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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외모 이야기나 불쾌한 농담 아니고 할 말이 없다면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외모 이야기나 불쾌한 농담 아니고 할 말이 없다면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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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서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 자리 옆에는 양복을 단정히 갖춰 입은, 마른 체구의 남자가 앉았다. 이륙한 지 대여섯 시간쯤 지났을까, 옆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상품 카탈로그를 건성으로 뒤적이는 것을 보니, 꽤나 지겨운 모양이었다.

"뭐 하는 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자기는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내가 미국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고 하자, '외국에서 가르치려면 그 나라 말을 정말 잘 해야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기본적 소통 능력은 필요하겠지만, 좋은 선생이 되는 데 언어가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고 답했다.

그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국에서 강의하는 분들 대부분이 한국어에 능하지만, 그렇다고 모두 강의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하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좋은 선생은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래 생각하고 많이 준비하는 하는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이제 그는 질문을 바꾸어, '미국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일상적 문화에 적응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 같다'고 답했다. 일상의 말과 행동을 고스란히 외국으로 옮겨온다고 할 때, 있는 그대로 바람직한 면이 있고,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으며, 반드시 피해야 할 부분이 있다.

예컨대 한국인들 다수가 지닌 다정하고 겸손한 태도는 세계 어디서든 환영 받는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상대방 외모를 거론하는 사람이 있다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이것은 상대를 불쾌하게 만드는 행동이므로, 한국에서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 이제 여자와는 말도 못 하겠네요."

그렇다.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외모 이야기나 불쾌한 농담 아니고 할 말이 없다면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

법무장관 외모를 거론해 혼줄 난 오바마

미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에서는 외모에 대한 부정적 발언은 물론, 칭찬하는 말까지도 조심해야 한다. 언젠가 한국 남성 유학생이 여성 학생을 치켜세운답시고 '섹시하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기겁한 일이 있다. 정말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외모 자체를 언급하지 말아야 하며, 꼭 칭찬하고 싶다면 그 사람 신발이나 가방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 

한국에서 강의했던 한 미국인 교수는 남자 교수들이 시도때도 없이 외모를 입에 올려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공개강연이나 학회에서 교수를 소개하면서 '우리 학교 모델'이니, '우리 학과의 바비인형' 따위의 말을 스스럼없이 한 것이다. 그는 그때마다 당황스럽고 깊은 수치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2013년 오바마는 말 한 마디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캘리포니아 법무장관을 소개하면서 덧붙인 칭찬 때문이었다.

"그녀는 뛰어나고 헌신적이며, 강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가장 출중한 외모(best looking)를 지닌 법무장관이기도 하지요."

미국 매체뿐 아니라 전세계 언론으로부터 '성차별적 발언'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오바마 자신도 부적절한 발언이었음을 시인한 뒤, 당사자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다.

남자가 여자를 빤히 쳐다보는 것 역시 해서는 안 될 행동이다. 외모를 언급하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여성을 응시하는 행위도 성희롱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1년 캘리포니아주 법원은 같은 직장에서 여성을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남성의 행동이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렸고, 불만이 제기된 뒤에도 즉각 조치를 취하지 않은 회사 측도 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응시에 성적인 의도가 담겨있지 않은 경우까지 성희롱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이다. 모순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판결문을 들여다 보면 논리는 명확하다. "상대가 남성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여성에게 했다는 사실은, 그 행위가 성적 차별에 근거한 것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MBC 유명 드라마 PD A씨가 상습 성추행으로 인사위원회에 회부됐다. 피해자의 제보를 받은 MBC는 현재 A PD를 대기발령하고 자체 조사를 진행 중이다.
 MBC 유명 드라마 PD A씨가 상습 성추행으로 인사위원회에 회부됐다. 피해자의 제보를 받은 MBC는 현재 A PD를 대기발령하고 자체 조사를 진행 중이다.
ⓒ 오마이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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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인생 망가뜨린 자들, '내 인생은 소중해'

해외에서 성희롱이 이렇게 폭넓게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역으로 한국 사회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를 말해준다. 최근 문화방송(MBC)은 상습적 성추행 혐의를 받아 온 피디에게 직무배제 결정을 내렸다. 그는 최근 <스포츠조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

"이번 일에 대해 주변에 물어봤더니, 제가 평소 남녀 구분 없이 쉽게 어깨나 등을 토닥거리거나 터치하는 습관이 있음을 깨달았고 깊이 반성한다."

그의 '반성'은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한 혐의를 받는 안태근 검사의 '사과'와 쌍둥이 형제처럼 닮았다. 안 검사는  "기억이 없지만, 보도를 통해 당시 상황을 접했고 그런 일이 있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한 바 있다. 한국에는 몸과 뇌가 따로 돌아다니는 남성들이 꽤 있는 모양이다. 제 몸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려면 남들에게 묻거나 언론보도를 봐야 하니 말이다.

게다가 그 피디는 기묘한 사과 뒤에 "제 인생이 망가질 정도의 잘못인지는 잘 헤아려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 항변을 듣고 있자니, 얼마 전 발생한 한 대학교 대나무숲에 올라온 글이 떠올랐다. 글쓴이는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로 추정된다. 그는 글에서 술에 취한 학생을 강간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생존자가 피해 사실을 주위에 알린 탓에 '내 대학생활은 다 끝났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이게 너가 원하던 거야? 이런 사적 복수도 위법 행위라는 거 알고는 있지? 내년 신입생 올때부터는 좀 자제해."

미국에서도 최근 스타 방송인의 성추행 사건이 큰 논란이 되었다. <60분>의 진행자로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방송인 찰리 로즈 역시 여성들을 성추행하거나 성희롱한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복수의 여성이 나서서 피해 사실을 밝히자, 그가 속해있던 두 방송사는 '직무배제'가 아니라 즉각 해고 통지를 했다. 찰리 포즈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사과했다.

"말할 수 없이 부끄럽다. 나는 때로 부적절한 행동을 했으며, 그 책임을 받아들인다. 상대와 공감하에 한 행동이라고 늘 생각했지만, 그게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만족스러운 사과와 거리가 멀지만, 적어도 그는 '뇌-신 분리'나 '내 인생' 타령은 하지 않았다. 

 동의해야 동의한 것.
 동의해야 동의한 것.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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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무대' 서기 좋아하는 한국, 성관념부터 바꿔야

그동안 몇 편의 기사를 통해, '명시적 동의법'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것은 '상대가 분명한 말로 동의하지 않으면 모두 강간'이라는 법적 기준을 의미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일상의 차원에서 성관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명시적 동의법이 발효되기 전에도, 상대가 거부 의사를 밝히는 즉시 상대는 성행위를 중단해야 했다. '강간은 상대가 거부 의사를 밝히는 시점부터 시작된다'가 '예로부터의 기준'이었다는 말이다. 이제 새 기준은 매 단계로 진행하는 과정마다 동의를 얻어야 하며, 상대는 그 동의를 어느 단계에서든 거둬들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손을 잡거나, 입을 맞추거나, 몸을 만지거나, 성관계를 하는 매 단계에서 상대방의 동의를 받아야 하며, 상대가 거절 의사를 표하는 즉시그만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간이 된다. 한국 남성들 가운데 '도중에 그만두는 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거품을 물 사람들이 꽤 있을 터이다.

이제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새 기준은 당연히 의학적 연구결과틀 토대로 마련된 것이다. '할 수 없는 것'과 '하기 싫은 것'은 당연히 구분되어야 하며,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면 사회적으로 격리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남성들이 특별히 자제력이 없는 게 아니라면, 새 기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해외에 발을 디디는 순간 '잠재적 가해자' 정도가 아니라 '현행범'으로 체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해외 공관이나 기업 주재 한국인들이 성범죄로 처벌받는 경우가 늘고 있다. 미국에 널린 유학생들도 마찬가지다. 현재 미국 1400개의 대학에서 '명시적 동의법'이 발효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인들은 '국제무대'에 서기 좋아하며, 자식을 '글로벌 리더'로 키우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여성을 '글로벌 기준'으로 배려하는 연습부터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글로벌 리더'의 꿈은 어느 순간이든 '글로벌 성범죄자'의 현실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도 세계적 흐름을 따라 강간 기준을 '항거'아닌 '동의'로 바꿔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확실히 항거하지 않으면 동의한 것'과 '동의해야 동의한 것.' 세계적 추세를 떠나, 어느 게 상식적인지 생각해 보라. 

[강간의 기준을 '항거'에서 '동의'로 바꿔야 하는 이유]
'꽃뱀론'으로 성폭력을 지지하는 당신에게
담뱃불 협박당하고, 싫다고 말해도 '강간'이 아니라고?
성범죄 18~50%가 '꽃뱀 자작극'이라고?
성폭행 피해자에게 "왜 저항 안했나" 묻는 사회
"섹스 전에 허락받는 게 말이 되냐"는 남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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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와 <미디어기호학>을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