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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대구는 지옥이다. 더욱이 교도소 운동장은, 말이 운동장이지 테니스장만한 공간에 200여 명의 사람들에게 운동을 하라면 할 수 있는 운동이란 것이 없다. 기껏 담장을 따라 다람쥐가 쳇바퀴 돌 듯 뱅뱅 도는 것 밖에는. 하지만 이것마저도 하지 않으면 24시간을 좁은 방 안에 갇혀 지내야 하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나와 콧바람을 쐬야 한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담장을 따라 두세 명씩 이야기를 나누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고 있고 운동장 안에서는 오리걸음으로 걷거나 토끼뜀을 하는 사람들이 몇 보인다. 난 이도저도 다 싫어 한 쪽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일광욕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운동시간 30분이니 뜨겁고 더워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정말이지 얼마 만에 보는 뜨거운 햇살인가. 덥고 복잡하고 먼지가 날려도 이렇게 운동장에 나와 해를 보고 앉아 있다는 것이 최악의 상황에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유난히 담장의 그늘 한 켠에 대여섯 명이 모여 있는 주변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담장을 따라 운동장을 돌다가도 그들이 있는 그늘 주변에 오면 자연스럽게 그들을 피해 다녔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뭐가 그리 즐거운지 이야기를 하면서 간간이 웃기도 하고 손장난도 치고 그랬다. 참 이상한 일이다 싶었지만 아는 사람도 없었고 누구에게 물어 보기도 그랬다.

'최고수'와 친해지다

 여름의 대구는 지옥이다. 더욱이 교도소 운동장은(사진은 tvN <슬기로운 감빵생활> 스틸컷)
 여름의 대구는 지옥이다. 더욱이 교도소 운동장은(사진은 tvN <슬기로운 감빵생활> 스틸컷)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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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운동이 끝나고 방으로 들어와 막 샤워를 하려는데 봉사원이 방 앞에서 불렀다. 날짜를 보니 오늘은 접견 올 사람도 없어 이 시간에 나를 찾을 일이 없는데 싶어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리자 다짜고짜 '그 사람들이 누군지 알고나 이야기를 한 건가요?'라며 토끼 눈을 뜨고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운동 시간에 이야기를 나눈 해병대 출신 빨간 명찰이 사형수라고 했다. 재판을 거쳐 사형수가 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형이 집행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말을 건넨 것이다. '사형수'라는 무섭고 절박한 호칭 대신 '최고수'라는 별칭을 쓰는 것이 규칙 아닌 규칙이 되었다고 설명해 준다. 그 짧은 설명을 하면서도 힐끔힐끔 좌우를 살피며 눈치를 보았다.   

아까 사람들이 최고수들을 피해 운동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고 내가 그 무리 근처로 가 있을 때 나를 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해가 되었다. 두려움과 기피 대상인 최고수에게 찾아가서 말을 걸었으니 나도 참 겁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는 것을 일부러 찾아와서 알려준 봉사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막 돌아 서려는데 봉사원이 한쪽 눈을 찡긋 거리며 옆방을 가르쳤다. 얼른 이해를 하자면 내 옆방에도 최고수가 있다는 말이고, 큰소리로 이야기 하지 못하고 힐끔거린 이유는 옆방의 최고수가 들을까봐 배려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나도 얼른 알았다는 신호로 한쪽 눈을 찡긋거려 주자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사라졌다.    

다음날 운동시간, 어제 일도 있고 그들과 또 부딪히는 것도 어색할 것 같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옆방 최고수가 운동화를 신으며 '안 나가세요?'라고 말을 건넸고 얼떨결에 그를 따라 운동장에 나갔더니 어제 해병대라고 알려준 최고수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고 서로 가볍게 목례를 하게 되었다.

운동장에 나가면 다섯 명의 최고수들과 함께 운동을 해야 했는데 최고수 다섯 명이 움직이면 경비교도대(현역 입대 대신 교도소를 지키는 대원으로 입대하여 국방의 의무를 하는 사람) 몇 사람이 더 늘어날 정도였으니 그들은 이름과 존재감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이 무섭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그들도 나에게 위협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자신들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준 사람이 없었던지 먼저 말을 건넨 나를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다. 이것이 그들과 내가 친해진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최고수들과 친해지고 나서 운동시간에 그들에게 듣는 이야기는 다양했지만 그들이 최고수가 된 사연을 듣는 일은 없었다. 누가 자신의 지우고 싶은 어두운 과거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

12월 30일, 그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 내 옆방을 쓰는 그는 나에게 자신을 소개해 주었고 이곳에 오게 된 사연을 짧게 전해 주었다. 이후, 나는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나서도 그가 누구였다고 말하지 않고 살다 사회인으로 복귀해서 각종 포털 사이트를 통해 그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그러다 그 날이 왔다. 1997년 12월 29일. 최고수들은 연말을 싫어했다. 형의 집행이 대부분 연말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날 운동시간에 운동장에서 만난 우리 여섯 명은 최소 1997년은 무사히 넘길 것이라 안도하며 웃으며 서로를 격려했다.

그들은 12월 1일부터 하루하루 긴장하고 마음 졸였을 것이다. 운동을 마치고 각 방으로 헤어지면서 어쩌면 내년에나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새해 인사까지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1997년 12월 30일. 그들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옆방 김아무개, 그가 가는 마지막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는 그렇게 가면서 내 방 앞에서 잠시 멈추어 나를 쳐다보고 갔다. 그렇게 그들이 세상을 떠나보내고 나는 일주일 정도 운동장에 나가지 못했다. 고열과 심한 우울감에 시달렸으며 밤에는 꿈도 꾸고 헛소리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일주일을 앓고 볕을 보기 위해 운동장에 나갔는데 운동장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음부터 하늘로 간 최고수들은 이 공간에 없었던 것처럼 모두가 평화롭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오히려 조금 더 활기차고 밝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 당시 나의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일반 재소자들이 같은 방에서 최고수와 사는 일은 조심스럽고 불편한 일이라고 했다. 그에게 조금 불편한 기색만 보여도 긴장하고 무슨 일이든 그에게 먼저 의견을 물어야 하기에.

다는 그러지 않지만 사형을 선고 받고 초기에는 예민하기도 하고 세상에 대한 불만도 있어 거칠고 난폭하지만 각 종교단체의 성직자 수도자들과 일반인 봉사자들에 의해 많이 순화되고 정화된다.

내가 사형 폐지를 찬성하는 이유

 tvN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무기수 할아버지
 tvN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무기수 할아버지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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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형폐지를 찬성하는 사람이다. 난폭하고 거칠고 조금은 무서운 사람에게 시간과 정성과 많은 노력을 들여 변화를 준 다음 형을 집행한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모순이라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내가 본 많은 최고수들은 정말이지 저 사람이 사람을 상하게 했을까 싶을 정도의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나는 대구교도소에 있는 박아무개 최고수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와 인연을 맺은 지가 벌써 20년이다. 그가 나에게 보내준 편지가 라면 박스로 셋은 될 것이고 나도 열심히 그를 위해 편지를 썼다. 더욱이 지금은 세상이 편해져서 인터넷으로 편지가 가능하고 전화 통화도 가능해졌다.      
 
내가 암으로 치료를 받을 때. 그는 자신의 영치금 중 100만 원을 병원비로 보내 주기도 했다. 영치금도 교도소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담당 재소자의 교정 교화에 필요한 일이라고 교도소장이 인정하면 되는 일이라 들었다.

나도 병원비를 받기 위해 진단서와 통장 사본 등 꽤 많은 서류를 교도소로 보내야 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어서 그 돈을 받았다. 

나도 내가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위해 많은 일을 했을 터인데 미약한 사람이다 보니. 편지 보내는 것. 어쩌다 면회 가서 얼굴 보여 주는 것이 전부이다. 언젠가는 그의 부모님을 찾아 만난 적도 있었다. 그를 찾아오는 유일한 두 사람. 나와 그의 동거녀. 하지만 이제 동거녀도 오지 않는다고 한다. 20년 동안 그를 찾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 되었다.

그는 최고수로 살면서 방송통신대까지 졸업했고 불교를 거쳐 지금은 신심 깊은 기독교 신자로 살고 있으며 발명을 하는 취미를 가져 특허 등록을 몇 개씩이나 가진 사람이다. 더러는 그를 도와주는 대학교에 특허를 기증하기도 하고. 이 모든 일들을 교도소 안에서 하는 사람이 그다. 내가 그를 안 지가 20년이 되었으니 그도 최고수란 빨간 명찰을 달고 20년 째 교도소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를 위해서라도 나는 사형반대, 사형폐지를 외치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손에 생을 다한 그 분에게는 정말이지 죄송하고 송구한 일이지만 나는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뉘우친 20년의 세월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기적이 있다면 그에게 꼭 일어나기를 빈다. 내 20년 지기 친구에게.

덧붙이는 글 | 집시법 위반으로 1년 6개월간 대구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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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부 기자입니다. 왜 사냐건 웃지요 오홍홍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