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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청소년개척단'을 조직한 박정희 정권은 부랑자, 고아들을 충남 서산에 가뒀습니다. 바다를 막아 땅을 일구게 했습니다. 이들과의 강제 결혼을 위해 부녀자도 끌려왔습니다. 보상 대신 그들 앞에 놓인 것은 20년 상환으로 갚아야 할 빚 뿐. 대부업자는 국가입니다. [편집자말]
상경한 서산개척단... 청와대 앞에서 터진 '눈물' 서산개척단 김세중씨(맨왼쪽)가 31일 오후 청와대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서산으로 끌려와 강제노역에 동원된 당시 목격담을 말하다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오열하고 있다. ⓒ 남소연
"청와대 있는 데라 덜 추운겨."
"청와대는 무서운 데 아녀?"
"잉? 이제 국민이 왕이잖여?"

"청와대 앞에만 가도 잡아가는 거 아녀"라며 밤잠을 설친 이들이 1월 31일 청와대 분수광장 앞길에 섰다. '서산개척단' 전광판을 내건 40인승 관광버스 두 대에서 85명의 노인들이 우르르 나왔다. 지팡이를 짚거나 앞서 내린 이의 손에 의지하면서 광장으로 향했다. 전날 흩뿌린 눈이 염화칼슘과 뒤섞여 노인들의 발 사이로 사박거렸다.

박정희 시대, '갱생의 보금자리'로 포장된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강제 노역과 강제 결혼을 당한 서산시 인지면 모월3리의 개척단원들이 광장에 자리를 잡았다. 그 옆, 개척단원들이 판 땅을 사 죽도록 개간한 후 나라에 빼앗긴 주민들이 빈 곳을 채웠다. 날이 풀렸다는 기상청 예보가 무색하게 발가락이 자동으로 움츠러드는 매서운 날씨였다.

'정부는 인권 유린하고 강제 노역시킨 내 청춘을 보상하라'
'정부는 사기치고 강탈한 내 땅을 돌려 달라'
박정희판 군함도 서산개척단의 '눈물' 서산개척단 성재용씨가 31일 오후 청와대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박정희판 군함도 서산개척단의 진실을 들려주며 억울함을 호소하다 눈물훔치고 있다. ⓒ 남소연
붉고 푸른색으로, 비명지르듯 적힌 펼침막과 달리 카메라 앞에 선 노인들은 대부분 긴장 가득한 얼굴이었다. 연사로 나선 단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하나같이 손을 떨었다.

56년을 묵힌 개척단 문제를 끊임없이 공론화 하고자 노력했던 정영철(77)씨는 "긴장 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눈물부터 쏟았다. 정씨는 "수 십 년 동안 품고 있던 걸... 이렇게 기자회견 하니까"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서산개척단 단원과 모월리 주민 80여 명이 31일 청와대 앞에서 '서산개척단 진실규명 기자회견'을 열었다. ⓒ 조혜지
기자회견이 시작되자 그의 말은 길고, 또 빨라지기 시작했다. 사회자가 막기 전까지 그는 울분을 멈추지 않았다. 정씨는 개척단에 처음 온 1961년을 떠올리며 "(감시원들이) 우릴 사람으로 만든다는데, 그럼 우리가 언제 사람이 아닌가... 속으로만 생각했다"면서 "끌려 올 이유가 없다고 하면 맞아 뒤진다"고 말했다.

정씨는 특히 민정식 단장 등 당시 단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강제결혼을 시킨 일명 "윗대가리"들과 개척단 사업을 기획하고 지시한 당대 정부를 향해서 분노를 쏟아냈다.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살렸다는디. 살린 놈들은 살렸겄지. 죽인 놈들은 한없이 죽였단 말여유. 56년을 방치했다고. 인권 유린한 값을 줬나. 밀가루도 미국서 주는 걸... 생명을 유지할 만큼만 줬어유. 그 세월을 얼마나 선전했는지 압니까."

"소원 풀었다"면서도 "대통령님이 봐줄까?"
멈추지 않는 눈물... 청와대 앞에 선 서산개척단 서산개척단 정화자씨가 31일 오후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희판 군함도 서산개척단의 진실을 문재인 정부가 밝혀주길 호소하다 눈물 훔치고 있다. ⓒ 남소연
정씨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하자, 강제 결혼 피해자인 정화자(75)씨도 따라 눈물을 찍어냈다. 그는 스무 살 때 모월리로 끌려와 2개월 뒤 모르는 남성과 "하기 싫은 결혼"을 당했다.

정씨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당시 정부와 언론이 개척단에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을 '재생 대상'으로 낙인찍은 사실을 고발했다. 지난 2017년 9월 서산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진행할 때만해도 "말도 하기 싫다"며 난색을 보였던 그였다. 정씨는 일정을 끝낸 뒤 버스 안에서 기자와 만나 "기분 좋다"고 말했다.

"밤에 응급실도 가고 몸이 많이 안 좋아. 지금도 아파. 하고 싶은 얘기 끝도 없지만 꼭 하고 싶은 얘기는 했어. (서산개척단에 선전용 보도로) 윤락 여성 왔다고 알고 있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닌데. 자식들도 이제 방송을 보면 우리 엄마가 그렇게 힘들었구나, 할 거 아녀. 소원 하나 풀었어."

1962년 개척만 하면 땅을 받는다는 말에 속아 모월리를 찾은 성재용(75)씨는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감정이 복받쳐 말을 못했다"고 했다. 성씨는 "서울은 한 10년 만인데, 청와대는 처음 와 본다"면서 "이렇게라도 얘기하고 하소연이라도 하니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눈물이 가득찼다.
박정희판 군함도 서산개척단의 '눈물' 서산개척단 성재용씨(뒷줄 가운데)가 31일 오후 청와대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박정희판 군함도 서산개척단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제보한 류일용 KBS <1박2일> PD(앞줄 왼쪽)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 훔치고 있다. ⓒ 남소연
이날 현장에는 서산개척단 사건의 영화화에 수년간 매달린 이조훈 다큐멘터리 감독에게 이 사실을 처음 제보한 서산 출신 KBS <1박2일> 류일용 피디가 참석해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접한 모월리의 아픔을 전하기도 했다.

류 피디는 "나고 자란 곳에 아픈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커서 아버지와 개척단 어르신이 얘기하는 것을 듣고 알게됐다, 큰 충격이었다"라며 "희망공원 앞에 논이 있는데, 개척단원들이 묻힌 곳임을 알았을 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구나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이야기가 알려지는 게 더 늦춰지면 한 분 두 분 돌아가시면서 더 묻힐 거 같아 고향 갈 때마다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라며 "이 이야기를 빠른 시일 안에 해결했으면 하는 바람에 이 자리에 섰다"라고 전했다.

익숙한 '외면' "우리 무서운 사람덜 아녀유"
서산개척단이 문 대통령에 보내는 서한 서산개척단 정영철씨가 31일 오후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희판 군함도 서산개척단의 진실을 문재인 정부가 밝혀주길 호소하며 문 대통령에 보내는 서한을 들어보이고 있다. ⓒ 남소연
"앞으로가 더 걱정이여. 이렇게 하소연을 다 했는데 효과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나도 나지만 정화자 형수 같은 아지매들. 한이 말도 못하는디 실망 줄까봐. 우리가 말하는 게 실제가 아니라고 믿을까봐 무섭고. 큰 마음 먹고 한 건디.

이걸 끝까지 해서 대통령 답도 받고 해야하는디. 인터넷 무슨 저 양반들, 네치즌(네티즌)인가 촛불 하는 젊은 사람들이 (청와대 청원하는 걸) 도와줬으면 좋겠어. 대통령이 우리 심정 백분지 일만 알아주면 타결이 난다고 보니께. 틀림없이 대통령이 봐줄 거여 아마."

정씨는 "속 시원하다"면서도 자신들의 목소리가 정부에 전달이 되지 않을까봐 내내 두려워하고 있었다. 단원들은 관할 경찰 관계자에게 호소문을 전달하며 몇 번이고 "답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반세기를 외면받아 온 고발자들의 불안이었다.

85명의 노인들은 기자회견을 마무리하며 모두 청와대 쪽으로 몸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합창했다. 수신인은 "존경하는 문재인 대통령님"이었다. 개척단원에게 토지 가분배증을 샀다가 국가가 토지를 국유화하는 바람에 함께 피해를 입은 김세중씨가 연호를 이끌었다. "목소리가 요것 밖에 안 나와?" 타박도 섞였다. 
문 대통령에 보내는 서한 받아든 종로서 팀장 서산개척단 정영철씨 등이 31일 오후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희판 군함도 서산개척단의 진실을 문재인 정부가 밝혀주길 호소하며 문 대통령에 보내는 서한을 전달하고 있다. 이 서한을 받아 든 종로경찰서 류시경 안전팀장(왼쪽)은 청와대 비서실에 전달하기로 이들에게 약속했다. ⓒ 남소연
김씨는 이날 낭독한 서산개척단 호소문에서 문 대통령과 현 정부에게 서산개척단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그는 "촛불을 민심으로 출범한 문재인 대통령님께 고하여 억울함을 해결해 주십사 한다"면서 "내 땅이라 생각하고 갯벌을 개척한 땅을 정부가 강탈해 비싸게 다시 되팔아 먹는 파렴치한 범행을 자행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명 좀 해주고 가유."
"우리가 서산에서 왔는데요... 우리가 땅을 다 일궜는디..."

호소문은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도 울려 퍼졌다. 단원과 주민들이 광화문 교보생명 앞 도로에서 진상규명과 피해 보상을 위한 서명대를 차리고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았다. 팔을 뿌리치거나 그대로 외면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나쁜 사람들 아녀요!"
"우리덜 너무 억울해서 왔어요! 서명 좀 해주세요!"

개척단원인 김유희(72)씨는 외면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더욱 목소리를 높이며 서명에 열을 올렸다. 김씨는 "우리는 해달라믄 다 써줬는디 여기는 잘 안 해주네"라고 아쉬했다. 간간히 김씨의 팔에 붙들려 온 이들과 외국인들이 서명에 이름을 올렸다.

호소문 낭독을 끝낸 김세중씨에게 마이크를 넘겨받은 정영철씨가 쭈볏쭈볏 입을 열었다. "목이 메이서 못하겠다"면서도 그의 말은 또 길어지기 시작했다. 왈칵 다시 눈물이 터졌다. 

"서명 좀 해주쇼. 사랑하는 서울 시민 여러분. 멀리 서산에서 왔어유. 56년 한 풀 길이 없어 이리 찾아왔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서명을 좀 해 주십시오. 학생들 서명해주고 가. 잉?"
서산개척단 피해자 의견 구하는 이조훈 PD 박정희판 군함도 서산개척단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다큐를 제작하고 있는 이조훈 PD가 31일 오후 청와대 앞에서 서산개척단 피해자들의 의견을 듣고 있다. ⓒ 남소연
태그:#박정희, #서산개척단, #인권조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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