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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광주망월동 묘지에서 김남주 시인의 24주기 추모제가 진행되었다.
 2월 10일 광주망월동 묘지에서 김남주 시인의 24주기 추모제가 진행되었다.
ⓒ 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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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어둑해져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았다. 매년 2월이면 향년 49세 나이로 별세한 김남주 시인을 기르기 위해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았다. 시인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시인을 보고 싶은 사람들이 한데 뒤섞여 추모제를 치렀다. 해가 거듭하여 벌써 24주기다.

여느 때처럼 매서웠던 추위는 아니었다. 오히려 "꽃이 되자", "녹두꽃이 되자", "새가 되자"고 노래했던 시인의 음성처럼 사람들은 데워진 반가움으로 서로서로를 알아봤다.

손잡을 데가 도무지 마뜩찮았다. 민틋하게 살아온 인생은 없었다. 30대인 내가 바라본 그들의 삶이었다. 차마 머릿속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그들의 덤덤한 일상이 추모사에서 껍질을 벗겼다. 60~80대를 마주보고 서 있는 그들이었다. 그들의 머리카락이 조금 더 숱이 많았고, 그들의 입으로 "한 술의 밥"을 위해 투쟁이라 외치던 시절이었다. 팔십년 대의 젊은 오월과 유월이 살아났다.

당시 녹두서점을 운영했던 윤상원기념사업회 김상윤 이사장
 당시 녹두서점을 운영했던 윤상원기념사업회 김상윤 이사장
ⓒ 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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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기념사업회 김상윤 이사장은 1977년부터 녹두서점을 운영했다. 일본말로 번역된 파리코뮌을 김남주 시인과 함께 강독했던 일화를 아스라이 스케치했다. 먼 곳에서 들리는 책 읽는 소리, 한글로 옮겨 적을 때 바스락 거리며 마찰하는 종이 소리, 그 글을 번역하기 시작한 시간은 낮이었을까, 아니면 '공돌이, 공순이'라 낮춰 부르던 사람들이 퇴근한 저녁 늦은 시간이었을까. 사회과학 책들을 읽으며, 주변의 잡다한 지식을 긁어모으며, 완성한 '민.주.화'는 얼기설기 엮은 누더기 옷 같았다.

그때쯤이었을까. 김상윤씨는 황석영 소설가가 찾아왔다고 했다. 우리의 젊은 선생님들이 당시에 서로를 부르는 호칭은 '형'이었다.김상윤 형, 황석영 형, 김남주 형.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불렀고, 광주에 민중문화 연구소를 만들자고 했다. 박여선 등 탈춤 연극하는 사람들도 포함하여 극단 광대도 만들자고 했다. '그럽시다' 했다.

말이 휘발되기도 전에, 중앙정보부의 습격을 받았다. 그놈들 조사는 무서웠단다. 육사 엘리트 출신, 전국에서 날고뛰는 인재들이 중앙정보부에 있었다. 공부 많이 한 머리 좋은 사람들은 순수하게(?) 조사를 위해 책을 읽었다.

"민주국 개념을 토론해 봅시다."

5일간의 '토론'을 회상하며 김상윤 씨는 김지하의 시적 표현을 빌렸다. '부처님도, 공자도, 예수님도 다 빨갱이더라.'

시는 무기가 되고 시인은 전사가 되어야 한다

광주전남작가회의 김희수 고문은 일제 말에 이육사 시인이 있다면, 분단시대에는 김남주 시인이 있다고 했다.

"김남주 시인이 추구한 세상은 무엇일까, 조국의 자주화, 민주화, 조국통일입니다. 그래서 그 세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나는 무엇을 했는가? 부끄럽습니다. 너무 안이하게 살지 않았나. 너무 나태하게 살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앞섭니다. 불꽃같은 시인, 혁명 전사 시인. 날이 갈수록 해가 갈수록 매번 부끄러움을 안고 돌아갑니다."

김남주 시인의 무덤에 놓인 국화
 김남주 시인의 무덤에 놓인 국화
ⓒ 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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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무기가 되어야 하고 시인은 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김남주 시인의 말은, 박제되어 관람객을 맞는 전시물이 아니었다. 적어도 김희수 고문에게는 삶의 나침반이었다.

김남주 시인의 친 동생인 김덕종씨는 시인을 참 바람 같은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대부분 고무신을 신으면 동네 마실 정도의 가벼운 거리를 산책하는 정도라 생각하지, 고무신 신고 광주로 서울로 가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했다. 반대로 양복을 입고 등산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시인의 성격을 단박에 파악할 수 있는 기억이었다. 꽂히면, 생각하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남주의 봉이었다는 말로 좌중의 웃음을 샀던 사람이었다. 시인은 동생인 자신의 용돈을 긁어간 사람이었단다. 모든 잔심부름은 자신이 도맡아 했다는 그의 기억 속에 형은 두 차례 감옥을 간 짐안에 말썽꾼이기도 했다.

"덕종아 돈 좀 빌려주라."
"제가 어디서 돈을 빌려주겠습니까."
"요즘 농협에서 돈 빌려준다더라, 2000만 원만 빌려주라."

바로 농협 쫓아가서 대출 받아 빌려준 2000만 원. 빨리 갚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씁쓸하게 웃는. 그리고 담배 한 개피를 피우는 김덕종의 설익은 말에 사람 김남주는 시인이기 전에 삼산면 봉학리가 고향인 어느 집안의 장남이었다.

시인의 아들인 김토일씨는 말했다.

"해가 지날 때마다 민족 시인의 아버지 모습보다는 염치없는 아버지의 행적을 말씀해 주셔서 오히려 즐겁습니다. 집에 가서 사진첩을 쓱 보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지인들의 모습을 봤습니다. 그리고 며칠 안 돼서 나이 드신 여러 어른들을 뵙습니다. 굉장히 새롭게 다가옵니다."

시인 김남주를 추억하는 법

모인 사람들 중에 김남주를 두고 '정치'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지에 익은 오곡으로 빚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마시는 막걸리의 '재미'를 이야기했다. 보리밥에 설풋 올린 나물에 고추장을 쓱쓱 비벼 먹는 비빔밥의 짭조름함을 이야기했다.

지자체장 선거, 대통령 선거 때면 '민주화, 민족'의 슬로건 아래 김남주의 휴식처로 모여들기도 했었다. 무량한 시간 속에 잠이 든 시인의 얼굴에 답답함을 일소하기도 하고, 때론 그를 전면에 내세워 정치적 이미지에 쇄신을 가한다. 그때뿐이었다. 생전에 바람 같던 시인을 사후에 고관대작의 벼슬에 앉힌다고 한다면, '시라도 써야겠다'고 시를 쓰던 시인 자신에 대한 다짐마저 퇴화될까 두려웠다.

적어도 24주기 추모제 때는 그의 정신이 퇴색되지 않았다. 고향에서 낮에는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 삽질, 괭이질에 시간을 보내고 밤에는 글을 읽거나 썼던 시인의 '노동'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잔치가 추모제였다.

김남주 기념사업회 김경윤 회장
 김남주 기념사업회 김경윤 회장
ⓒ 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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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기념사업회 김경윤 회장은, 지자체장의 소극적 태도로 무산된 문학관 건립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때 중앙정부에서 내려준 예산도 다시 반납하게 된 사연, 다시 이 일을 추진하기에 따르는 어려움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덧붙여, 민주와 통일을 위해 헌신하는 분에게 드리는 상의 의미를 설명하며 김남주 문학상 제정에 관한 말도 했다. 여러 단계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지만 십시일반 의견을 걷고 있다며 고견을 부탁드린다는 말로 사업 경과보고를 마쳤다.

추모제는 시인의 유가족과 지인 등 30여명이 참여 했고 추모사, 추모시 낭송, 추모 노래, 기념사업 보고, 유가족 인사, 헌화 및 분향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한편, 김남주 시인은 1945년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서 태어났다. 자유와 통일을 노래한 시인으로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 문학사의 획을 그은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진혼가>, <잿더미> 등의 초기 시에서는 권력에 허물어져 내리는 한 인간의 처절함을 노래했고 이후 자본과 권력에 대한 통렬한 비판, 자유와 통일 그리고 민중에 대한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했다. 우유갑에 쓴 그의 옥중시 300여 편은 암울했던 80년대를 대변하는 절창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래는 그날의 풍경을 담은 사진 몇 컷들을 남겨 둔다.

분향을 하고 있는 유가족 김토일씨와 김덕종씨
 분향을 하고 있는 유가족 김토일씨와 김덕종씨
ⓒ 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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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시인에 놓이는 국화
 김남주 시인에 놓이는 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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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화 하는 사람들 행렬
 헌화 하는 사람들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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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김남주 시인을 기억하는 광주전남작가회의 작가들
 해마다 김남주 시인을 기억하는 광주전남작가회의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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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남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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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생.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재협동학 박사과정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석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졸업. 융합예술교육강사 로컬문화콘텐츠기획기업, 문화마실<이야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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