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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통일의 집'은 <문익환 평전>을 쓴 김형수 작가와 함께 문익환 목사가 오랫동안 사셨던 '통일의 집'을 박물관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카카오 스토리펀딩과 더불어 <오마이뉴스>에도 글을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역사의 법정에 피고로 데뷔하다

1976년 '3.1민주구국선언문'은 명동성당 미사에서 기독교 인사 이우정 교수의 목소리로 발표됐다. 공포정치에 맛을 들인 유신정권이 야당 총재조차 검찰에 기소할 만큼 포악했던 때였다. 선언에는 하필 김대중, 윤보선, 함석헌 등 한국의 명사들이 나서 박정희가 대노했다고 한다. 당국은 이를 종교의 자유를 악용한 정치활동으로서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전복 선동사건'으로 규정하고, 관련자 20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입건했다. 공안당국은 눈이 뒤집히지 않을 수 없었다.

3.1민주구국선언으로 기소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포스터를 일본서 제작했따. 김지하는 다른 사건으로 구속된 상태였다.(위에서부터 차례로 함석헌, 문익환, 김대중, 윤보선, 이우정, 안병무, 김지하, 이태영, 정일형, 서남동, 함세웅, 문동환, 이문영)
▲ 구속자 석방 포스터 3.1민주구국선언으로 기소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포스터를 일본서 제작했따. 김지하는 다른 사건으로 구속된 상태였다.(위에서부터 차례로 함석헌, 문익환, 김대중, 윤보선, 이우정, 안병무, 김지하, 이태영, 정일형, 서남동, 함세웅, 문동환, 이문영)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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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주모자를 색출하기 위해 낭독자 이우정을 불러 조사에 들어갔지만 납득될 만한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낭독용 문건을 붓글씨로 정서한 사람은 문익환의 부인 박용길이고, 주모자로 추정되는 문동환은 아무리 털어도 명쾌한 답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이 사건은 문익환이 연루되지 않게 기획돼 있었다.

문익환은 신·구교공동 성서번역위원장이라는 중차대한 임무에 매달린 탓이었다. 계속 주동자를 밝히지 않을 경우 수사의 압박 수위가 점점 더 높아질 텐데, 내부에 환자가 있었다. 심장이 약한 안병무 박사였다. 문동환은 하는 수 없이 형의 이름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문익환이 피고로 데뷔하기에 딱 적절한 시점이 바로 이때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감옥 안팎에서 펼쳐진 역전극

유신정권은 3.1민주구국선언을 빌미로 정부에 비판적인 전·현직 정치인과 종교인, 지식인등 민주화운동의 핵심들을 제거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했다. 선언 직후, 잡아간 구속자 전원을 한 달이 지나도록 가족 면회도 시키지 않고, 재판이 시작된 후에도 방청권을 제한하는 등 인권 유린도 서슴지 않았다.

문익환의 수형번호와 명찰, 6943을 시작으로 11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다.
▲ 수형번호 문익환의 수형번호와 명찰, 6943을 시작으로 11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다.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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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익환은 고난의 장면을 축복의 장면으로, 시련의 시간을 은총의 시간으로 뒤바꾸는 국면 전환의 달인이었다. 재판이 시작되자 고령의 나이로 불구속 재판을 받게 된 함석헌 선생이 상복을 입고 법정에 나왔다. 신현봉 신부는 판사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면서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가 죽은 사실에 조의를 표한다. 김대중은 탁월한 논리로 법정을 민주주의 교육장으로 바꾸고, 문익환은 정작 근심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만큼 당당한 표정으로 자신의 구속을 기뻐하기 시작했다.

"저는 민주화 동지들과 같이 감옥 생활을 할 특권을 받은 것에 감사합니다."

반전의 분위기는 감옥 안팎에서 동시 진행됐다. 감옥 안에 문익환과 동지들이 있다면 감옥 밖에는 부인들이 있었다. 부인들도 보통이 아니었다. YWCA와 여성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이희호(김대중), 공덕귀(윤보선), 이우정, 박영숙(안병무), 박용길(문익환), 페이문(문동환), 김석중(이문영), 이종옥(이해동), 박순리(서남동), 고귀손(윤반응)은 남편 못지않은 싸움꾼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미국에서 하필 문동환을 사랑하여 먼 곳까지 시집을 오게 된 페이 문, 문혜림은 3.1사건을 기해 한국이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독재적인 국가인가를 대외에 알린다. 남편을 면회할 때 어찌나 심하게 입을 맞추었던지 곁에서 민망해진 보호관에게 "아니, 뽀뽀는 우리가 했는데 어째서 아저씨 얼굴이 빨개져요?"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문익환의 부인 박용길이 석방운동을 벌일 때 사용했던 부채와 입었던 원피스.
▲ 석방운동 문익환의 부인 박용길이 석방운동을 벌일 때 사용했던 부채와 입었던 원피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위탁 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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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 문, 문혜림이라 불리운 여인

공개 재판이 유지되지 않자 방청권을 불사르자고 주장한 페이 문과 이종옥의 제안을 필두로 아내들은 기상천외의 방법들로 유신정부의 권위를 묵사발 내기 시작한다.

접는 부채에 '공개 재판하라!'는 구호를 써두었다가 일정한 장소에서 한꺼번에 펴기도 하고, 양산에 '민주주의 회복 만세' 같은 글귀를 새겨서 기습적으로 펼치기도 했다. 신이 나서 몰려드는 것은 외신 기자들이었다. 시각적 효과가 너무도 뛰어났으니 긴급조치로 삼엄하게 얼어붙은 한국에서 부인들이 용감하게 투쟁하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어 전송하기에 너무도 좋았다.

재판 방청을 거부하고 법원 주위서 시위하는 민주구국 구속자 가족들(가운데 박용길).
▲ 석방운동 재판 방청을 거부하고 법원 주위서 시위하는 민주구국 구속자 가족들(가운데 박용길).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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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들은 부인들을 경찰차에 태워 서울 외각의 한적한 장소에 내려놓곤 했다. 당국은 신경질이올라 구속자의 아내들을 미행하고 감시하며, 갖은 괴로움을 안겨주려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아내들은 정교해질 뿐이었다.

수유리 인근에 늘 함께 다니며 맹활약을 펼친 삼총사 박용길, 김석중, 이종옥을 안기부에서는 도봉산 1, 2, 3으로 불렀다. 이종옥은 담당형사가 공중전화로 보고를 할 때 "도봉산1 재가중"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곤 했다. 작고 가녀린 박용길은 경찰들과 맞닥뜨릴 때면 골리앗 앞에 선 다윗처럼 용감했다. 뾰족한 반지가 끼워진 작은 주먹으로 독수리처럼 날아올라 경찰을 얼굴을 강타하곤 하여 주변을 놀라게 하곤 하였다.

부채와 양산 같은 소품을 경찰이 빼앗아가자 부인들은 보라색 십자가를 원피스에 꿰매입고 시위를 벌였다.
▲ 석방운동2 부채와 양산 같은 소품을 경찰이 빼앗아가자 부인들은 보라색 십자가를 원피스에 꿰매입고 시위를 벌였다.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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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은 재판이 끝나면 기독교회관 6층에 있는 인권위원회 사무실에 모여 이우정의 재판 설명을 듣고 다음 행동을 계획했다. 초반에는 계획이 새어나가기 일쑤였는데, 이내 그것이도청(盜聽) 때문임을 알게 되어서 이제 목소리로는 틀린 날짜를 예고하면서 실제 장소나 시간은 글씨로 전달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형사 따돌리기에도 고수가 됐다. 택시를 잡는 척하다가 아무 버스나 잡아타기도 하고, 버스를 타는 척 택시를 타면 속지 않는 형사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똑같은 보라색으로 한복과 여름 원피스를 해 입고, 틈만 나면 뜨개질을 하여 보라색 숄을 제작하였다. 기독교에서 고난과 승리를 상징한다고 해서 선택한 보라색은 특히 해외에서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박용길은 '통일의집(자택)' 대문을 아예 보라색으로 칠해버렸다.

구치소를 축제로 바꾼 새벽의 찬송

1976년 부활주일 새벽, 서대문 구치소 담장 바깥에서 부인들이 찬송하며 시위하는 사진과 함께 이를 보도한 국내의 영자 신문기사.
▲ 석방 염원 새벽송 1976년 부활주일 새벽, 서대문 구치소 담장 바깥에서 부인들이 찬송하며 시위하는 사진과 함께 이를 보도한 국내의 영자 신문기사.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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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이 다가오자 가족들은 열심히 궁리한 끝에 수감자들에게 새벽 찬송을 들려주기로 했다. 그러려면 전날 서울구치소에서 제일 가까운 수도교회에서 밤을 새우고, 꼭두새벽에 어두운 길을 걸어서 서울구치소 건너편 언덕으로 올라가야 했다. 마침내 시간을 맞추고 희미한 구치소 불빛을 향하여 '갈릴리 해변서'라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갈릴리 교회에서 많이 불렀던 노래이기 때문에 남편들이 알 수 있을 터였다.

처음에는 조용하게 시작했는데 점점 커지면서 눈물이 솟아오르는 감격을 느꼈다. 갈릴리 교회에서 많이 부르던 '우리 승리하리라', '뜻없이 무릎 꿇는' 등의 찬송을 이어갔다. 서울구치소 쪽에서도 웅성거림과 함께 함성이 들려왔다. 문익환이 듣고 대답을 시작하자 다른 수감자들이 함께 외쳐준 것이다.

뒤늦게 기관원들이 달려와서 이희호, 김석중과 박영숙을 서대문서로 연행했다. 박용길, 페이 문과 이종옥은 부활주일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 빠져나간 터였다. 남편들이 재판정과 옥중에서 싸움을 이어나가는 동안 부인들은 넋을 놓고 슬퍼하는 대신 거리로 나섰다. 부인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노래와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투쟁을 축제로 바꾸어 놓았다.

*3.1민주구국선언 전문보기(링크)

덧붙이는 글 | 문익환 목사 가택 박물관 프로젝트 스토리펀딩 연재글 5화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문익환, #3.1민주구국선언, #부인들, #이희호, #박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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