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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처럼 혹독한 날씨가 몇 주째 이어지고 있다. 신기한 건 이런 맹추위에도 나무들이 움을 틔우고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거다. 출근길에 매일 만나는 매화나무에 몽우리가 맺힌 걸 보고 이 추위에 어쩌려고 저러나 싶다가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이건 매화나무만의 방식인 거다.

버드나무에게는 버드나무의 생존방식이 있고, 떡갈나무엔 떡갈나무의 방식이 있으며, 쇠뜨기에게는 쇠뜨기만의 방식이 있다고 식물학자 호프 자런은 이야기한다. 26살에 교수가 되어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풀브라이트 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유일한 여성 과학자이자 2016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린 호프 자런.

 <랩걸> 책 표지
 <랩걸> 책 표지
ⓒ 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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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도면 알파걸(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첫째가는 여성- 편집자말) 중에서도 최고의 알파걸 아닐까. 그런데 이런 화려한 타이틀 뒤에 숨은 이야기가 샤워는 2주일에 한 번 정도 하는 의식이 되고, 아침 식사와 점심은 책상 밑에 쌓아 둔 영양 음료 한두 캔으로 때우기 일쑤이며 심지어 세미나에 참석해서는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를 감추기 위해 반려견의 간식용 뼈다귀를 씹어야 하는 거라면 어떨까?

<랩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아래 <랩걸>)은 제목 그대로 삶의 대부분을 실험실에서 보낸 여성과학자 호프 자런의 자전적 에세이다. 만약 <랩걸>이 여성과학자의 성공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읽다 덮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호프 자런은 자신의 빛나는 성공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과학을 선택한다는 것은 과학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의 집, 다시 말해 안전함을 느끼는 장소를 내게 제공해준 것이 과학이었다." <본문 33쪽>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뛰어놀고 엄마의 정원에서 나무를 가꾸던 소녀는 <랩걸>을 통해 씨앗이 땅 속에서 기다리듯이 자신의 실험실을 갖고 과학자로 성장하기까지 길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을 아주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호프 자런에게 과학이란 자신을 살게 하는 힘이자 안심할 수 있는 집과 같은 것이었기에.

식물의 삶에서 인간의 삶을 통찰하고, 식물의 성장 과정을 통해 과학자로 성장해 가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하는 호프 자런의 문장은 매우 매혹적이다. 과학자의 언어답게 정확하고 사실적이면서도 철학적이고 섬세하다.

아버지와 같아지고 싶었고, 엄마의 연장이어야 했던 실험실 소녀 호프 자런.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는 호프 자런의 멋진 말을 떠올리며 차가운 날씨에도 몽우리를 맺고 있는 매화나무를 응원한다.

소위 돈 안 되는 학문에 인색한 건 미국도 똑같아

문재인 정부의 '사람 중심 사회' 기조에 따라, 과학기술정책도 '연구자 중심'으로 전환된다는 발표가 있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제4차 과학기술기본계획안'에 따르면, 독창적인 이론과 지식을 탐구하는 기초과학 분야 연구자에 대한 지원을 대폭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돈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겠냐마는 특히 과학 분야는 고가의 실험장비와 실험실 운영 등에서 막대한 예산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소위 돈 되는 연구가 아닌 기초 학문분야에서 연구비를 따내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다고들 말한다.

그런 사정은 미국도 예외가 아닌가보다. 호프 자런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건 식물의 성장에 관한 연구였지만, 돈 때문에 다른 연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돈은 항상 지식을 위한 과학이 아니라 전쟁을 위한 과학에 몰렸다고 토로한다. 과학자들이 걱정해야 하는 것이 실험의 오류가 아니라 돈이라는 서글픈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국 본업이 식물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연구비 때문에 일주일에 40시간은 폭탄 프로젝트에 전념하고, 과외의 40시간 동안 식물학 실험을 곁가지로 진행해야 했노라고 호프 자런은 말한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전쟁이 아니라 나무와 숲이 필요하다.

전쟁은 인간이 가꿔온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가가 원하는 건 인간 삶의 토대인 숲과 나무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그것을 파괴하는 쪽에 대한 연구라는 것이다. 매 10년마다 프랑스 크기의 숲이 사라져 가고 있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듯하다고 호프 자런은 안타까워한다.

30억 년 동안 진행된 진화 과정에서 출현한 생물 중 단 한 종의 생물만이 지구를 훨씬 덜 푸른 곳으로 만들 능력을 지녔다고 호프 자런은 꼬집어 말한다. 그 단 한 종의 생물은 과연 이 지구에 대해 무슨 자격과 권리를 가진 것일까?

학문의 세계에도 성차별이?

겉으로 보기에는 26살이란 어린 나이에 교수가 되어 많은 상을 받은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지만, 실험실을 운영할 돈 문제 뿐만 아니라 호프 자런 역시 여자이기 때문에 피해갈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다. 바로 학계 내에 만연한 성차별 문제였다.

"그때 학과장 월터가 걸어들어왔고 나는 상관을 만난 군인처럼 자동으로 일어섰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담쟁이덩굴이 무성한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여자로서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종신 교수직을 받기 직전이던 나는 임신에 동반되는 어떤 육체적 약점도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 본문 305쪽


호프 자런은 자신이 만들고 이끌었던 실험실에서 결국 임신으로 인해 출입 금지당했다. 자신의 실험실을 갖는 것이 어렸을 적부터의 꿈이었던 호프 자런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학계에서의 경험을 통해 성차별은 굉장히 단순하다고 호프 자런은 말한다. 사람들은 익숙한 표정으로 "저 여자가? 그럴 리가. 뭔가 실수가 있었겠지"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네가 절대 진짜 너일 리가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그 경험이 축적되어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 바로 성차별이라고 호프 자런은 말한다.

매년 세계 여성의 날에 발표되는 OECD회원국들의 유리천장 지수 조사 결과, 우리나라는 5년째 꼴찌를 기록 중이다. 호프 자런은 사막이 좋아서 선인장이 사막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막이 선인장을 아직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사막과 같을지도 모르겠다는 슬픈 생각을 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사막이 푸른 초원으로 바뀌지 않을까, 라는 희망 또한 갖고 있다.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라는 호프 자런의 말에서 희망의 싹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외우고 싶을 만큼 멋진 문장들로 채워진 <랩걸>을 덮으며 호프 자런의 문장을 조용히 읊조린다.

"우리 모두 일하며 평생을 보내지만 끝까지 하는 일에 정말로 통달하지도, 끝내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좀 비극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대신 우리의 목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로 그가 던진 돌을 내가 딛고 서서 몸을 굽혀 바닥에서 또 하나의 돌을 집어서 좀 더 멀리 던지고, 그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신의 섭리에 의해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군가가 내딛을 다음 발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본문 272쪽

덧붙이는 글 | <랩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호프 자런 지음, 김희정 옮김, 알마 펴냄, 412쪽,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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