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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선 어땠니?"
"수학이 빵점이야."
어머닌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널 이해 못 하는 게지." 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 로맹 가리 <새벽의 약속> 민음사. P20)


로맹 가리 어머니에게,

안녕하세요. 저도 당신처럼 아들 하나를 둔 엄마입니다. 제 아들은 이제 스무 살이 되었지요. 당신 아들 로맹 가리가 쓴 소설 <새벽의 약속>을 최근에 다시 읽게 되어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묻고 싶은 것도 있고 고마운 것도 있었습니다. 당신 아들이 나이 44세에 이르러 어머니인 당신과의 삶을 돌아보며 쓴 자전적 소설이 이 책입니다.

[새벽의 약속] 책 표지
▲ 새벽의 약속 [새벽의 약속] 책 표지
ⓒ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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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작년에 북클럽 문학의숲 친구들과 처음 읽었고, 이번에 이 책을 주제로 강연회를 들으며 다시 읽었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로맹 가리의 절절한 사모곡에 감동하여 얼마나 많이 밑줄을 그으며 읽었던지요. 이번에 두 번째로 읽었을 때는 교육학적 관점에서 어머니로서의 당신에 대해 더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너는 프랑스의 대사가 될 거야."

당신은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주술처럼 이 말을 반복했지요. 당신 아들은 정말로 프랑스의 대사가 되었습니다. 또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고요. 당신이 어린 아들에게 예언하듯이 말했던 모든 것들이 그 이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당신은 참 대단합니다.

싱글맘인 당신은 1914년에 로맹 가리를 낳습니다. 원래 이름은 로맹 카시유(Roman Kacew)였다지요. 그는 평생 참 많은 이름을 가졌더군요. 여러 사람의 삶을 살고 싶었던 욕망이었을까요?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서일까요. 당신 아들의 많은 이름 중에서 에밀 아자르도 유명하지요.

이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을 써서 콩쿠르 상을 두 번 받았으니까요. 당신은 라트비아에서 아들을 낳고 아들의 교육을 위해 폴란드로, 그리고 다시 프랑스로 이주하지요. 유랑하는 가난한 이주민의 삶을 살면서도 아들을 위해 억척같이 살아냈더군요.

당신 아들은 당신 바람대로 입지전적인 삶을 삽니다. 이주민인 당신에게 이상적인 나라였던 프랑스 파리 법과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장교 양성과정을 마친 다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유 프랑스 공군에 입대합니다. 종전 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받지요. 이주민의 아들이 프랑스의 훈장을 받는 거지요. 요즘 우리나라에도 많은 이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예를 들어 베트남 여성의 아들이 무궁화 훈장을 받는 걸 상상해봅니다. 대단한 일이지요.

당신 아들은 이등 대사 서기관으로 프랑스 외무부에서 근무하였고, 이후 프랑스 외교관으로 불가리아, 페루, 미국 등지에 체류합니다. 중학생 시절부터 꿈꾸었던 작가의 길, 그는 <하늘의 뿌리>로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콩쿠르 상을 수상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자기 앞의 생>으로 다시 한번 같은 상을 받고요.

영화 [새벽의 약속] 트레일러 장면
▲ 영화 [새벽의 약속] 한 장면 영화 [새벽의 약속] 트레일러 장면
ⓒ 줄스 다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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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며느리, 그러니까 로맹 가리의 아내는 참 멋진 배우더군요. 진 세버그. 그녀는 흑인 인권 운동에 앞장섰는데 그녀의 죽음에 FBI가 개입되었다는 것은 나중에 밝혀졌지요. 슬프게도 당신 아들은 66세에 권총 자살로 불꽃 같은 삶을 마감합니다.

<새벽의 약속>을 읽으며 알게 되었습니다. 로맹 가리의 삶은 당신이 만들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당신은 아들의 교육을 위해 '올인'합니다. 보니 요새 종종 듣게 되는 헬리콥터 맘 같더군요. 이 말 처음 들으시죠? 헬리콥터처럼 자녀의 곁을 맴돌며 성인이 된 자녀까지도 챙겨주는 엄마를 그렇게 부르더군요.

요즘 대학교에는 자녀의 수업 출결뿐만 아니라, 학점에 대해서도 교수에게 따지는 엄마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은 어린 아들의 사교육을 위해 온갖 공부를 다 시켜보았더군요. 음악적 재능이 없는 데도 바이올린 교습을 시키고, 춤도 그림도 시켰다지요. 아들이 결국 문학에 안착할 때까지 이것저것 시켜본 거지요.

저는 아들에게 7살 무렵 피아노랑 태권도를 다니게 한 게 전부였어요. 이후엔 아들이 어디 학원 다녀보고 싶다면 다니게 하고, 아니면 말고. 그러니 사교육비가 거의 들지 않았지요. 이제 다 키우고 나니, 조금은 더 다양하게 권해볼 걸 그랬나 싶기도 해요. 고등학교 때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아들이, 왜 한 번도 미술학원 보낼 생각을 안 했냐고 묻더군요. 그래도 전 당신처럼 아이 사교육을 시키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나쁘게 표현한다면 당신은 극성 엄마였어요. 아들을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했죠. 지금 관점으로 보면 그다지 좋은 엄마가 아닐지도 몰라요.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저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그러한 맹목적인 희망과 될 거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어찌 살아갈 수 있었겠어요.

그 날 벌어 그날 먹는 극빈의 삶에서, 아들만은 품위를 지켜주고 꿈만 쫓아 살게 한 당신. 당신은 위대한 어머니입니다. 당신의 희생과 헌신으로 로맹 가리는 오늘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그 엄청난 추동력은 아들을 절망조차 하지 못하게 했더군요.

"어머니의 용기 안에 있는 어떤 것이 내게로 옮겨와, 내 안에 영원히 남았다. 지금도 어머니의 용기가 내 안에 깃들어 살며, 절망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내 인생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 로맹 가리 <새벽의 약속> 민음사. P283


이 책을 같이 읽은 제 친구들 중에 누가 그랬어요. 그래 보았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냐고. 당신 아들은 66살에 자살했지요. 저는 자살로 마감된 삶이라고 실패이고 나쁜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이 불어 넣어준 삶에 대한 희망과 용기가 없었다면, 그는 어쩌면 이미 젊어서 죽거나 (전쟁 중에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지요), 66년 동안의 빛나는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짐작해 본다면, 삶에서 이룰 것들은 다 이루고, 살아볼 만큼 살았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들을 위하여 당신은 엄청난 거짓말을 합니다. 당신의 죽음을 속인 것이지요. 저는 이 대목을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신 아들이 받은 충격은 어땠을까요. 당신은 아들이 절망하지 않도록, 무조건 힘을 내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당신의 죽음 이후에도 꾸준히 편지를 보냅니다. 죽기 전에 미리 써놓았던 편지들을 친구에게 부탁해서 드문드문 보내게 한 것이지요. 정말 그 편지들 덕분에 아들은 '살아냅니다'.

로맹 가리 모습
▲ 로맹 가리 로맹 가리 모습
ⓒ Calle del Or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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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은 스물다섯 청년이 말하더군요. 당신이 나쁘다고. 내 어머니가 나에게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 절망할 것이라고...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혈육인 아들에게조차 죽음을 알리지 않고 세상을 뜨다니, 그건 너무 쓸쓸한 일 아닌가요? 그것이 당신이 아들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나요? 당신에 비하면 아들을 대하는 나의 사랑은 참 보잘 것 없게 여겨집니다.

내가 살면서 아들을 무조건적으로 믿어준 적이 있던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다시 읽은 날엔 아들에게 더 좋은 어머니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지요. 그러나 웬걸요. 그 다음 날 아들과 언쟁을 했답니다! 이 무슨 아이러니냐고, 옆에서 남편이 혀를 끌끌 찹니다.

그래도 당신과 당신 아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남겨 준 유산을 생각합니다. 당신은 아들에게 살아낼 용기와 희망을 단단히 심어주었지요. 당신 아들은 열정적으로 살아서 주옥 같은 문학 작품들을 남겨주었고요. 당신 덕분인지 몰라도, 이 책 <새벽의 약속> 뿐만 아니라 <자기 앞의 생>을 봐도 인간에 대한 따뜻함과 선의, 희망의 기운이 가득합니다.

'운명에게 한 형태와 의미를 주고자 애쓰는 모든 인간적 손을 질투하는 그 신들은 내 몸이 피 흘리는 하나의 상처에 지나지 않게 될 때까지 내게 악착스레 달라붙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내 사랑에 대해 전혀 무지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 탯줄을 자르는 것을 잊어버렸었던 것이고, 그래서 나는 소생했다. 내 어머니의 의지와 생명력과 용기가 계속 내게 흘러와, 나를 먹여주었던 것이다.' - 로맹 가리 <새벽의 약속> 민음사. P389


당신 아들이 그렇게 썼더군요. 신들이 탯줄을 자르는 것을 잊었다고. 그래서 당신의 의지와 생명력과 용기를 계속 먹고 살았다고. 당신은 참 훌륭한 어머니였습니다.


새벽의 약속

로맹 가리 지음, 심민화 옮김, 문학과지성사(2007)


태그:#로맹 가리, #새벽의 약속 , #문학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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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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