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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적 명절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여자의 명절’과 ‘남자의 명절’, ‘부부의 명절’ 기획을 통해 어떻게 하면 보다 성평등한 명절을 보낼 수 있을지 모색해 봅니다. [편집자말]
2016년 추석 때,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다.
 2016년 추석 때,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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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엄마. 설이 얼마 안 남았네요. 올해는 엄마한테 특별한 한 해가 되겠지요. 58년 개띠인 우리 엄마가 환갑을 맞았으니까. 괜스레 마흔을 앞둔 아들의 마음도 먹먹합니다.

5년 전 결혼할 때가 생각나네요. 제 결혼과 신혼생활에 보태줄 돈이 없어서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리셨잖아요. 지금까지도 종종 미안하다는 말을 하시는 우리 엄마. 저희 괜찮아요. 잘 살고 있어요. 더 이상 미안해하지 마세요.

사실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엄마한테 이 얘기를 언제할지 고민하다 때를 놓쳐버렸네요. 그만큼 예민한 문제예요.

저한테는 끝내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전해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지난 추석 때 있었던 일 말이에요. 추석이 수요일이라, 월요일과 금요일에 휴가를 사용해서 꽤 긴 연휴를 보냈어요. 저희 부부는 먼저 처가에 갔어요. 추석 당일을 포함해 거의 일주일 동안 처가에 있었죠. 우리 집(본가)에 온 건 연휴 막바지 무렵이었고요.

저희 부부가 처가에 먼저 간다고 하니, 동생 부부도 처가에 갔어요. 원래 우리 집은 명절을 우리 가족끼리만 보내는데, 저희도 동생 부부도 없었으니 엄마 아빠 두 분이서 조용하고 쓸쓸한 명절을 보내셨지요. 제가 "명절 음식 먹을 사람이 없으니 명절 음식을 하지 마세요"라고 했는데도, 엄마는 기어이 많은 명절 음식을 준비하셨어요.

처가에 먼저 간 저희한테 많이 서운하셨다면서요? 돌이켜보니, 엄마와 진지하게 상의를 했어야 했는데 통보하듯이 제 얘기만 했던 것 같아요. 동생과 번갈아 처가에 먼저 가는 걸로 얘기를 할 걸 하는 뒤늦은 후회도 합니다.

집안일도, 명절도 평등해야죠

설날을 닷새 앞둔 11일 오후 서울시 중구 중부시장에서 시민들이 제수용품을 사고 있다
 설날을 닷새 앞둔 11일 오후 서울시 중구 중부시장에서 시민들이 제수용품을 사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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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런데요.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우리 세대의 아내와 남편은 평등해요. 저희 부부도 그래요. 맞벌이로 서로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 집안일도 함께 해요. 육아도 마찬가지예요. 육아에 열심히 참여하는 게 요즘 같은 세상에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뿌듯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제가 부끄러운 남편이자 사위가 되는 때가 있어요. 바로 명절이에요. 결혼하고 저희 부부는 처가보다 우리 집에 먼저 갔지요. 명절 아침 세배를 한 뒤, 아침을 먹고 처가로 떠났어요. 보통 우리 집에서는 하룻밤만 자고 처가에서 며칠을 머물렀는데, 저는 이 정도면 양쪽 균형을 맞췄다고 생각했어요.

처가의 명절 당일 모습은 우리 집과 크게 달라요. 아침 일찍부터 아내의 친가 친척들이 모두 모여들고, 오후에는 아내의 처가 친척들이 집을 찾아요. 문제는 장모님이 혼자 명절을 준비하셔야 한다는 거예요. 아버님도 함께하지만, 주로 장모님이 도맡아하시죠.

전 부치는 일이라도 도와드리고 싶지만, 명절 오후에 처가에 도착하면 제가 할 일은 없어요. 이미 장모님이 음식을 다하셨으니까. 꼬치전을 좋아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게 하는 못난 사위 덕분에, 장모님이 만들어야 하는 전은 하나 더 늘었지요.

그렇게 몇 년이 흘렀어요. 언젠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들 둘을 둔 엄마는 두 며느리와 함께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데, 딸 둘을 둔 장모님은 왜 두 사위와 명절 음식을 준비할 수 없을까. 홀로 대식구의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어요. 집안일도 육아도 저와 아내가 평등하게 하는 것처럼, 명절도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난 추석 때 처가에 먼저 가기로 마음을 먹었고, 바로 실행에 옮겼던 거예요.

그런데 아내는 엄마가 어떻게 반응할지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에요. 추석 연휴 직전에 사과와 배 한 박스를 사들고 갔잖아요. 아내는 분위기를 띄우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엄마는 조금 시큰둥했던 것 같아요. 혹시 처가에 먼저 가는 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다가도, 이내 그런 생각은 흩어져버렸지요. 설마 그럴까 하고요.

추석 때 처가에 먼저 가보니...

추석 때 처가는 참 바빴어요. 저는 장모님의 조수 역할을 했어요. 장모님을 따라 전국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죽도시장에서 장을 보고, 함께 전을 붙였죠. 아이를 돌보느라 많이 도와드리진 못했지만, 할 일이 참 많다는 걸 느꼈어요.

아내의 처가 친척들과 캠핑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어요. 아내의 외삼촌·숙모·사촌동생들과 특별한 밤을 보냈는데, 장모님 표정이 참 좋아보였어요.

뒤늦게 찾은 우리 집에서, 엄마는 특별한 내색을 하지 않으셨어요. 엄마도 제 선택을 이해하시는 것 같아 마음이 좋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엄마가 많이 서운해 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머리가 복잡해지더라고요. 엄마와 이런 얘기를 터놓고 해야겠다 싶다가도, 괜히 서로 마음만 다칠 것 같아서 말을 못 꺼냈어요. 그랬더니 벌써 또 한 번의 명절이 찾아왔네요.

제가 어렸을 때, 엄마도 며느리였죠. 우리 집은 항상 명절 때 할머니 집에 먼저 갔어요. 그런데 차로 20분 거리인 외할머니 집에는 안 가거니, 잠깐 다녀왔던 것 같아요. 그땐 단순히 외갓집에 왜 안갈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참 서운했을 것 같아요.

엄마도 엄마의 엄마 아빠가 많이 보고 싶고, 함께 명절을 준비하고 싶으셨을 텐데.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서 엄마는 아빠나 할머니한테 친정에 먼저 가자거나 친정에 며칠 머무르자는 얘기를 할 엄두를 못하셨을 겁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명절 때 본가에 먼저 가는 사회 분위기는 비슷하고, 며느리들은 홀로 명절을 준비할 친정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엄마도 잘 알고 있는 일이에요. 바뀌어야지요. 아들과 딸을 둔 부모의 명절이 서로 달라선 안 되잖아요.

엄마. 이번 설에는 우리 집에 먼저 갑니다. 제가 전을 다 부치고 나물을 무칠 테니까, 엄마는 쉬엄쉬엄 하세요. 설 끝나고 2주가량 해외 출장을 다녀오는데,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우리 집에서 육아를 도와주기로 하셨어요. 참 죄송한 일이지요. 추석 때는 처가에 먼저 가려고 해요. 이해해주실 거라 믿어요. 그리고 엄마. 우리 여름에 여행 가요. 엄마 환갑이니까, 좋은 데로 가요.

엄마의 생각이 바뀌는 데는 당연히 시간이 걸릴 거예요. 기다릴게요. 사랑해요, 엄마.


태그:#남자의 명절, #사위, #명절,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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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법조팀 기자입니다. 제가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이나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하고자 합니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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