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OO을 보고 아쉬웠던 이유'는 작품에서 아쉬웠던 부분을 지적하는 코너입니다. 상대적으로 주관성이 강하며, 개인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작품의 스포일러가 많으니, 다음과 같은 독자가 글을 읽으면 좋습니다. '작품을 관람했고, 기분이 좋지 않은 관객', '주변의 평가가 좋지 않아 작품을 관람할 생각이 사라진 관객', '작품이 비판받는 이유를 알고 싶지만, 굳이 영화관에서 보고 싶지 않은 관객' - 기자 말

 영화 <염력>의 한 장면.

영화 <염력>의 한 장면. ⓒ NEW


<염력>(2018),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일 것이다. 이 작품은 명백하게 컬트 영화다. 컬트 영화인 동시에, 히어로 영화이고, 코미디 영화이다. 여러 장르들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이 영화는 이렇다할 정체성이 없다. 어느 것도 될 수 있다는 말은, 어느 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정체성이, 어쩌면 요즘 한국 사회를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비트코인 열풍이 한창이다. 비트코인은 '블록체인'이라 불리는 것으로 신뢰성을 보장 받는다. 그 신뢰성은 서로가 서로의 '가계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즉 서로가 서로의 통장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그 말은 서로가 서로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으로도 치환될 수 있다. 전세계에서 유독 한국의 비트코인 열풍이 과한 건, 그러한 정체성의 부재와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어느 하나의 의견을 공유하고 있는 지점이 있지만, 그 지점은 다시금 수없이 많은 갈래로 퍼져 나간다. 그 속에서 각기 다른 의견을 가진 개인은, 어떻게든 공통분모를 찾아 자신에게 기록하고자 애쓴다. 마치 비트코인처럼, 그 기록이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것도 말할 수 있는 자유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난 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 2017년 말과 2018년 초는 못다 한 말, 입안에 맴돌던 담론을 하염없이 쏟아내는 시기다. 그런데 그렇게 할 말이 많음에도, 우리는 정체성의 부재를 하염없이 느끼고 있다.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이 우리 마음 속에 있다.

최근 한국 영화는 그러한 정체성을 확인하려 하는 듯하다. 그 공허감을 모두가 확실하게 공감할 수 있는 소재로 풀어낸다. <강철비>나 <1987>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원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을 하고 나서도 마음 속 어딘가에 찝찝함이 남아있다. 원래 공허란 절대 채워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메시지적으론 전혀 컬트가 아닌 영화

 영화 <염력>의 한 장면

영화 <염력>의 한 장면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염력>은 그 공허에서 나온 컬트처럼 보인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주된 소재인 '염력'은, 우리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소재이기 때문이다. 앞뒤 설명을 잘라먹고 던져진, 염력이라는 '능력'이다. 그로인해 얼핏 보아선 되도 않는 것으로 영화를 이끌어가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우리의 공허를 채우려 한다는 점으로 보면, 어느 영화 못지 않게 '정상'적이다. 즉 메시지적으론 전혀 컬트가 아니다.

이 영화가 공허감을 채우는 방식은 아주 단순하다. 그런 면에서 기존 한국 영화의 안티 테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위의 영화에서 우리는 힘든 일을 겪었고, 그것에 대항하여 힘들게 살아갔다. 어려운 만큼 어렵게 풀어내야 보람이 있다는 교훈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토록 부르짖어야 비로소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염력>은 염력이라는 초현실적인 힘을 통해 '쉬운 길'을 걸어간다. 어쩌면 그 쉬움을 상상하고 꿈꾸게 된 게, 우리의 공허가 '현기증'으로 바뀌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랜 굶주림에 시달린 위는 갑작스레 들어온 음식물을 모두 토해낸다. 영양실조를 회복하기 위해선 점진적으로 식사량을 늘려가야 한다. 최근 나온 한국 영화는 그렇게 우리를 위로했다. 점진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했기에, 음식을 눈앞에 두고 조금씩 먹어야 했으니 힘들었다. 그러나 <염력>은 그것을 참지 못해 폭식했다. 폭식했기에 확실히 음식(메시지)이 역류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염력>을 보며 완성도를 지적하게 된다면 그 때문이다.

이른바 안티 테제다. 우리는 <염력>이 왜 굳이 그런 힘든 길을 택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에 모든 정체성을 혼합해 넣은 이 영화는, 악당의 입을 빌려 "한국형 히어로"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는 마블의 영화에서 영웅을 보았고, <염력>은 그 영웅에게 몰입한 우리에게 '한국형'이라 자기소개한다. 굳이 '한국형'이라 사족을 붙인 건, 마블 영화의 영웅과 어느정도 괴리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괴리감은 마치 이 영화가 '히어로 영화'의 안티테제라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영웅이면 영웅이지 딱히 구분지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미쳐버린 상황, 망상이 해결책이 되기도 한다

 영화 <염력>의 한 장면.

영화 <염력>의 한 장면. ⓒ NEW


영웅. 영웅이 아니다. <염력>에는 히어로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지만 히어로의 반대가 '빌런'은 아니다. 히어로의 반대는 '안티 히어로'다. 안티 히어로는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이 대표적이다. <염력>의 주인공은 초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배트맨도 초현실적인 돈(천문학적인...)이 있으나, 고담 시의 현실을 타파하지 못한다. 각각 영화의 두 영웅은 '현상'을 변화시킬지언정 '현실'을 변화시킬 힘이 없다.

하지만 배트맨이 법의 영역 밖으로 사라져버린 것과는 다르게, 염력의 주인공은 순순히 법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배트맨이 사라졌던 건 허황된 진실이 실추된 거짓보다 아름다웠기 때문이고, 염력의 주인공이 구속된 건 허황된 진실이 실추된 거짓보다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같은 의도의 행동이지만 다른 환경이 그들의 발자취를 판가름한 것이다. 그들의 삶과 명예를 실추시킨 거짓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주인공이 그토록 '허황'되다 말했던 진실, 회사를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현실'도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어느 한쪽이 정말로 아름다웠다는 뜻이 아니라, 둘 다 좋은 선택지가 아님에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는 '사실'만이 있다.

사실, 현실, 현상. 모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당연히 '있는' 것으로 여기지만, 이젠 정말 '실재'하는지를 되묻고 있다. 그 실재에 대한 물음이 아주 투명한 무언가로 나타난다. 염력은 그런 힘이다. 허공에 휘휘 휘둘러지는 주인공의 손은 마치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같다. 경제용어로서의 의미를 제쳐두고, 이름 그대로 말이다.

속뜻을 포기하고 겉뜻만 읽어내려는 그 농담은, 영화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두들겨 패고 싶다는 것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사회에 느끼는 병폐를 곧이곧대로 표현해놓고, 아무런 이해관계나 개연성 없이 두들겨 패버리는 <염력>의 주인공은 우리의 <망상 대리인>이다. 공교롭게도 이것은 연상호가 존경하던 곤 사토시 감독의 작품 이름이기도 하다. 상상이 과해지면 망상이 되지만, 모든 것이 미쳐버린 상황에선 그 망상이 좋은 해결책이 되기도 한다. <염력>은 그런 영화다. 도피로서의 망상이 아니라, 해결책으로서의 망상이다. 

영화 연상호 염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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