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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왕국’으로 불리는 홋카이도. 한국어로 쓴 문구가 재밌다.
 ‘눈의 왕국’으로 불리는 홋카이도. 한국어로 쓴 문구가 재밌다.
ⓒ 구창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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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살 엄마의 행적이 3시간 넘게 묘연했다.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노인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찾아나서야 하나,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전의 상황은 이랬다.

"휴가를 내고 함께 홋카이도로 여행을 떠날 것"이라는 결정을 전하자 엄마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친구들에게 들은 것인지 "거기는 온천이 유명하다던데 가면 실컷 해야지"라며 손뼉까지 쳤다.

아침 일찍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야했기에 새벽에 일어났다. 빠진 짐이 없는지 살펴보고, 며칠 비울 집의 문단속을 하면서도 엄마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김해공항을 출발한 항공기가 3시간 남짓을 날아 홋카이도 치토세공항에 도착한 것은 점심을 먹기 전. 일본 땅에 발을 딛자마자 엄마가 또 물어본다.

"오늘 밤엔 온천장이 있는 숙소에서 자는 것 맞지?"

홋카이도 치토세 국제공항의 풍경.
 홋카이도 치토세 국제공항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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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비와 모시조개가 앙증맞게 올라앉은 솥밥을 주문한 엄마는 평소와 달리 맞은편에 앉아 낮술을 마시는 아들에게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기분이 아주 좋다는 증거였다. 나 또한 깔끔한 일본 요리와 함께 마시는 알코올 함량 45%의 고구마소주가 달콤하게 느껴졌다.

오후에는 풍광 좋은 호숫가와 화산지대를 돌아봤다. 홋카이도의 자연은 어떤 인공조미료도 넣지 않고 끓인 뭇국처럼 소박하고 담백했다. 하늘로 뻗은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새들이 날아다녔다. 새파란 하늘 아래서 사진을 찍어주며 엄마와 낯선 나라에서의 평화로운 산책을 즐겼다. 그 사이사이에 또 물어본다.

"온천호텔에는 언제 가는 거냐?"

유명한 온천마을 노보리베츠에 있는 숙소에 도착한 건 오후 5시쯤. 해가 지기도 전이었다. 가방을 침대에 놓아둔 엄마는 온천욕장부터 가자고 했다. 저녁을 먹기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으니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여자 온천욕장 입구에서 "우리 방 번호는 503호"라고 한 번 더 일러줬다. 목욕을 먼저 마친 사람이 호텔 카운터에 맡겨놓은 열쇠를 찾아 방에 가있기로 약속했다. 숙소의 규모가 커서인지 여자 욕장에서 남자 욕장까지가 꽤 멀었다.

뜨거운 김이 솟아오르는 홋카이도의 온천지대.
 뜨거운 김이 솟아오르는 홋카이도의 온천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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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홋카이도 거리에서 만난 일본 여성.
 눈 내린 홋카이도 거리에서 만난 일본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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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30분 동안 온천욕을 한 엄마는...

온천장의 시설은 훌륭했다. 탈의실은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고, 실내욕장과 노천욕장을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었다. 남자 목욕탕에서 사용한 수건이나 가운을 정리하는 직원이 여자라는 건 좀 놀라웠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남자들 사이를 오가는 여자를 보니 일본과 한국의 문화 차이가 느껴졌다. 홋카이도의 다른 온천욕장 탈의실도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궁금했다.

어쨌건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30여 분 만에 목욕을 끝냈다. 개운해진 기분으로 열쇠를 받아 방으로 올라갔다. 그때가 대략 오후 6시경. 그런데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도록 엄마가 오지 않았다. 배는 고파오고, 도대체 어딜 간 것인지 궁금증은 커져갔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 옷을 챙겨 입었다. 멀리 홋카이도 시골마을까지 와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아닌지, 그도 아니면 목욕탕에서 쓰러진 것은 아닌지 엄마 걱정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런데 이건 뭔가? 행방을 찾으려고 막 숙소를 나서려는 순간 엄마가 문을 두드렸다. 발갛게 익은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여기 온천은 물이 정말 좋네"라는 노인. 실내와 노천을 오가며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슨 목욕을 자그마치 3시간 30분이나 한단 말인가.

엄마를 기다리며 마음 졸인 걸 떠올리면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지만, 천진난만하게 얼굴에 로션을 찍어 바르는 노인을 바라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배는 안 고픕니까? 저녁 먹으러 갑시다."

아름다운 설경은 홋카이도의 자랑 중 하나다.
 아름다운 설경은 홋카이도의 자랑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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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의 중심 도시 삿포로 시내를 오가는 전철.
 홋카이도의 중심 도시 삿포로 시내를 오가는 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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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호텔 로비에서 시인 백기행을 떠올리다

생선구이 한 토막과 따끈한 국물, 거기에 정갈한 반찬 몇 가지로 차려진 일본 가정식요리는 맛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음식임에도 엄마 역시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하기야, 오랜 목욕 후였으니 뭐라도 입에 맞았을 터다.

홋카이도 외곽 온천마을의 밤은 적막할 정도로 조용했다. 창밖으로 부는 바람 소리마저 쓸쓸하게 느껴졌다. 여행 첫날의 피로감 탓인지 엄마는 밤 10시도 되지 않았는데 두툼한 솜이불을 덮고 숨소리도 고르게 잠들어 있었다.

조용히 방을 빠져나와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북적거리는 여타의 여행지라면 사람이 적지 않을 시간인데 홋카이도는 달랐다. 로비마저 괴괴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자연스레 이방(異邦)의 고요함과 아름다움을 빼어난 시어(詩語)로 노래한 백기행(1912~1996)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몇 구절이 떠올랐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익숙한 공간을 떠나 낯선 나라로 향하는 사람들은 크건 작건 '소설 같은 로맨스'를 꿈꾸게 된다. 나 역시 홋카이도 여행을 계획하며 낭만적인 몇몇 장면을 꿈꾸었음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꿈에 불과했다.

'깨어진 꿈'이 서글퍼 숙소 안락의자에 앉아 잠든 엄마를 곁에 두고 홀로 맥주 몇 병을 마셨다. 나타샤도 없고 당나귀도 보이지 않는 심심한, 너무나도 심심한 홋카이도의 밤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태그:#홋카이도, #노보리베츠, #온천, #일본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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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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