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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도피안사 눈이 시리도록 맑은 풍경, 겨울의 풍경
▲ 철원 도피안사 눈이 시리도록 맑은 풍경, 겨울의 풍경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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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사이판이었다. 그러다 괌, 보라카이, 파타야, 발리, 오키나와로 이어지더니, 이왕 가는 거 하와이로 가자는 말까지 나왔다.

시작은 겨울 방학엔 동남아 여행이 비교적 비용이 덜 든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외여행이 난생처음인 삼 남매의 여권 발급 비용 등 추가되는 지출항목이 자꾸만 늘어갔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졌다.

"결국 비행기 타고 가서 물놀이하고 오자는 거잖아? 그럴 거면 근처 온천에 가는 게 낫겠네."

신혼여행 후 해외여행이 처음이라 들떠 있던 나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계산기 속 숫자를 보고는 하와이까지 날아간 마음을 다시 잡아 왔다. 처음 가는 해외여행에 들뜰 법도 한데 별 반응이 없던 둘째가 그런 나를 거들었다.

"엄마, 난 열두 살에 해외여행 가고 싶어. 외국에 가면 엄마, 아빠가 있어도 내가 나를 지켜야 하는데, 난 지금 외국어도 못 하고 힘도 없고 돈도 없어. 열두 살쯤 되면 될 거 같아. 그때 가자."

사이판 대신 철원으로

 출발! 한탄강얼음트레킹
 출발! 한탄강얼음트레킹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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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방학인데, 어딘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았다. 바쁜 연말 정산을 끝내고 조금 한가해진 1월, 사실은 내가 어딘가로 가고 싶었다. 지난여름 휴가로 갔던 철원이 떠올랐다.

겨울에 꽁꽁 언 한탄강 위를 걷는 얼음 트레킹 축제가 열린다는 철원. 게다가 온천도 있는 철원! 래프팅을 하며 바라본 한탄강 풍경에 감탄했던 남편도 흔쾌히 철원여행에 한 표를 던진다. 구리-포천 고속도로 개통으로 가는 길도 가까워진 터라 운전의 부담도 적다.

2018 한탄강 얼음축제 일정을 확인하고 숙소 예약에 들어갔다. 우리의 철원 여행 계획을 들은 많은 이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이 추운 날에 더 추운 데로 왜 가?"
"그래도 추울 텐데..."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답했다.

"추우니까! 이때 아니면 언제 한탄강 위를 걸어보겠어?"
"얼음 썰매도 타고요! 놀면 하나도 안 추워요!"

겨울 한살림생명공동체 캠프에서 2박 3일 동안 얼음 썰매를 신나게 타고 왔던 첫째가 거든다. 그러나 막상 여행 일자(1월 27~29일)가 다가오자 걱정이 되었다. 한반도 전역에 한파가 불어 닥쳤고, 막내의 기침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1월 26일 확인한 일기예보에서 철원의 기온은 영하 23도. 서울은 영하 16도. 게다가 30년도 더 된 단독주택에서 비닐 커튼을 치고 사는 우리에게 겨울은 늘 추운 계절. 어디나 추운 건 매한가지. 추울 거 이왕이면 즐겨보자! 남편까지 내복을 챙겨 입고 철원으로 출발했다.

여름에는 이열치열, 겨울에는 이한치한

 직탕폭포 얼음 위로 식구들이 나란히 걷는 중
 직탕폭포 얼음 위로 식구들이 나란히 걷는 중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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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하얗게 덮인 한탄강은 여름과 또 다른 풍광을 자아내고 있었다. 여행을 맞아 구입한 어린이용 아이젠을 채우고 스틱을 하나씩 쥐여준 후 고석정에서 트레킹을 시작했다. 가족단위 여행객보다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온 산악회 단체가 많았다.

삼 남매들은 산악회들의 응원과 칭찬을 받으며 트레킹 대열에 합류했다. 눈이 덮인 한탄강은 미끄럽지 않았다. 설사 미끄러져도 눈밭에서 구르는 게 재미있는 아이들은 결국 아이젠과 스틱을 집어던지고 얼음을 즐기기 시작했다.

10분이나 지났을까? 덥다고 야단이다. 영하 20도 아래로 기온이 떨어질 것을 대비해 위아래로 서너겹을 껴입었더니 나도 더웠다. 둘러보니 우리처럼 껴입고 걷는 이들이 없었다. 결국 아이들의 아이젠과 스틱, 모자, 목도리 등을 받아들었다. 아이들 뒤를 살피며 걷느라 제대로 풍경을 즐기지 못했지만 태어나 처음 걸어보는 얼음강은 겨울의 한 가운데로 인도해주었다.

한 시간 정도 걷자 얼음축제의 행사장이 있는 승일교가 보였다. 인공으로 물을 쏴 만든 거대한 얼음폭포가 우리를 반겼다. 그때 폭죽이 터지고 맑은 하늘 위로 불꽃이 터졌다. 대낮의 불꽃놀이는 처음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똥바람 알통 구보대회'의 신호탄이었다. 철원 곳곳에 걸려있던 현수막의 실체였다.

'이 추운 날 구보대회라니, 참가자들이 과연 있기나 할까?' 의문이었는데, 실제로 보니 철원 지역 군 장병들의 훈련 아닌 훈련의 현장이었다. 저들도 이한치한일까? 지자체 축제를 위한 동원의 또 다른 형태로만 보였다. '필승'을 다지는 두 개 부대의 현수막이 애처로웠다.

모든 것에 걱정이 많은 둘째는 군대 갈 걱정에 가끔 울기도 하는데, 이 추운 날 윗옷을 벗고 뛰는 장병들의 모습에 역시나 긴장을 했다. '동지섣달 꽃 본 듯이'라는 부제를 단 올해의 얼음축제와 가장 어울리지 않았다. 장병들로 즐길 수 있는 축제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2000원의 행복

 돌다리 위로 식구들이 나란히 나란히 나란히
 돌다리 위로 식구들이 나란히 나란히 나란히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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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생 처음 하는 아이스하키
 난생 처음 하는 아이스하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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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에 가면 얼음썰매와 눈썰매를 마음껏 탈 수 있다는 말에 긴 얼음길을 걸었던 아이들이 지쳐갈 때 즈음 나타난 축제 놀이마당. 평창올림픽 기념 조각들까지 더해져 더욱 풍성해진 듯했다.

흡사 봅슬레이처럼 보이는 긴 코스의 얼음썰매와 튜브 눈썰매, 컬링, 아이스하키, 볼링, 논에서 타던 얼음썰매 대여까지 다양한 놀 거리가 모두 무료로 준비되어 있었다. 고석정 주차비 2000원으로 즐기는 행복이었다. 더 이상 못 걷겠다던 삼 남매는 환호성을 지르며 썰매장으로 달려갔다.

갖가지 썰매를 타고, 평창올림픽을 맞아 어린이집에서 배웠던 겨울 스포츠를 직접 해보며 아이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았다. 편을 나누어 컬링도 하고 처음 보는 가족과 아이스하키 점수 내기도 하고. 장갑이 눈에 젖다 못해 꽁꽁 얼어붙었지만 아이들 얼굴에선 뜨거운 김이 났고 머리는 땀으로 젖었다. 즐거운 놀이의 에너지는 한파도 꺾지 못했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많지 않았다. 트레킹 중인 중장년들이 더 많았다. 50년 만에 처음 타보는 썰매라며 아이처럼 웃던 그들. 아이들을 다 키워내고 부부끼리, 혹은 친구들끼리 여행을 다니며 노후를 즐기는 모습에서 여러 생각이 오갔다. 부모님 생각도 났고, 나도 저런 날이 머지않아 오겠지, 그때가 되면 조금은 고생스러운 지금이 그립기도 하겠지 하는 이런저런 생각들.

 겨울 논
 겨울 논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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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게 오후 한때를 얼음 위에서 보내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창밖으로 빈 논이 보인다. 눈 쌓인 겨울 논을 바라보니 어린 날이 떠오른다. 지리산 자락 작은 마을에서 자란 난 겨울방학에도 늘 밖에서 놀았다. 산골 마을이라 넓은 공터가 없었는데 겨울이면 추수를 끝낸 빈 논은 아이들이 무얼 해도 되는 공터였다.

아이들을 위해 일부러 물을 받아 썰매장을 만들어 주시고 튼튼한 썰매까지 만들어주셨던 동네 어른들. 얼음 판 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고 놀았던 유년 시절의 겨울, 겨울, 긴긴 겨울. 

생각해보면 방수 스키바지도, 변변한 장갑조차 없었다. 추위에 손이 발갛게 얼어붙고 손등이 갈라졌었다. 점심 먹으러 가는 시간도 아까워 놀고 있으면 어느 집에선가 떡국이나 라면을 한 솥 끓여와 모든 동네 아이들을 먹이기도 했었다. 농사가 잠시 쉬는 시골의 겨울은 아이들을 위해 들판과 어른들의 품을 내어주었다.

그 때문일까. 아무것도 없는 빈 겨울 논을 보면 따뜻한 기억으로 마음이 가득 차오른다. 그 기억 때문에 사이판이 아닌 철원으로 향했나 보다. 아무것도 없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겨울 빈 들판과 얼음 위의 놀이 세상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 안에서 아이들과 함께 나도 아이가 되었다. 50년 만에 썰매를 탄다는 중년의 그들처럼.

여행에도 '제철'이 있다

 얼음정 복삼남매. 아이젠이 빛을 발한 순간!
 얼음정 복삼남매. 아이젠이 빛을 발한 순간!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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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아이들은 고드름만 보면 따고 볼까
 왜 아이들은 고드름만 보면 따고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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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도 나도 여유 있는 시기라 월요일 월차를 내고 하루 더 추운 겨울 속으로 들어갔다. 다리 위에서 바라보던 직탕폭포와 폭포 얼음 위로 걸어 들어가 마주한 자연은 다른 얼굴이었다. 잠시 멈췄기에 허락한 풍경 속에 겨울왕국 부럽지 않은 기억을 만들었다. 아마도 꽤 오랫동안 삼 남매에게 철원에서의 기억이 겨울 풍경으로 남아 있을 듯하다.

아직 남은 겨울, 몸에 좋은 제철 음식처럼 제철 여행을 권한다. 제철 기운을 온몸으로 받으며 한파를 즐긴 2박 3일. 돌아온 서울집이 그렇게 춥지만은 않은 건 기분 탓만은 아니겠지. 철원 한탄강에서 임꺽정이 놀았다니, 그 기운까지 덤으로 얻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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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변두리 마을에서 세 아이를 키우며 가끔 공연대본도 쓰는 극작가입니다.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