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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페미니즘이 화두로 떠오르며 나는 주로 두 부류의 남성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판하거나 혹은 성찰하거나. 전자의 유형이 여성주의를 학습하고 이에 기반해 사회의 젠더 문제를 비판했다면, 후자는 자신도 모르게 저질렀던 일상 속 성차별을 고백하고 참회했다.

이는 성소수자 이슈에 있어서도 비슷한데, 내가 커밍아웃을 하면 많은 경우 사람들은 소수자 혐오를 비판하거나 혹은 무지했던 자신의 지난 날을 용서를 구하듯 이야기 하곤 했다. 처음에는 반가웠고 그 다음에는 익숙해졌지만 어느 날 부터는 마뜩치가 않아졌다.

특히나 후회의 경우가 더욱 그랬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고 누구나 잘못은 저지를 수 있다. 내가 드는 생각은 '그래서?'였다. 그래서, 도대체 나에게 그 이야기를 왜 하는 걸까? 뭘 증명 받고 싶은 것일까.

어쩌면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비판이든 성찰이든 그 정도의 지점에 이르기까지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노력은 상상 이상의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시기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사실 누군가의 혐오나 폭력을 지적하는 것은 매번 시험대에 오르는 일과 같다. 특히나 요즘처럼 안 힘든 사람 없는 시기를 사는 때에는 더욱 그렇다.

누구를 마주하건 술 몇 잔만 들어가면 모두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행을 읊는다. 노동, 주거, 관계 심지어 생계까지. 그런 사람들이 '난 동성애자들이 자기들끼리 조용히 살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했을 때 장광설은 풀기는커녕 각을 세우기도 주저된다. 상황이 이러니 자신이 저지른 일이 옳지 않다는 것만 인식해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인간의 조건>에서 나를 붙든 문장

한승태 작가의 <인간의 조건>
 한승태 작가의 <인간의 조건>
ⓒ 시대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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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비슷한 고민이 다시 들었다. 한승태 작가의 <인간의 조건>을 읽은 이후였다. 이 책은 꽃게잡이 배의 선원, 돼지 농장의 축사 관리인, 비닐하우스 농장의 보조 인력 등 몸은 고되고 노동 환경은 열악한데 돈은 되지 않는 일을 직접 체험한 작가의 에세이다. 표지에 적힌 홍보 문구처럼 그야말로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나 다름 없다.

지은이가 서문에서 책의 몇몇 대목에 허구가 섞여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전부 지어낸 이야기는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충격을 준다. 책의 마지막장에 언급된 '불법 정상화'가 얼마나 끔찍한 지옥을 만들어 냈는지 전하고 싶지만 인용할 대목이 한두 곳이 아니기에 직접 읽어보기를 권한다. 저자가 말하듯 '동시대적인 생활 수준'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매우 소수임을 알게 된다.

눈이 휘둥그래질 이야기가 많은 책이었지만 개인적으로 계속해서 떠올랐던 부분이 있다. 지은이가 편의점과 주유소를 돌며 서비스 노동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불행히도 그런 분야의 일이 대부분 그렇듯 저자는 손님들의 폭력이나 다름 없는 갑질과 이를 감내하는 감정 노동에 시달린다.

그리고 점점 탈진해가던 그는 밥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서빙 중이던 국수 국물이 바지에 튀는 사고를 겪는다. 지은이는 머리 속으로는 괜찮다는 말을 떠올리지만 그의 입에서는 반사적으로 욕설이 튀어 나간다. 종업원이 얼굴이 빨개져 눈물을 흘릴 때까지 욕을 하고 나서야 그는 기분이 나아짐을 느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은 우울한 경험이었다.'


과연 그 분노는 불가항력적이었을까?

그는 왜 우울했을까?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이전에 저자는 이름 없는 순교자였고 손님은 합법적인 악마들이었지만 그 사건 이후로는 순교자인 동시에 박해자도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원래 그는 감정노동의 일방적인 피해자였지만 이제는 동시에 가해자 역할까지 한 셈이다.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자신이 욕설을 한 일이 축적되어 있던 화를 분출시키는 것과 다름없었다고 말한다. 서비스 노동직에 있으면서 갑질을 겪을 때마다 쌓인 분노 말이다. 그것이 터져 나오는 게 얼마나 강력했던지 저자는 스스로가 불가항력적인 존재와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나름 설득력이 있는 분석이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하필 그날 그 종업원에게 그랬을까. 지은이는 자신이 식당에 간날 주인 아저씨가 아니라 그의 딸이 서빙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만일 국물을 흘린 사람이 그보다 어린 여성이 아니라 식당의 소유자이자 보다 나이가 많은 남성이었다면 같은 반응을 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 나를 자극했던 것은 그녀가 무방비 상태라는, 내가 뭐라고 지껄이건 잠자코 있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안하무인으로 사람을 막대하고 갑질을 하는 모든 이들이 불행한 사연을 가진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감정 노동으로 고통을 겪은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화를 전가하지 않는다. 그가 그렇게 할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그냥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였다. 연령, 성별, 손님과 노동자라는 지위 차이가 주는 권력이 있는 자리.

지은이가 보인 분노가 그의 말처럼 '불가항력적'인 것이 되려면 그것은 이 모든 조건이 거꾸로인 상황에서 표출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가 보인 반응이 감정적인 것은 맞지만 그 이전에 저자는 분명히 판단했고 선택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짐작만이 가능할 정도로 옅게 다뤄질 뿐 분명하게 언급되지는 않는다.

가해자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그가 이 사실을 인정하고 명백히 말하는 순간 책임이 발생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선택의 책임, 자신의 욕설로 발생한 누군가의 상처를 복구하고 사과를 표해야 하는 책임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이 온전히 사회적 결함으로 발생한 악순환이 되어 버린다면 그럴 필요는 없어진다.

그는 폭력을 저질렀지만 잘못의 원인에서 완전히 벗어나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지은이가 자신이 의도치 않게 박해자가 되었다며 우울감을 토로하고, 그 정도로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고 자신이 과도했음을 이야기 하는 와중에도 욕을 들은 사람에 대한 미안함은 언급되지 않는다. 가장 심란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면피를 지적하기에 이미 그의 삶이 무척이나 괴롭고 버겁다는 점이다.

어쩌면 내가 성찰과 참회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 앞에서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던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저자의 인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건, 그날 눈물이 떨어질만큼 욕을 먹었던 사람이 느꼈던 치욕과 모멸은 여전할 것이다.

자신이 기득권자이자 차별하는 사람임을 아는데 얼마나 치열한 성찰과 반성의 과정이 있었든 간에, 이전에 벌어진 일로 상처를 받았던 사람이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는 누구도 모른다. 혹은 나에게 혐오 발언을 내뱉었던 이들이 어디에서 '나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이제는 잘못인 걸 알아'라고 이야기 하고 다닐지 누가 알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가해자가 무슨 이유로 그런 일을 했고, 이후에 어떤 사람이 되었고,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관심도 없다. 단지 그 사람이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에 어떻게 응답할지가 궁금하다. 그것이 꼭 나를 향해서가 아니어도 좋다. 방법은 여러가지다.

직접적인 복구이건(피해자를 찾아가 석고대죄를 하던지) 다른 이들에 의해 유사한 상황이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건 하다 못해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돕는 것이건 말이다. 나는 그것이 내가 왜 그랬고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를 구구절절 이야기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이야기 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 말이다. 굳이 누군가가 심란함을 뚫고 책임을 직면하거나 이행하기를 요구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도 일이다.


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시대의창(2013)


태그:#인간의 조건, #책임, #의무, #피해자, #가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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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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