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의 신화는 한국축구에게도 많은 교훈을 남긴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23세 이하 축구대표팀은 지난 AFC U-23 챔피언십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AFC 주관 대회에서 동남아시아 팀이 결승전에 진출한 것은 전 연령대를 통틀어 베트남이 최초였다. 비록 결승전에서 우즈벡의 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박항서 감독은 부임 4개월 만에 일약 베트남의 '국민영웅'으로 부상했다. 상대적으로 김봉길 감독이 이끌던 한국대표팀의 부진과도 맞물려, 국내에서도 박항서 감독과 베트남의 선전은 큰 화제가 됐다.

저평가된 지도자였지만, 베트남과 윈-윈한 결과

'베트남영웅' 박항서호 금의환향 동남아시아 축구역사를 새로 쓴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28일 베트남 국민의 대대적 환영 속에 귀국했다. 대표팀은 아시아축구연맹(AFC) U-23(23세 이하) 챔피언십 결승전이 열린 중국 창저우에서 이날 특별기를 타고 출발해 베트남 수도 외곽에 있는 노이바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사진은 환영 인파에 손을 흔들고 있는 박 감독.

▲ '베트남영웅' 박항서호 금의환향 동남아시아 축구역사를 새로 쓴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28일 베트남 국민의 대대적 환영 속에 귀국했다. 대표팀은 아시아축구연맹(AFC) U-23(23세 이하) 챔피언십 결승전이 열린 중국 창저우에서 이날 특별기를 타고 출발해 베트남 수도 외곽에 있는 노이바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사진은 환영 인파에 손을 흔들고 있는 박 감독. ⓒ 연합뉴스


박항서 감독은 지난 8일 이영진 코치 등과 함께 귀국하여 국내외 취재진과 기자회견을 열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속내를 밝혔다. 박 감독은 "이전까지 베트남에 대해 아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 감독이 자주 경질된다는 정보만 들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는 새로운 무대에 도전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며 베트남의 지휘봉을 잡게 된 계기를 전했다.

또한 "이영진 코치에게 우리가 가서 동남아를 개척해보자고 이야기를 했다. 한국인 지도자들이 해외무대에서 나가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앞으로 우리 후배들에게도 문이 열릴 것이라고 설득했다"는 뒷이야기도 고백했다.

사실 박항서 감독은 불과 몇 달전까지만 해도 국내무대에서는 '한물간 지도자'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 2002 한일월드컵 당시 히딩크호의 코치이자 부산 아시안게임 사령탑으로 팬들에게 이름을 알렸지만 이후로는 주로 K리그 중하위권팀들의 감독직을 전전하며 크게 주목받을 기회가 없었다. 베트남의 지휘봉을 잡기 직전에는 내셔널리그 창원시청의 감독직을 맡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베트남 현지에서도 박항서 감독의 선임 당시 "한국의 3부리그 수준의 감독을 데려왔다"며 냉소적인 여론이 적지않았을 정도였다.

박항서 감독은 어떤 면에서 다소 저평가된 지도자였다. 박 감독은 경남 FC, 전남, 상주 등 주로 전력이 떨어지거나 선수수급에 한계가 있는 K리그 지방 구단들의 지휘봉을 잡으면서도 항상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은 끌어내는 역량을 보여줬다. 선수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여 맡는 팀마다 불화설같은 잡음이 거의 없었다. 비록 전력의 한계로 인하여 클럽무대에서는 지도자 시절 내내 우승트로피나 AFC 챔피언스리그같은 굵직한 메이저대회와는 별로 인연이 없었지만 충분한 지원을 받는 환경에서 일을 했다면 더 많은 성과를 올렸을 것이라는 평가다.

박 감독과 베트남 축구의 만남은 서로에게 윈-윈이 됐다.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며 국내 무대에서 지도자 경력의 막바지에 와있던 박 감독은 해외무대 진출을 통하여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박 감독의 롤모델인 히딩크 감독이 유럽축구계에서 커리어의 하향곡선을 그리던 시점에 한국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아 2002 한일월드컵 4강신화를 통하여 화려한 재기에 성공한 것과 흡사하다. 박 감독은 국내 팬들 사이에서 '쌀딩크'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폭 넓은 경험의 가치, 한국축구 역시 베테랑 지도자 활용해야

베트남은 그간 높은 축구 인기에 비하여 국제대회 성적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박 감독이 부임하면서 한국축구 특유의 압박과 투지, 활동량을 이식하며 한결 끈끈한 팀으로 진화했다. 박 감독의 베트남 진출을 추진했던 이동준 디제이매니지먼트 대표는 "박감독의 성공으로 한국인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다"고 평가하며 "앞으로도 동남아나 해외무대에서 한국인 지도자들을 원하는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박항서 감독의 뒤늦은 성공은 지도자에게 폭넓은 '경험'의 가치가 왜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베트남 축구계가 수백명에 이르는 감독직 후보자들을 제치고 최종적으로 박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긴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지도자로서 월드컵을 경험했다'는 점이다. 월드컵대표팀 코치과 아시안게임 감독, 다수의 K리그 클럽팀 감독직을 역임한 것은 사실 국내 지도자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화려한 경력에 속한다.

하지만 한국축구는 박항서 감독같은 베테랑 지도자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대표팀 감독으로서 첫 무대였던 아시안게임은 홈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실패'로만 규정됐고 더 이상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클럽무대에서는 무조건 젊은 지도자들만을 선호하는 '세대교체' 바람에 밀려 박항서 감독같은 베테랑들은 은근히 외면받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지도자에게는 나이는 결코 중요하지 않으며 때로는 '실패의 경험'도 지도자에게 더 큰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박항서 감독의 재발견이 주는 교훈이다.

박항서 감독 외에도 최근 많은 한국인 지도자들이 해외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장수 전 창춘 야타이 감독, 윤정환 세레소 오사카 감독, 김판곤 전 홍콩대표팀 감독(현 국가대표 선임위원장) 등 오히려 국내 무대보다 해외에서 더 인정받은 지도자들도 적지 않다. 물론 모든 한국인 지도자들이 해외무대에서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적어도 새로운 무대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겠다는 '야망'이 있었고, 그러한 도전정신이 성공 여부와 별개로 지도자로서의 성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 박항서 감독에게도 최근의 반짝 성공으로 인하여 과도하게 높아진 관심과 기대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현재 박 감독은 23세 이하 대표팀과 성인대표팀 감독을 겸임하고 있다. 당장 다가오는 8월 아시안게임이나 내년 아시안컵에서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을 거둔다면 지금의 박항서 신드롬도 하루아침에 용두사미로 전락할수도 있다. 어쩌면 국제무대에서 또다시 한국의 경쟁자로 만날수도 있는 운명이지만 그래도 많은 국내 축구팬들은 박 감독의 베트남에서의 성공이 좀 더 오래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좁은 우물 안에서만 놀다보면 그 세계관 안에 갇히기 쉽다. 축구도 예외는 아니다. 선수만이 아니라 지도자들도 더 넓은 무대를 체험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기위해 도전해야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지도자들이 발전해야 한국축구의 수준도 발전한다. 제2, 제3의 박항서 감독이 계속 발굴되어야만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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