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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나 저제나 아무리 기다려도 도통 안내방송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조금씩 해놓을 걸 후회가 막심이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가 계속되다 보니 배관이 얼어서 베란다 쪽으로는 물 사용 금지란다. 이는 그쪽에 위치한 세탁기 사용을 금지한다는 말이다. '에구구, 이를 어쩌나' 한숨만 나온다. 산더미같이 밀린 빨래가 나를 향해 쓰나미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듯하다.

우선 급한 대로 양말과 수건, 속옷들만 대충 추려봐도 커다란 바구니로 한가득이 넘는다. 욕조에 빨래와 세제를 넣고 수도꼭지를 한껏 틀어 물이 콸콸 쏟아지게 해놓으니 바글바글 거품이 일며 빨래가 발효라도 되는 듯 부풀어 오른다.

옛날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불 때서 밥하고 세탁기도 없이 빨래하고 밭일하며 온종일 쉴 새 없이 몸을 부리는 고단한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그런 시절에 비하면 이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지 모른다며 혼자 고개를 주억주억 해본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없이 벅벅 문질러 빨아대는 빨래에 시큰거리는 손목은 어쩔 수가 없다.

땀을 뻘뻘 흘리며 욕조에 담겨있는 남은 빨래를 자작자작 밟아 땟물을 빼냈다. 그런 다음 다시 물을 받아 헹구어가며 자근자근 밟아내니 점점 맑은 물이 나온다. 때 묻은 삶의 조각조각들도 이렇게 빨아 하얗게 만들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처음엔 새하얀 옷을 입고 시작했으나 살면서 이렇게 저렇게 실수도 하고 오점도 남기기 마련인 게 인생이다. 후회스러운 기억들을 커다란 욕조에 탈탈 털어 넣고 시원하게 헹구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

 그동안 벗어온 삶의 허물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는 듯도 하고 꿈꿈하고 냄새나는 미처 소화되지 못한 기억들이 밝은 햇볕에 기분 좋게 말라가는 듯도 하다
 그동안 벗어온 삶의 허물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는 듯도 하고 꿈꿈하고 냄새나는 미처 소화되지 못한 기억들이 밝은 햇볕에 기분 좋게 말라가는 듯도 하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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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한창이다. 겨울이지만 약간은 봄 냄새가 나는 듯 겨울의 색깔이 조금 엷어진 것 같다.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 속에 가랑이를 쫙 벌리고 온몸으로 햇살을 흠뻑 받고 있는 빨래가 눈이 부시다.

그동안 벗어온 삶의 허물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는 듯도 하고 꿈꿈하고 냄새나는 미처 소화되지 못한 기억들이 밝은 햇볕에 기분 좋게 말라가는 듯도 하다. 오랜만에 강한 햇살이 쏘는 듯 찔러오는 빨래하기 좋은 날이다.

삶은 시작도 끝도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진행되는 게임이지만 그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없이 많은 선택들은 우리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크고 작은 많은 선택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 나만의 독특한 인생 카페트가 만들어진다고 한다면 좀 더 아름다운 문양을 위해 우리는 더 나은 선택들을 고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문득, 실수가 없는 완벽한 삶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속에서 이해나 사랑, 연민 같은 인생의 소중한 가치들을 배울 수 있을까.

살아오며 만든 많은 잘못과 후회들도 대부분은 그 상황 속에서 최선이라 생각하고 선택한 결과일 것이다. 애써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그런 좌절과 아픔을 통해 지금의 더 성숙하고 진실한 '나'로 성장한 것이 아닌지.

그렇다면 주물주물 빨아서 깨끗이 털어버리기보다는 삶 속 한 페이지로 소중히 남겨놓을 때 더 진하고 애환 어린 삶의 책 한권이 되지 않을까. 손빨래와 시큰거리는 손목, 작은 깨달음이 어우러진 내 삶의 한 페이지도 이렇게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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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글을 사랑하는 수지마담입니다. 좀 더 전원적인 삶을 꿈꾸지만 현재는 수지의 아담함과 소박함에 만족하며 살고 있고요. 좀 더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2018년 6월 '문파'로 등단하여 수필가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