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리장(麗江)고성과 그 주변 지역을 여행하다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게 바로 동파문자(東巴文字)라고 부르는 독특한 글자다. 기념품 가게와 식당은 물론, 호텔과 관청에 이르기까지 간판마다 중국어와 함께 병기해 놓고 있다. 중국 내 소수민족의 하나인 나시족(納西族)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문자로,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상형문자로 평가받고 있다.

글자라고는 하지만, 보면 볼수록 그림 같다. 그것도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이 연상을 통해 그린 도화지 속 낙서처럼 보인다. 그래선지 동심의 눈으로 보면 동파문자를 처음 본 사람이라도 대충 무슨 뜻인지 알아맞힐 수 있다. 리장의 고샅길을 걷다보면 마치 공부라도 하라는 듯 담벼락마다 갖가지 동파문자가 그려져 있는데,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내용을 해석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리장고성 내 고샅길을 걷다보면 담벼락마다 동파문자를 그려놓았다. 아이들의 낙서 같은 느낌이어서 정겹고도 재미있다.
▲ 동파문자를 그려놓은 담벼락 리장고성 내 고샅길을 걷다보면 담벼락마다 동파문자를 그려놓았다. 아이들의 낙서 같은 느낌이어서 정겹고도 재미있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언뜻 보면, 한때 우리나라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졸라맨'의 형태에다 화려한 색깔을 덧입혀 놓은 것도 같다. 거기에다 화살표 같은 상징적인 기호를 써서 의미를 덧입히면서 동사와 형용사로 쓰임새를 확장하고 있다. 예컨대, 두 사람이 긴 막대기를 교차하고 있으면 싸운다는 뜻이고, 사람의 배 부분을 볼록하게 그린 다음 그 안에 사람을 그려놓으면 임신했다는 의미다.

지금이야 나시족 중에 중국어를 모르는 이들이 많지 않다보니,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기능은 시나브로 사라져가고 있는 듯하다. 중국의 한자를 비롯해, 인접한 동남아시아 지역의 고유 언어와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데에는 더없이 소중한 문화자산일지언정, 현재는 되레 관광 상품으로서의 역할이 더 커 보인다. 알록달록한 동파문자를 디자인의 소재로 활용한 기념품들이 가게마다 가득하다.

글자에 덧입혀진 화려한 색깔은 나시족의 전통 복장의 그것과 같다. 처음 보는 사람들도 동파문자가 나시족의 문자임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는 이유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과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기념품 가게의 직원을 빼고는 전통 복장을 한 나시족을 보기 힘들어진 요즘, 동파문자도 꽃밭을 몸에 두른 것 같은 그들의 옷과 같은 운명은 아닐는지 안타까운 심정이다.

안내판 위 동파문자가 중국어와 영어 등에 밀려 글자의 크기가 점차 작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쉽사리 사라질 것 같진 않다. 호텔과 상점의 간판은 물론, 식당의 메뉴판과 계산서에서도 동파문자를 만날 수 있다. 이는 어쩌면 문자의 소멸을 막기 위한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동파문자를 두고 나시족의 마지막 남은 정체성이라고 잘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성을 다해 벽화로 그리고, 나무 간판에 새기고, 부러 내러티브를 입혀 갖가지 기념품으로 제작해 관광객들에게 파는 것이 단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은 아닌 것이다. 리장고성의 중심 광장인 쓰팡지에(四方街)에 나시족 어르신들이 볕 좋은 오후마다 나와 손에 손을 잡고 그들의 전통춤을 추며 부르는 노래도 동파문자를 지켜달라는 주문처럼 들린다. 부디 동파문자로 소통하는 마지막 세대가 아니기를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이 읽힌다.

관공서는 물론, 식당과 카페 등 모든 간판에 동파문자가 적혀있다.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상형문자의 강인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 동파문자가 적힌 우체국 간판 관공서는 물론, 식당과 카페 등 모든 간판에 동파문자가 적혀있다.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상형문자의 강인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그림 같은 동파문자가 그 자체로 리장의 상징이자 대표적인 관광 상품으로 굳건히 자리 잡은 건 기실 그러한 노력들에 기인한 것이다. 언제까지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상형문자로 남게 될지는 모르지만, 나시족 사람들의 글자에 대한 애정과 보존하려는 노력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지금도 동파문자가 그려진 기념품을 보면, 나시족 사람들의 선한 얼굴이 포개진다.

그들의 '글자 사랑'이 내심 부러웠던 까닭일까. 관광 안내판에 중국어와 영어 아래 적혀있는 '익숙한 글자'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하도 민망해 차라리 지우는 것이 더 나으리라는 생각마저 든다. 분명 한글은 한글이되, 말도 안 되는 황당한 글귀가 마치 장난처럼 적혀있다. 인터넷 포털의 번역기에 100% 의존한 나머지 아무런 확인 절차 없이 그대로 옮겨놓은 탓이다.

동파문자는 처음 본 사람도 대충 뜻을 알아맞힐 수 있다. 예컨대, 사진의 위 글자는 풍경이 보이는 숙소라는 의미의 중국어인데, 그 아래에 적힌 동파문자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유추가 가능하다.
▲ 쓰긴 어려워도 해석하긴 쉽다? 동파문자는 처음 본 사람도 대충 뜻을 알아맞힐 수 있다. 예컨대, 사진의 위 글자는 풍경이 보이는 숙소라는 의미의 중국어인데, 그 아래에 적힌 동파문자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유추가 가능하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오역된 채로 버젓이 세워놓은 게 너무 많아서 여기에 다 소개할 수조차 없다. 리장과 따리 주변 대부분의 관광지가 죄다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대로 된 관광 안내판을 찾는 게 차라리 하늘의 별 따기다. 우리나라 사람들이야 웬만한 오탈자쯤이야 대충 무슨 의미인지는 파악할 수 있겠지만, 우리 고유의 한글이 푸대접 받고 있다는 생각에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사실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처음 귀띔해준 이도 그곳 숙소에서 만난 한 서양 관광객이었다. 열렬한 'K-Pop' 팬이라는 그는 한때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했다는데, 여전히 말로 대화하는 건 서툴지만 글자는 읽고 무슨 뜻인지 얼추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넘쳐나는 지금까지도 엉망인 채로 방치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외려 이방인인 그가 물어왔다.

이 안내판을 배경을 사진을 찍는 이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한국인 관광객들이었다. 보면 볼수록 우스꽝스러운 번역이다.
▲ 음식물 반입 금지? 이 안내판을 배경을 사진을 찍는 이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한국인 관광객들이었다. 보면 볼수록 우스꽝스러운 번역이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따리고성 내 한 박물관은 '전시장 내 음식물 반입 금지(Please do not bring snacks to the exhibition hall)' 정도로 번역되어 있어야 할 안내판에 '간식 못 데리고 들어가 전시장'이라고 적어놓았다. '무형문화재(Intangible Cultural heritage)'를 한자로 적힌 중국어 그대로 '비물질문화재'로 적는가 하면, '해설사 휴게실(Commentator Lounge)'을 '내레이터를 어디에 푹 쉬었'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말로 번역해놓았다.

좁은 계단을 오르는 길, 머리를 다칠 수 있으니 조심하라(Mind Your Head)는 것을 '머리를 마음'이라고 적은 곳도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부지기수다. 영어 'Mind'가 조심하다는 뜻과 함께 명사로는 '마음'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다보니 생겨난 실수로 보인다. 어느 한국인 관광객도 민망했던지, 검정색 매직으로 '마음'에 가로줄을 긋고 '조심'이라고 덧칠해놓기도 했다.

애초 'mind'의 의미가 여럿인 게 문제였다. 한국인 관광객이 굵은 매직으로 부러 '조심'이라고 바꿔놓았는데, 잘 눈에 띄지 않는다.
▲ 얼마나 민망했으면 애초 'mind'의 의미가 여럿인 게 문제였다. 한국인 관광객이 굵은 매직으로 부러 '조심'이라고 바꿔놓았는데, 잘 눈에 띄지 않는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그런 거라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아예 한자의 독음조차 틀린 경우에는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중에서도 따리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인 숭성사(崇聖寺)의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은 '압권'이다. 하늘을 찌를 듯 나란히 솟아있는 삼탑(三塔)으로 유명한 숭성사는 시내 어느 곳에서도 보이는 명실공히 따리의 랜드마크다.

제대로 된 번역이 단 하나도 없는 문제의 관광 안내판
▲ 오타의 향연 제대로 된 번역이 단 하나도 없는 문제의 관광 안내판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숭성사 삼탑 출토문화재 전시관(崇聖寺 三塔 出土文化財 陳列館)'으로 적어야 할 것을 '송삼사 숨탑 촐토문물 잔시관'으로 써놓았다. 대체 누가 번역한 것인지 알 길 없지만, 이렇게 틀리게 적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어설프게 우리말을 배운 현지인이 발음한 대로 받아 적은 뒤 아무런 확인 절차도 없이 세운 게 아닐까 싶다. 만약 그렇다면 '선 무당이 사람 잡은 꼴'이다.

그나마 그렇듯 어처구니없는 번역조차 고마워해야할 곳도 있다. 따리고성 주변 대부분의 공중화장실에서는 우리 한글을 '재발견'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직역을 한답시고 번역해놓은 문장도 황당하지만, 그마저도 글자를 뒤집어놓아서 마주하는 순간 우리 한글 맞나 싶어 헛웃음을 짓게 된다.

공중화장실에서도 한글의 굴욕은 계속 되었다. 번역은 비문이고 글자는 뒤집어놓았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한글의 '재발견' 공중화장실에서도 한글의 굴욕은 계속 되었다. 번역은 비문이고 글자는 뒤집어놓았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변기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서라(Move Forward One Step, Closer TO Civilization)'는 뜻의 재치 있는 중국식 표현을 두고, 엉뚱하게 '문명 밀고 나갈 걸음이다'라고 번역했다. 아무리 읽어봐도 당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비문이다. 그 아래 적힌 일본어나 아랍어도 설마 그럴까 싶어 지나가는 그 나라 관광객들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우스꽝스러운 관광 안내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우리나라 관광객들도 만났다. 당장은 어이없다기보다 재미있다는 반응이었지만, 자칫 우리 한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면서도 잘못 번역된 것을 모두 교체한다면, 따리고성 주변의 관광 안내판을 죄다 뜯어내야 할 거라면서 현실적인 어려움을 지적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리장과 따리 인근을 여행하다보면, 관광지의 안내판과 팸플릿은 물론, 소방시설 경고문에 이르기까지 어딜 가나 한글을 쉽게 볼 수 있다. 하긴 식당과 카페를 들어서기가 무섭게 직원이 달려와 "한국인이죠?"라며 말을 건넬 정도니, 그만큼 한국인 관광객이 많다는 이야기다. 여기저기서 귀에 익숙한 걸 그룹의 노래가 흘러나와 순간 이곳이 우리나라인가 착각할 때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대부분의 안내판에서 한글은 중국어와 영어 다음이니, 적힌 순서로만 치면 적어도 이곳에선 우리나라의 위상이 일본이나 유럽의 여느 나라에 비해 높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관광객들에게 낯선 여행지에서의 첫인상이랄 수 있는 안내판의 번역부터 바로잡는 게 우선일 성싶다. 더 이상 조롱거리가 되지 않도록 서둘러 조치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관광지마다 소개된 한국어가 죄다 틀렸다고 처음 알려준 서양인은 여태껏 방치된 이유를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저 없이 그 책임이 중국 당국에 있다고 잘라 말했지만, 조금은 뒤통수가 따갑긴 했다. 수많은 한국인 관광객이 이미 다녀갔고, 인터넷 블로그 등을 통해 숱하게 문제를 제기했을 텐데도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면, 우리 정부에도 일말의 책임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태그:#윈난 여행, #동파문자, #한글 번역기
댓글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