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어릴 적 꽤 넓은 다락방이 있는 집에서 살았다. 다락방은 꽤 넓어 헌책이며, 엄마가 시집올 때 가져오신 은빛 나는 궤짝이며, 곶감이나 오징어, 쓰지 않던 이불까지... 많은 잡동사니를 쌓아 놓고도 공간이 꽤 있었다.

다락방은 꿈꾸기 좋은 장소이고 숨기에도 좋은 장소다. 나는 이따금 그 다락방에 올라가 헌책을 뒤적이고 잠을 자기도 했다. 다락방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생각의 나래를 펼치기에 좋은 장소일 것이다.

다락방 이야기 페미니스트 공동에 여인연의 20년 이야기
▲ 다락방 이야기 페미니스트 공동에 여인연의 20년 이야기
ⓒ 도서출판 여이연

관련사진보기


실제로 20년간 다락방에서 치열하게 공부한 그 결과물을 70여권 이상의 책으로 펴낸 곳이 있다. 페미니스트 연구공동체 여성문화이론연구소(아래 여이연)이다. 여이연은 IMF가 나던 해인 1997년 제도권 밖 페미니스트 연구공동체를 표방하며 출발한 조직이다.

대중성이 떨어지는 페미니즘 연구공동체를 IMF가 나던, 최악의 시기에 꾸린다는 소리에 모두 고개를 내저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이연은 자기정체성을 저버리지 않고 금전적으로 휘둘릴 어떤 곳과도 타협하지 않으면서 2017년 스무 해를 맞이했다.

그들이 20년 동안 혜화동의 허름한 옥탑 다락방에서 페미니즘 담론을 생산하고 기록한 자신들의 역사를 <다락방 이야기>(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엮음)로 엮어냈다.

그들이 펴낸 책, 세미나와 강좌는 여성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만든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던 대중적 접근에는 다가가지 못한 것 같다. 강좌와 세미나 출판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문턱이 높다는 인식이 있고, 광장에서 대중을 만나는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을 소개한다.

<정신분석세미나> 팀은 자신들을 '정분난 여자들'로 명명하며 "감히 프로이트의 허파를 뒤집고 라캉의 코털을 건드리며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를 탈주시키고 크리스테바의 비체를 다듬어서 달구어진 무쇠 솥에 넣어 버무렸다. 다락방에 커다란 솥을 걸어놓고 정신분석학을 요리하기 시작" 했고 <페미니즘과 정신분석>은 "굽고 찌고 튀기고 졸여낸 첫 번째 요리"였으며, 더욱 열심히 솥을 닦고 그 안에 문화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신선한 재료들을 집어넣었다.

다락방에 모여든 여자들은 마녀들의 무쇠 솥에서 조려낸 묘약으로 드디어 여우에서 여우(여성동지)로 종횡무진 둔갑하는 변신술을 익혔다. 제도적 거식과 문화적 폭식을 오가며 변신한 이들은 낮이면 강좌를 열어 개체 수를 늘리고, 밤이 되면 수많은 텍스트들을 '먹고 문화를 마시며' 새로운 글들을 토하는 '주경야독'의 세월을 5년 동안 지속"해 <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를 출간했다. - 79쪽

자끄 라캉이나 들뢰즈,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스트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들은 치열하게 공부하며 자기들이 만난 타자를 책으로 세상에 소개한다.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을 크게 두 갈래로 본다. 첫째는 미국 유학파들이 주를 이룬 '또 하나의 문화'와 '이프'가 주축이 된 대중 지향 페미니즘 운동권이다. 이들은 성과 사랑, 여성의 사회적 인권 등에 관심을 두고 호주제 폐지를 통한 여성의 사회적 권리 투쟁,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 등을 통한 여성 몸의 해방을 목표로 활동했다. 저서도 대중적이고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대중속으로 파고든 페미니즘이다.

또 하나의 축이 바로 제도권 밖 페미니스트 연구공동체로 자기 정체성을 밝히고 출발한 여이연의 연구 활동이다. 문화라는 말이 들어있지만 문화적 접근이 아닌 학문적 연구적 모임을 이어온 단체다. 독일 유학파와 제도권에 몸 담은 학자가 주를 이룬다. 마르크스 관점의 페미니즘 이론을 연구하고 공부한 좌파적 아카데미 단체이기도 하다.

여성을 성적 도구화 하는 악습이 만연한 사회에서 성과 사랑, 정치적 신념에 철저한 자기 선택권을 주장한 이들을 가부장 사회는 '빨갱이'나 악질 페미로 규정하곤 한다,

빨갱이들은 나혜석 하고 비교되지 않는다. 우린 신여성하면 나혜석만 고작 기억한다. 빨갱이 여자들은 역사에서 강제로 망각되었으니까. 나혜석에겐 철학이 없다고 말한 정칠성, 항일투쟁하다 감방에 간 남편 임원근에게 사랑 없는 결혼은 무의미하다며 이혼장을 내민 허정숙, 모스크바 공산대학으로 간 주세죽 등등, 그 여자들의 스케일은 오늘의 여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 168쪽

우리 사회의 보수들이 지칭하는 '빨갱이'라는 단어를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자기 정체성이나 신념이 뚜렷하다는 의미이리라. 그들은 너무 전위적이고 리서치가 없다거나 현장과 가깝지 않다는 비판을 듣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여이연은 성매매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담으며 '성매매'를 '성노동'이라 지칭하여 여성단체에게도 많은 비판을 들었다고 한다. 성노동에 대해 연구하고 활동하며 자신의 몸을 실험도구 삼아 현장에 뛰어든 이들도 있다.

여이연은 2017년 다락방을 떠나 다른 곳에 둥지를 틀었다. 둥지만이 아니라 스무살을 기점으로 목표와 방향 설정에 대한 고민도 깊은 듯하다. 더 이상 그들의 강좌가 전위적이지 않고 강좌를 듣는 이들이 수도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만의 둥지에서 나와 현장과 만날 기회를 늘려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20년 한 우물을 파며 성과 사랑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페미니즘 담론을 생산해 낸 그들의 건승을 빌어본다. 건강한 청년에서 장년으로 웅숭깊은 지혜를 지닌 노년으로 그 발걸음을 이어가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다락방 이야기>/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엮음/ 도서출판 여이연/ 16,000



‘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더보기

시민기자 가입하기

© 2018 OhmyNews오탈자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