뿐이지 아무 잘못이 없는 선한 소녀였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사또에게 퇴기의 딸 목숨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나 봅니다. 어찌 보면 사또는 당신에게 현실적으로 편안히 사는 방법을 제안했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이몽룡은 오지 않을 거란 걸 알았을 테니까요. 그러나 당신은 소신을 굽히느니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간질간질 사랑가의 낭만에 마음이 달뜨기도 하고, 한시를 가지고 노는 재치에 감탄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해학에 한껏 웃기도 하면서 당신 이야기 <춘향전>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창극으로 탄생한 <춘향실록>을 보면서, 조선시대 민중의 고초를 생각했습니다. 한없이 맑고 순수한 당신에게 모진 매를 치던 위정자들을 생각했습니다. 죽음으로라도 기개를 꺾지 않던 당신의 정신을 우러렀습니다.

"얼씨구나 좋을시고 어사 낭군 좋을시고. 남원읍내 가을이 들어 떨어지게 되었더니, 객사에 봄이 들어 이화춘풍 날 살린다. 꿈이냐 생시냐? 꿈을 깰까 염려로다."
- <춘향전> 중에서

당신이 설사 매를 맞고 죽었다고 해도, 당신은 우리 마음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 감정에 솔직하였고, 품위가 있었으며,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당당히 살았던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봄향기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당신이 말했듯이 이화춘풍에 다시 살아나시길.


춘향전

송성욱 풀어 옮김, 백범영 그림, 민음사(2004)


태그:#춘향전, #춘향실록, #문학의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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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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