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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를 다녀온 친지가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꿈의 여행'이랄 수 있는 남미여행이 싫다니 의외였다. 듣고 보니, 공항마다 두세 시간 기다리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오가는데 '열댓 시간씩 비행기 타는 게 지겹다'는 이야기였다. A4용지 한 장 만한 철창 우리에 갇혀 먹이만 받아 먹어야 하는 육계 신세가 생각났다고 한다.

최근 말레이시아를 다녀오면서 친지가 말한 '지겹다'를 절반쯤 실감했다. 인천에서 쿠알라룸푸르까지 비행시간은 6시간 30분이다. 남미까지는 두 배 이상일 것이다. 극장 의자보다 얇은 팔걸이, 조금만 기대도 옆 사람 팔이 걸린다. 무릎 앞 공간은 너무 좁아 화장실 한 번 다녀오려면 잠든 옆 사람을 깨워야 한다. 꼬박꼬박 나오는 기내식은 소화가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은 어찌 지내나? 영화를 보거나 눈을 감고 있다. 대한항공, 아시아나가 아니니 한국말 영화는 아니다. 마침 한낮 시간이라 잠도 잘 안 온다. 얼마 전 세계 토픽이 생각났다. 비행기 타야 글이 잘 써진다는 작가 얘기다. 그는 뉴욕에서 도쿄까지 비행기를 탄다. 도착하자마자 다시 뉴욕 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도쿄에 일이 있어 오가는 게 아니다. 비행기 안에서 글을 쓰기 위해서다.

1만 피트 하늘을 시속 800km로 나는 비행기 안에서 글을 쓴다. 비행기를 타면 정신집중이 잘 되어 글이 잘 써진단다. 스튜어디스가 때맞춰 콜라까지 챙겨주지, 귀찮게 울어대는 스마트폰도 없지, 다만 일어서서 산보는 못한다. 앉아서 글 쓸 일밖에 없다. 돈이 엄청 드는 '나르는 글쓰기 감옥(?)', 세계 토픽이 될 만하다. 우리나라 유명작가 이외수씨는 아예 집에 '글쓰기 감옥'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부인이 넣어주는 밥을 먹으며 글을 쓴다고 한다.

비행기 좌석과 '감옥'은 닮은 점이 많다. 외부와 통신이 차단되고, 날라다 준 밥 먹어야 하고 맘대로 걸어 나갈 수도 없고. 소위 혼자 있도록 만든 '고독한 감금 공간'이다. "글쓰기는 고독한 감금 생활을 자원하는 일"이라는데 그 정의에 딱 맞는 공간이다. 이 고독한 공간에 머무는 몇 시간을 제대로 활용한다면 황금빛 명문이 나올 수도 있겠다. '지겨웠다' 대신 '즐거웠다'는 감탄사도 나올 터이다.

이 고독한 감금 공간에서 우리는 무얼 할 수 있나? 정말 글쓰기를 할 수 있을까. 쓰기가 안 되면 읽기라도 해야겠지! 이번 말레이시아 여행엔 주머니에 다행히 <기초한문교재>가 있었다. 전통문화연구회가 한문 학습을 위해 만든 스마트폰보다 작고 얇은 수진본(袖珍本; 소매 속에 넣고 다닐 만한 작은 책)이다. 토를 붙인 사자소학, 추구, 주해천자문, 명심보감, 동몽선습, 격몽요결 원문이 촘촘히 적혀 있다.

백여 년 전만 해도 우리 선조들이 어릴 때 서당에 앉아 서너 구절 가지고 몇 시간 씩 외웠던 글귀들이다. 선조들의 어린 시절 심정으로 돌아가 본다. 율곡 선생이 지으신 격몽요결, 지신장(持身章)을 읽는다. 구용구사(九容九思)를 외워본다. '足容重(족용중)'으로 시작하여 '見利思義(견리사의)'로 끝나는 18개 구절이 술술 외어지지 않는다. 한문은 압축파일이다. 구절마다 사연이 농축되어있다. 몇 시간이 훌쩍 흐른다.

탐미주의자 천재작가 오스카와일드(1854~1900)는 여행할 때 기차 안에서 일기장을 읽었다고 한다. 천재작가가 여행하는 기차 안에서까지 글을 쓸 필요는 없었을 터이다. 그런데 그 많은 명저를 다 놓아두고 왜 자기 일기장을 읽었을까. 몇 줄만 읽어도 수많은 회상이 줄줄이 따라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상량(多商量)'이다.

다음 장거리 여행에는 우리도 일기장을 가지고 가볼까. '고독한 감금공간과 시간'이 '황금빛 즐거움'처럼 기다려진다.


태그:#비행기좌석, #글쓰기 감옥, #수진본, #구용구사, #말레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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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글로 쓰면 길이 보인다'는 가치를 후학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있습니다. 인재육성아카데미에서 '글쓰기특강'과 맨토링을 하면서 칼럼집 <글이 길인가>를 발간했습니다. 기자생활 30년(광주일보편집국장역임), 광주비엔날레사무총장4년, 광주대학교 겸임교수 16년을 지내고 서당에 다니며 고문진보, 사서삼경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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