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스틸컷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스틸컷 ⓒ CJ 엔터테인먼트


보통의 사람들은 말로써 의사와 감정을 표현한다. 그리고 특별한 사람들은 자신만의 도구로 그것들을 표현한다. 댄서의 몸짓, 작가의 활자, 화가의 점선면은 말보다 더 진실하게 그 사람의 내면을 담아낸다.

진태(박정민 분)에게는 피아노 88개 건반이 곧 자신의 낱말이고 표정이었다.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피아노 천재 진태는 억양만 다른 한 글자 "네"로 모든 말을 대신하지만 "네"가 그의 진짜 의사표현 도구는 아니다. 진태의 진심은 "네" 속이 아니라 음표 속에 있었다.

이 영화는 그래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봐야 한다. 조하(이병헌 분)가 지난 세월의 분노를 거친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고, 엄마 인숙씨(윤여정 분)가 지난 세월의 미안함을 바보 같은 거짓말로 드러냈듯이 진태도 분명 드러낼 만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진태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눈빛으로 어떤 말(피아노 연주)을 하는지를 듣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특별한 관람 방식이다.

네 손가락의 행복

극중 진태가 대학로의 한 공원에서 많은 이들 앞에서 피아노를 치고, 그 모습을 형 조하가 멍하게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진태가 연주한 건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3악장' 첫 부분이었다. 진태의 천재성을 처음 드러내는 신이니 만큼 화려한 손놀림과 감정표현의 섬세함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게 선곡된 듯싶다.

조하가 진태를 데리고 한가율의 집에 찾아갔을 때 진태가 가율과 함께 친 연탄곡은 좀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자기만의 세상에서 혼자 사는 진태가 처음으로 피아노를 매개로 하여 누군가와 깊이 소통했기 때문이다. 네 손가락이 함께 한 그 연탄곡은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이다. 못 배운 형 조하가 "이거 유명한 곡이잖아" 하고 말할 정도로 대중에 잘 알려진 곡이다. 깊이 사랑하고 동경해온 한가율과 피아노로 호흡을 맞춘 순간, 진태는 세상 밖으로 큰 한 걸음을 걸어 나왔다. 그의 표정은 혼자 연주할 때보다 한층 행복감에 젖어보였다. 진태의 성장이다.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콩쿠르에 나간 진태는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연주한다. 물처럼 흐르는 유려한 연주를 보여주는 데 쇼팽곡만한 게 없는 만큼 영화 중간 중간 쇼팽의 곡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갈라콘서트에서 진태는 비로소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간다. 엄마가 평생 바라온 모습이었다. 이 장면에서 진태가 연주한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1번'이다. 비애와 환희가 동시에 느껴지는 격정적인 도입부는 연주자의 혼과 열정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 곡은 피아니스트로서의 가능성과 예술성을 가늠하는 척도로 알려져 있다.

진태는 죽어가는 엄마가 보는 앞에서 이 곡으로 피아니스트의 세계에 정식으로 들어간다. 비록 '특별상'의 갈라콘서트였지만 터져나온 기립박수가 진태의 정식 데뷔를 말해주며 이전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상으로의 진입을 암시한다. 진태의 성장이다.

죽음과 애도

 <그것만이 내 세상> 스틸컷, 박정민 배우

<그것만이 내 세상> 스틸컷, 박정민 배우 ⓒ CJ 엔터테인먼트


쇼팽,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드뷔시... 그리고 한가율이 친 '젓가락 행진곡'까지. 많은 곡들이 등장했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곡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마지막 곡을 택하겠다. 엄마 인숙씨의 장례식에서 혼자 빠져나온 진태가 공원에서 연주한 곡. 평소 엄마가 슬플 때 듣곤 했던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의 전주였다. 클래식에 비하면 너무도 단순한 곡이지만 진태의 '성장'에 방점을 찍는 곡이었다.

죽음도 이별도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진태지만 엄마를 떠나보내는 애도의 과정을 그는 가장 예술가다운 방식으로 지냈다. 이 장면이 명장면인 이유다. 조하가 홍마담(김성령 분)으로부터 피지도 못하는 담배를 받아서 피는 방식으로 슬픔을 달래는 것처럼, 진태는 피아노로써 슬픔을 표현한 것이다. 아니, 슬픔을 '달랜다'거나 '표현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승화'시키는 과정처럼 보였다.

물론 진태는 단지 엄마가 보고 싶어서 피아노를 찾았을 테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가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마다 춤을 춰서 엄마를 '접신'했던 것처럼 말이다.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노래 '그것만이 내 세상'을 연주하는 동안 진태는 엄마와 단 둘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단지 엄마를 '찾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다. 힘들었을 엄마를 위로하고 달래고 보내드리는 듯 차분하고 평온하다. 진태의 그 연주는 결국 엄마의 마지막 길을 지켜주는 진혼곡이자, 가장 가까운 한 인간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애도하는 진태의 인간적 성숙을 상징하는 것이다.

조하에겐 복싱이, 진태에겐 피아노가, 엄마에겐 진태와 조하가 '그것만이 내 세상'이었다. 그 각각의 세상이 점점 타인의 세상을 끌어안아 합일돼 가는 과정이 이 영화의 기둥이다. 세 사람 모두 성장하고 변화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세 사람 중에서도 특히 피아노라는 특별한 언어로 살아가는 진태의 성장은 이 영화가 피운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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