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의 포스터.

영화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의 포스터. ⓒ 와이드 릴리즈(주)


미국의 인종 차별은 뿌리 깊은 문제입니다. 유럽 백인 이민자들의 이주로 시작된 이 나라의 역사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아프리카계 이주민의 피와 땀으로 얼룩져 있지요. 1960년대에 절정을 맞이한 흑인 민권 운동은 이런 역사에 대한 반성과 변화를 요구하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차별은 상존합니다. 최초의 흑인 미국 대통령인 오바마가 재임하던 2014년에도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흑백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소요 사태가 있었을 정도니까요. 심지어 공공연히 인종 차별적 언행을 서슴지 않는 트럼프 같은 이가 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미완성 원고가 영화로

민권 운동 기간을 전후해서 명성을 크게 얻었던 미국의 흑인 작가 제임스 볼드윈은 1979년 자신의 문학 에이전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다음 책은 흑인 민권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들이었지만 하나 같이 암살당한 세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될 거라고요. 그들은 바로 메드거 에버스(1963년 암살), 맬컴 엑스(1965년 암살), 마틴 루서 킹(1968년 암살)입니다.

하지만, 그 책은 끝내 완성을 보지 못했고 1987년 제임스 볼드윈이 사망한 이후 30쪽짜리 미완성 에세이로만 남았습니다. 영화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는 그가 남긴 원고를 바탕으로 만든, 미국 흑인의 삶과 역사에 관한 다큐멘터리입니다.

 영화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의 주요 인물들. 왼쪽부터 맬컴 엑스, 마틴 루서 킹, 제임스 볼드윈.

영화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의 주요 인물들. 왼쪽부터 맬컴 엑스, 마틴 루서 킹, 제임스 볼드윈. ⓒ 와이드 릴리즈(주)


이 영화는 두 가지 축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제임스 볼드윈이 주목했던 세 인물의 삶입니다. 그는 흑인 민권 운동의 출발점이 됐던 1950년대 흑백 통합 교육 시행부터, 세 사람 각각의 암살 소식을 들었을 때의 슬픔과 놀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를 대신하여 사무엘 L. 잭슨이 내레이션을 맡았는데, 침착하지만 힘 있는 그의 목소리는 깊은 울림을 더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제임스 볼드윈 자신이 여러 TV 토론이나 토크쇼에 나와 열정적으로 주장을 펼치는 자료 화면들입니다. 만약 그가 쓰기로 했던 책을 완성했더라면 들어갔을 법한 이야기들이 유창한 언변으로 펼쳐집니다. 그의 이야기는 매우 논리적이면서도 감정을 자극하지요.

아이티 태생의 흑인 감독 라울 펙은 제임스 볼드윈의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고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흑인이 어떤 식으로 묘사되었는지 살펴보고, 최근까지 인종 차별로 인해 벌어진 실제 사건들의 기록 사진을 보여주며, 상황에 맞는 블루스 음악을 깔아 분위기를 살립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각종 자료 화면을 가득 메우는 수많은 흑인의 얼굴입니다. 차별과 학대에 희생된 이들의 얼굴, 믿고 따르는 이의 죽음 앞에서 슬픔과 분노로 어쩔 줄 모르는 얼굴, 앞으로도 절대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체념의 얼굴 등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습니다. 영화 끝에 오늘의 시간을 살아가는 다양한 흑인들의 모습이 비칠 때 감회가 남다른 이유가 있지요.

미국의 문제만은 아닌 이유

 영화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의 한 장면. 1950년대 시행된 흑백 통합 교육에 반대하는 백인 시위대의 모습이다.

영화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의 한 장면. 1950년대 시행된 흑백 통합 교육에 반대하는 백인 시위대의 모습이다. ⓒ 와이드 릴리즈(주)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그들을 같은 인간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피부색이 다를 뿐인데 백인이 아닌 사람을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여성을 그저 자기 욕구 해소를 위한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며, 성적 지향이 다른 것을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데서 모든 문제와 비극이 시작되지요.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는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 현실을 깊이 있게 다룸으로써, 인간 사회에 보편적인 인권과 평등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어쩌면 이 영화를 보고 별 감흥이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단일 민족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흑백 차별 문제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요.

그러나, 이 영화에서 '흑인'의 자리에 '여성', '성 소수자', '외국인 노동자' 등을 넣어 본다면 곧바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다루는 영화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 대중문화에서 여성-성 소수자-외국인 노동자가 어떻게 묘사되는지, 또 그들에 대한 폭력 사건이 실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 그들이 현재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이 영화의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cinekwon.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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