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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하게 본다는 것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더 넓고 깊게 보려는 노력이다. 이를 바탕으로, 피렌체의 '익숙하지만 낯선 모습'을 풀어본다. [편집자말]
"용병과 외국 지원부대는 아무런 쓸모도 없으며 위험합니다.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용병에 의존한다면 절대 안정되고 확고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 군대는 통합되어 있지 않고 야심을 품고 있으며, 훈련되어 있지 않고 충성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군들과 함께 있을 때는 용감하지만 적들과 마주치면 비겁해집니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권혁 옮김, 돋을새김, 110쪽)

15세기 무렵, 이탈리아 반도는 로마, 피렌체, 밀라노, 나폴리, 베네치아 등으로 나뉘어 끊임없이 세력을 다투어 왔다. 하지만, 프랑스 등 이탈리아 외부 세력이 들어올 때는 같이 힘을 합쳐 맞서기도 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맹이 되는 일이 반복됐다. 이탈리아 반도는 끊임없는 세력 다툼으로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해왔고, 전쟁은 일상이 되었다.

당시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 국가들의 군대는 현재와 달랐다. 지금과 같은 상비군이 없었으며, 전쟁을 치러야 할 때는 돈을 주고 용병을 고용했다.

기사단이나 용병이라는 단어에 우리는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까? 학창시절, 만화와 영화 등에서 접했던 그들은 용맹하게 적진에 뛰어들며, 동료와의 신의를 목숨처럼 여기는 이미지였다. 그런데 이런 이미지는 과연 얼마나 사실과 부합할까?

당시 용병부대의 대장을 '콘도티에레(condottiere)'라고 하는데, 원래 계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휘하에 자신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유명한 콘도티에레는 항상 원하는 곳이 많았기 때문에, 그를 고용하기 위해서는 거액이 필요했다. 마치 현대 축구에서 감독을 모셔오기 위해 여러 팀이 경쟁하는 것과 같았다. 항상 전쟁이 끊이지 않던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콘도티에레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피렌체에도 훌륭한 용병대장들이 있었다. 존 호크우드 경(Sir JohnHawkwood)과 니콜로 다 토렌티노(Niccolo da Torentino)라는 용병대장이었다. 이 두 명의 기마상 프레스코화가 지금도 피렌체 대성당 한쪽 벽에 남아 있다.

호크우드는 영국 출신으로, 14세기 교황이 끈질기게 피렌체를 공격해 올 때 교황군을 훌륭하게 막아낸 영웅이었다(1375~1378). 피렌체 시민들은 그의 업적을 기려 시민권을 부여했다. 피렌체는 스스로 고대 로마의 후예라고 자부했다.

때문에, 로마 시민권처럼 피렌체 시민권을 준다는 것은 대단히 큰 영예라고 생각했다. 이 용병대장은 피렌체의 귀족 가문 중 하나인 비스콘티 가의 딸과 결혼했고, 피렌체에서 숨을 거두었다. 용맹한 용병대장을 기리기 위해 피렌체 시민들은 그의 시신을 피렌체 대성당 지하에 안치했다.

피렌체의 전쟁이 길어진 까닭

존 호크우드 경 기마상 파울로 우첼로(Paolo Uccello), 1436년, 피렌체 대성당
▲ 존 호크우드 경 기마상 파울로 우첼로(Paolo Uccello), 1436년, 피렌체 대성당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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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용병대장인 토렌티노는 1432년 피렌체가 밀라노를 상대로 치렀던 역사적인 산로마노 전투를 지휘한 용병대장이었다. 그리고 코시모 데 메디치와 그 가문이 정적들에 의해 투옥됐을 때, 피렌체 시청사 앞에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 메디치 가문의 석방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였다.

애초 코시모의 정적들은 코시모에게 사형을 선고하려고 했지만, 토렌티노의 무력 시위에 겁을 먹고 추방령으로 수위를 낮추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추방도 1년 만에 끝나고 코시모는 돌아온다. 어쨌든 토렌티노는 메디치 가문에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니콜로 다 토렌티노의 기마상 카스타뇨(Andrea del Castagno), 1456년, 피렌체 대성당
▲ 니콜로 다 토렌티노의 기마상 카스타뇨(Andrea del Castagno), 1456년, 피렌체 대성당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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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명의 용병대장을 그린 그림은 유달리 푸른색을 띠고 있으며, 구도 역시 특이하다. 원래는 청동상을 조각하려고 했으나, 전쟁으로 자금이 부족해서 청동상 느낌이 나는 그림으로 대신했기 때문이다.

이 용병대장들은 용맹과 지략, 신의를 지닌 훌륭한 용병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렇게 용병들을 고용하는 전쟁에는 장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지 않아도 되니, 시민들의 희생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장점보다 문제점이 더 커졌다.

용병은 전쟁이 직업이다. 따라서 이들은 좋은 '밥벌이'가 계속되길 원했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바로 죽지 않는 것과, 전쟁이 끝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당시의 전쟁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전쟁과 사뭇 달랐다. 자신의 목숨을 해치지 않는 '안전한' 전쟁이 가능한 '길게' 이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전쟁에서 한쪽 편이 용병을 고용했다면, 상대편도 마찬가지다. 현대 스포츠 선수들이 구단을 옮겨 다니는 것처럼 용병도 이리저리 부대를 옮겨 다니곤 했다. 그러다 보니 적군이라도 서로 아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제대로 된 싸움이 될 리가 없었다.

"적군을 공격하되, 죽이는 것도 아니고 포로로 잡는 것도 아닌 희한한 전쟁이 이탈리아식 전쟁이었다." - 팀 팍스 <메디치 머니>(황소연 옮김, 청림출판, 125쪽)

이런 이탈리아식 전쟁에서 용맹과 신의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이런 사례는 여러 개가 있다. 1422년 밀라노와 피렌체는 '자고나라'라는 도시에서 맞부딪혔다. 엄청난 폭우 이후 진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피렌체는 수천 마리의 말을 잃고 대패했다. 하지만 전사자는 말에서 떨어져 흙탕물 속에서 익사한 두세 명뿐이었다. 사람의 희생보다는 수천 마리의 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대패'했던 것이다.

또한, 당시 니콜로 피치니노라는 유명한 콘도티에레가 있었다. 피렌체는 밀라노와의 전쟁을 위해 그를 고용했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밀라노에서 피치니노에게 더 많은 돈을 주겠다고 은밀히 제의하자, 피치니노가 밀라노의 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용병에게 신의 따위보다는 돈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피렌체는 베네치아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밀라노를 막아냈지만,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시민 위한 용병이 시민의 목을 죄다

용병을 고용해서 치르는 전쟁은 일반 시민들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서민들에게 고통만 주게 된다. 왜냐하면 용병부대에 지급해야 할 돈은 결국 모두 시민들의 세금이었기 때문이다.

용병부대는 전쟁에서 져도 돈을 받아갔다.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서 이 비용을 충당했고, 이 부채는 모두 세금으로 보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런 식의 전쟁은 이기나 지나 막대한 금전적 부담을 지게 되고 결국 서민들의 삶을 팍팍하게 만들 뿐이었다. 1427년 5년간 치른 전쟁에서 피렌체가 쓴 돈은 300만 플로린에 달했다(약 2조 원 이상).

높은 몸값을 받은 용병들은 은행을 이용해 그들의 고향으로 거액을 송금했다. 이 과정에서 은행들은 송금 수수료를 받았다. 이뿐 아니라, 은행들은 앞서 얘기한 국채를 통해서도 이자 수익을 올렸다. 이렇게 은행이 짭짤한 수익을 챙기는 동안 시민들은 생활고에 신음했다. 생활고로 죽은 사람이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보다 더 많기도 했다.

이렇게 용병에 의존하는 전쟁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여러 나라들은 힘을 합쳐 샤를 8세에 대항했다. 이때 역시 용병을 고용했는데, 대부분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피렌체 시민들은 도시 안까지 밀고 들어온 샤를 8세의 군인 1만 2천여 명의 숙식을 책임져야 했다.

시민들의 불안과 고통은 말할 수 없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샤를 8세가 백묵 한 조각으로 이탈리아를 점령했다'며 분노했다. 프랑스 군대가 자신들이 머물 집을 지도에 백묵으로 표시만 해도 점령할 수 있었을 정도로 무능했던 용병부대를 비판한 것이다.

이런 일들로 인해, 마키아벨리는 용병이 아니라 애국심과 자긍심을 가진 군대를 직접 보유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게 된다. 마키아벨리가 봤을 때, 용병들은 "더 많은 급료를 받기 위해 전쟁을 질질 끄는 등, 평화보다는 전쟁을 선호하는 악당(성제환 <피렌체의 빛나는 순간>, 문학동네, 310쪽)"들이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정부에서 일할 당시, 피렌체는 독립을 요구하는 피사와의 전쟁을 10년이나 질질 끌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길 바라지 않는 용병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이 축소될 것을 걱정한 지도층은 정규군 창설을 계속 반대했다.

결국 세금 부담이 계속 커지자 피렌체 정부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을 받아들여 1506년경 피렌체 정규군을 창설하게 된다. 지금으로 본다면 드디어 자주 국방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국고는 거덜이 난 상태였다. 거기다 마지막 재정을 짜내어 창설한 이 정규군 역시 이후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게 된다. 이로써 피렌체의 공화정은 막을 내린다.

전쟁은, 용병이든 정규군이든, 이기든 지든, 결국 일반 국민들의 처절한 고통을 담보로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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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