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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국민들이 입는 재난이나 인명 피해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남다르다. 예전 같으면 짤막하게 보도했을 사건도, 지금은 관계 당국의 잘못이나 피해자들의 감정까지 관심을 기울이며 심층적으로 보도한다. 국민들의 감정과 기분까지 배려하는 경향이 점차 커지고 있는 모양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특권층 인물 한두 명의 사소한 신상 문제는 자세히 보도돼도, 서민들이 겪는 보다 더 큰 고통은 깊이 있게 보도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요즘 들어 언론이 일반 국민들의 정신적 상처에까지 관심을 표시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국민의 정치 역량이 강해진 데서 찾을 수 있다.

21세기 들어 촛불시위나 촛불혁명 등을 통해 국민들이 단합된 힘을 지속적으로 보여준 결과로 볼 수 있다. 특권층의 갑질은 보다 더 자주 보도되고, 국민들의 아픔은 보다 더 많이 보도되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지금 상황과 너무나 판이한 일들이 예전엔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졌다. 국민의 감정과 기분은 물론이고 생명과 신체까지도 '짐짝'처럼 마구 취급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그중 하나가 1951년 2월 9·10·11일 3일간 자행된 거창학살사건이다. 인민군 패잔병과 빨치산을 일망타진한다는 명분 아래 육군 11사단 9연대가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국민 719명을 학살하고 가옥과 재산을 파괴한 사건이다. 일자별 희생자 수 현황은 아래와 같다.

- 1951년 2월 9일 신원면 덕산리 청연골에서 주민 84명 학살
- 2월 10일 대현리 탄량골에서 주민 100명 학살
- 2월 11일 과정리 박산골에서 주민 517명 학살
- 2월 9일 ~ 2월 11일 기타지역에서 주민 18명학살 등

'버려야 할 지역'에 속한 국민들, 희생되다

거창사건추모공원 내 전시 중인 학살 재현물
 거창사건추모공원 내 전시 중인 학살 재현물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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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살은 육군 11사단의 견벽청야(堅壁淸野) 방침에 따른 공식 군사작전으로 자행됐다. '지켜야 할 지역은 벽을 쌓듯 견고히 확보하고, 버려야 할 지역은 들판을 텅 비우듯 말끔히 없애버린다'는 작전 방침에 따른 일이다.

거창군 신원면은 지켜야 할 지역이 아니라 '버려야 할 지역'으로 간주됐다. 그래서 견벽(堅壁)이 아닌 청야(淸野)가 이 지역에 대한 작전명령이 된 것이다. 2003년 <서울국제법연구> 제10권 제1호(서울국제법연구원 펴냄)에 실린 '거창양민학살사건의 국제형사법적 분석'은 언론보도를 인용해 이렇게 설명한다.

"연대장 오OO 중령은 각 대대장을 불러 사단 사령부에서 내려온 공비토벌작전의 기본 방침인 견벽청야라는 작전개념과 구체적인 작전명령을 시달하였는데, 첫째, 작전 지역 내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 둘째, 공비의 근거지가 되는 가옥은 전부 소각하라, 셋째, 식량은 안전 지역으로 운반하여 확보하라는 명령이었다."
국군과 미군이 거창군 신원면을 지킬 수 없으니 인민군과 빨치산한테 도움 될 수 있는 국민들과 가옥을 모두 없애라는 명령이었다. 이 나라는 국민의 나라이고 국군은 국민의 종들인데, 종들이 작전의 편의를 위해 국민들을 치워버리자고 한 것이다. 지역 내 국민들은 전원 총살하라고 하면서도 식량은 빼내오라고 지시했다. 식량을 '데리고' 나오는 것보다 국민들을 데리고 나오는 게 힘이 덜 들 수도 있는데, 학살자들에게는 식량이 더 중했던 것이다.

'지역 내 국민들을 전원 총살하라'는 명령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군인·경찰·공무원 등의 가족한테는 위해가 가지 않았다. 힘없는 국민들만 전원 총살의 대상이 됐다. 피살자 719명 중에서 14세 이하 어린이가 359명(이중 젖먹이는 100여 명), 60세 이상이 66명이었다. 이들도 북한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학살된 것이다.

'무기징역-징역10년'... 하지만 1년 뒤 그들은 복직했다

거창사건추모공원 내 묘역에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한국전쟁 때 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무고한 거창군 신원면민 719명의 넋이 묻혀 있다.
 거창사건추모공원 내 묘역에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한국전쟁 때 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무고한 거창군 신원면민 719명의 넋이 묻혀 있다.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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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직후에 군 당국은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현장을 통제했다. 하지만,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묵씨의 폭로로 국회에서 조사단을 파견하는 단계로 상황이 발전했다. 그러자 신성모 국방장관과 군 당국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9연대 병력을 내세워 희생자 시신들을 다른 곳에 옮겨뒀다. 또 9연대 병사들이 무장공비로 가장해 국회 조사단을 상대로 위협사격을 가하도록까지 했다. 조사단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런 뒤에 정부는 피살자들이 정당한 이유로 사형을 당했다고 발표했다. 무장공비들과 공모하고 그들에게 협력했으므로, 사형집행은 정당했다고 주장했다. 학살이 아니라 사형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젖먹이 100여 명도 그런 이유로 죽은 셈이 되고 말았다.

국민들은 발표를 믿지 않았다. 여론은 더 악화됐다. 할 수 없이 정부는 학살 가담자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1951년 12월 16일, 9연대장 오익균에게 무기징역, 3대대장 한동석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됐다. 하지만, 1년 뒤 이들은 복직했다.

학살의 당사자인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사죄 및 배상은 물론이고 진상규명도 이뤄질 수 없었다. 그나마 가능했던 것은, 누구 유골인지 알 수 없는 뼈들을 수습해서 합동 묘소를 만든 일뿐이었다. 사건 3년 뒤인 1954년의 일이다. 

거창사건추모공원 맞은편에 군사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위령비가 파괴되어 쓰러진 박산합동묘역이 있다.
 거창사건추모공원 맞은편에 군사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위령비가 파괴되어 쓰러진 박산합동묘역이 있다.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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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 시민혁명 뒤에 일말의 빛이 나타났다. 그해 5월 하순에 국회 조사단이 현지를 방문했고, 11월 18일에는 유족들의 손으로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졌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틀 뒤에 군사정부는 유족 대표들을 반국가단체조직 혐의 등으로 구속했다. 이듬해에는 군을 모독한다는 이유로 위령비를 땅에 파묻고 합동 묘소까지 파헤쳤다.

유족들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린 것은 1995년 12월 김영삼 정부 때였다. 이때 비로소 특별법이 제정돼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벌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정부 차원의 공식 진상조사는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다. 유족들이 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였건만,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가 국민을 살피는 경향, 더 강해져야

왕조시대에는 국가가 왕실의 소유물로 간주됐다. 소수의 대귀족들도 '주주'로 인식됐다. 그랬기 때문에, 전쟁이 나면 백성보다는 왕실과 지배층을 먼저 챙겼다. 노동하고 세금 내는 백성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건 아니지만, 백성을 국가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같은 비상시에 백성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관념이 발달할 여지가 없었다.

20세기 들어 한국에서는 왕정 체제가 종식되고 민주정치가 시작됐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는 물론이고 그후로도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왕조시대의 관념에 젖어 살았다. 국민을 개·돼지에 비유하는 인식의 소유자가 21세기까지도 정부 관료를 할 수 있을 정도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조사관이었던 신기철은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2017년에 있었던 거창 학살사건 제66주기 위령제.
 2017년에 있었던 거창 학살사건 제66주기 위령제.
ⓒ 거창사건사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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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하는 동안에 만난 가해 측 인사들에게 국가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습니다. 이들은 국가 성립 초기나 한국전쟁 같은 위기 상황에서 반대세력을 제압하는 데 따르는 희생에 대해선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국가는 권력자의 소유물이 되어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국민보다는 국가를 신성시하고 국가를 권력자의 소유물로 인식하는 낡은 관념의 소유자들이 20세기에도 국가기관 곳곳에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전쟁 중에 국민을 걸리적 거리는 대상으로 인식하고 함부로 다루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잘 안 지켜지는 말이 있다. '국민주권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국민이 주인인 나라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국민의 종인 정부와 군대는 주인인 국민들부터 챙겨야 한다. 전쟁 중에 국민을 상전으로 떠받들어야 한다. 국민들한테 해가 가지 않도록, 국민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국민이 주인이고 국민을 위한 전쟁이므로 이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이런 이치를 놓고 보면, 경남 거창에서 국민 학살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졌다는 사실, 정부와 군대가 아무렇지도 않게 진상을 은폐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국가가 '주인님'인 국민의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는 것은 국민주권국가에서는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인이 주인을 죽이는 것은 주인집을 망치는 일이다. 정부와 군대가 국민을 죽이는 일도 나라를 망치는 일이다. 

촛불시위와 촛불혁명을 계기로 한국에서는 국민의 힘이 더욱 더 강해지고 있다. 그래서 재난 사고를 보도할 때에도 국민들의 감정과 기분을 세세히 고려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추세가 계속 발전하면, 미래의 전쟁에서는 국가와 군대가 국민들한테 걸리적거리지 않고자, 또 국민들한테 불편을 끼치지 않고자 극도로 조심하는 경향이 나타날 수도 있다.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한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만, 거창 희생자들이 조금은 더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태그:#거창양민학살사건, #거창사건, #국가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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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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