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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호수와 설산이 여행자를 유혹하는 홋카이도.
 푸른 호수와 설산이 여행자를 유혹하는 홋카이도.
ⓒ 구창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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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 달린 고양이만큼이나 보기 힘든 게 '엄마에게 다정다감한 아들'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일찍부터 시작한 객지살이. 엄마는 1년 중 하루도 아들을 떠올리지 않는 날이 없었겠지만, 아들은 1년 내내 안부를 묻는 전화 한 통 하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보여주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게 '식구에 대한 애정'이라고 믿었다.

나는 살가운 아들 혹은, 좋아하는 것을 겉으로 표현하는 남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래서다. 47년 가까이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엄마에게 애정 표현을 한 기억이 없다. 서글프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10년 전 아버지의 죽음 이후 엄마는 부쩍 외로워했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를 해주고 싶었지만, "힘내고 건강 잘 챙기시라"는 따뜻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생전 해본 적이 없이 없으니 그 간단한 말도 하기가 쑥스러웠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게 2~3년에 한 번쯤 함께 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삿포로와 도야 호수, 오타루 운하와 노보리베츠 온천을 찾아 떠난 일본 홋카이도 여행은 엄마와 내가 함께 한 4번째 해외여행이었다.

어린 아이의 키만큼 쌓인 눈. 홋카이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광이다.
 어린 아이의 키만큼 쌓인 눈. 홋카이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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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거리를 오가는 삿포로 시민들.
 눈 내린 거리를 오가는 삿포로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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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떠나는 여행'이 아닌 엄마와 함께 하는 여행

태국 푸켓, 필리핀 보라카이, 중국 청도를 향했던 이전 여행들은 자랑할 게 별로 없는 엄마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가 됐다. 여행 일정을 알려줄 때부터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엄마의 웃는 얼굴을 내내 볼 수 있다는 건 효도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온 아들의 즐거움이었다.

'혼자 가는 여행'이 아니라 '엄마와 함께 하는 여행'이 나의 방랑일지에 처음 새겨진 건 불과 9년 전. 그즈음 가슴을 치며 읽었던 시 한 편이 있다. 초식동물의 예민한 영혼을 지닌 채 육식동물이 지배하는 세상을 겨우겨우 견디다 29살 젊은 나이에 지상에서 사라진 요절 시인 기형도(1960~1989)의 '엄마 걱정'이다.

열무 삼십 단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찬밥처럼 방에 담겨' 시장 간 엄마의 귀가를 애타게 기다리던 어린 아들은 자라서 '엄마를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 된다. 그게 세상 이치다.

그렇다면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는' 시간은 누구에게 더 길까? 이는 너무나 빤한 질문이다. 아들이 엄마를 기다리던 시간은 엄마가 삶 내내 아들을 기다리는 시간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 수준. 시인 기형도의 엄마나 내 엄마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 자명한 사실이 시를 읽는 세상 모든 아들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이쯤 되면 내 여행 패턴에 '가끔은 엄마와 같이 떠난다'는 문장을 추가시킨 이유가 짐작 가능할 것이다. 평생을 기다리게 하는 아들이 눈앞에 있기에 기다릴 필요가 없는 시간은 세상의 엄마들을 행복하게 해준다. 그게 짧은 여행의 단 며칠간일지라도.

홋카이도에도 노점이 적지 않다. 한국처럼 고구마, 옥수수, 오징어 등을 구워 판다.
 홋카이도에도 노점이 적지 않다. 한국처럼 고구마, 옥수수, 오징어 등을 구워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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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는 삿포로 라면집의 주방장.
 심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는 삿포로 라면집의 주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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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 옥수수를 먹으며 엄마와 눈 내리는 거리를...

온천욕과 녹음 우거진 숲을 좋아하는 엄마에게 홋카이도는 맞춤한 여행지였다. 도야 호수 주변을 산책하면서, 삿포로 시내를 목적 없이 돌아다니면서, 오타루 운하에서 배를 타면서, 심지어는 지옥 계곡의 지독한 유황 냄새 속에서도 엄마는 내내 웃었다. 웃음으로 생겨날 주름 걱정은 잊은 채.

아들과 마주 앉아 먹는 모든 음식이 다 맛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평 한 마디 없었다. 육류와 밀가루를 잘 소화시키지 못하는 나이임에도 돼지 뼈로 육수를 내고 목살을 고명으로 올린 일본식 라면의 국물까지 남기지 않았고, 고추냉이를 싫어하면서도 초밥집을 향하는 아들의 발걸음을 말리지 않았다.

홋카이도의 차가운 바다 속에서 맛있게 살을 찌운 대게를 먹으러 가서는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 몫의 게살을 아들 접시로 옮겨주느라 바빴고, 거리를 산책하다가 발견한 노점의 옥수수 구이를 사 들고는 열두 살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눈 내린 이국(異國)의 거리를 자식과 더불어 걸어 다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 그게 바로 엄마라는 깨달음이 새삼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나는 지금껏 세상사를 잘 모르고 살아온 듯하다.

홋카이도의 전통 가옥. 벽면에 커다란 생선을 걸어 말리고 있다.
 홋카이도의 전통 가옥. 벽면에 커다란 생선을 걸어 말리고 있다.
ⓒ 구창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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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여행 둘째 날이었던가. 호숫가를 걷던 엄마는 다리가 아프다며 잠시 쉬어가자고 했다. 마침 근처에 나무 의자가 있어 거기 앉았다.

뒤에서 바라본 엄마의 모습이 너무나 작고 가냘퍼 보였다. 그 순간, 기형도의 시가 다시 떠올랐고, 앞으로는 '엄마의 걱정'이 아닌 '엄마의 위로'가 되는 아들로 살고 싶어졌다. 지천명(知天命)이 가까워오니 이제 겨우 철이 들려는 걸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태그:#일본 여행, #홋카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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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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