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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흥왕이 통치하던 6세기 초반 신라. 귀족세력은 토속신앙을 버리고 불교를 공인하려는 왕과 이차돈에게 저항했다. 당시 왕궁에선 이와 관련된 논쟁이 자주 벌어졌을 것이다. 한여름, 태양이 쏟아내는 열기보다 뜨거웠을 그 ‘설전의 현장’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법흥왕이 통치하던 6세기 초반 신라. 귀족세력은 토속신앙을 버리고 불교를 공인하려는 왕과 이차돈에게 저항했다. 당시 왕궁에선 이와 관련된 논쟁이 자주 벌어졌을 것이다. 한여름, 태양이 쏟아내는 열기보다 뜨거웠을 그 ‘설전의 현장’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 이건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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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Marxism)에 입각해 세계와 인간을 해석한 학자들은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지식인)를 "진짜 적이 아닌 논쟁의 적만을 혐오하는 인간"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그런 인식은 "피상적으로 세상을 보는 인텔리겐치아가 아닌 삶의 구체성과 실물성(實物性)을 획득하고 있는 노동자가 세계 변혁의 주체"라는 이데올로기를 낳았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와 플라톤(BC 427~347) 등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소피스트(Sophist)'를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철학적 관점을 배제한 채 '말장난'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을 일삼는 대중의 적"으로 규정했다. 우리가 요즘에도 사용하는 단어 '궤변론자'는 그때 나온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무언가'가 변화할 때는 언제나 논쟁과 논란이 있었다. 신라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믿어온 '토속신앙'과 신흥종교인 '불교'가 상호 대립적 관계를 형성하던 6세기 초반 역시 그랬다.

마르크스주의 학자들과 인텔리겐치아의 갈등, 플라톤과 소피스트의 언쟁 유사한 싸움이 거의 매일 법흥왕이 통치하던 신라왕실에서 벌어졌다.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던 527년 즈음이다.

"흩어진 국론을 하나로 모으고 미래를 바라보자"는 법흥왕과 이차돈, "전례(前例)와 이제껏 이어져온 전통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다"는 귀족들 사이의 입장 차이는 컸다.

왜냐? 거기에선 "왕에게 내가 가진 권력을 허망하게 내줄 수 없다"는 귀족계급의 절치부심(切齒腐心)과 "귀족의 권한을 왕에게로 일원화해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법흥왕의 욕망이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6세기 이전에도 신라에는 거대한 규모의 절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칠처가람(七處伽藍·일곱 군데의 큰 절)은 이를 증명한다. 그중 한 절터에서 출토된 ‘사자 무늬 문고리’.
 6세기 이전에도 신라에는 거대한 규모의 절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칠처가람(七處伽藍·일곱 군데의 큰 절)은 이를 증명한다. 그중 한 절터에서 출토된 ‘사자 무늬 문고리’.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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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이데올로기를 대체할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필요성

2016년 12월 경상북도가 발간한 자료집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4권은 '법흥왕-이차돈 vs 신라 귀족계급'의 논쟁을 아래와 같이 해석하고 있다. '불교의 공인과 융성'이란 챕터를 통해서다.

 "동일한 고대국가라도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진화·발전하는 과정을 겪게 마련이다. 지배체제를 새롭게 재구성해가면서 그에 걸맞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거나 만들어내 포장하려는 데에 계속해서 힘을 쏟는다. 신라도 4세기에 출범한 이후 기존의 체제와 지배질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한동안 최고 지배자를 하늘과 직접 연결시켜온 전통적 방식의 신앙과 지배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활용하였다."

위의 서술은 법흥왕 이전의 신라의 종교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왕은 그 사회에서 어떤 지위에 있었는지 말해준다. 이를 좀 더 구체화해 간명하게 설명해준 이는 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이다.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 신라인들은 강림한 조상신을 믿거나 시조 묘에 제사를 지냈으며, 삼산오악(三山五岳)과 같은 명산대천과 천지신명(天地神明)을 섬기는 토속신앙에 경도돼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불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구체제'의 대표 귀족과 불교 공인을 통해 '새로운 체제'를 원하던 법흥왕과 이차돈.

6세기 신라의 왕궁에서 진행된 '종교 논쟁'은 현대사회 한국의 여야 정당 사이에서 오가는 논쟁이나 설전보다 그 뜨거움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랬기에 사람의 목숨까지 오갔다. 바로 "목이 잘리자 몸통에서 흰 젖이 솟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이차돈의 순교다.

앞서 언급한 자료집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는 1500여 년 전 벌어진 그 '논쟁과 설전'이 마무리되는 과정까지를 약술(略述)하고 있다.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지배체제가 자리를 잡게 되자 국정 안팎을 단장할 필요성도 생겨났다.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갖는 효용성이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에 대체될 만한 고급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였으니, 그게 바로 불교다."

위에서 말하는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박 원장이 지목한 강림 조상신이나 천지신명을 섬기는 신라의 토속신앙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6세기 신라에서의 불교란 역사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 종교 이상의 의미를 가진 국민화합의 사상이나 왕조의 통치이념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옛날 신라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경주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는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이다. 안개 낀 새벽. 그곳을 거닐면 법흥왕과 이차돈의 목소리가 들릴 듯하다.
 그 옛날 신라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경주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는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이다. 안개 낀 새벽. 그곳을 거닐면 법흥왕과 이차돈의 목소리가 들릴 듯하다.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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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차돈과 법흥왕이 살던 시대 신라인들이 만든 말안장 장식. 1천500년 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미려하다.
 이차돈과 법흥왕이 살던 시대 신라인들이 만든 말안장 장식. 1천500년 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미려하다.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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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 강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불교 공인

신라 역사 연구자들의 보편적 견해에 힘을 보태는 또 하나의 논문이 있다. 바로 세명대학교 이창식 교수의 <이차돈 유산의 가치와 현대적 계승>이다.

이창식 교수는 신라의 불교 공인이 어려웠던 이유로 "귀족들의 폐쇄성과 재래적 토속신앙의 강고함"을 지적하며,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의 변화를 "정치체제에서 왕권의 강화 과정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차돈과 법흥왕을 단순한 주종(主從)관계가 아닌, '불국토(佛國土) 신라를 만들기 위한 비밀스러운 프로젝트'의 상호협력자로 보는 학자와 역사소설가가 적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변화 과정에선 새로운 이념을 위한 '희생양'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걸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몇몇 학자들은 "이차돈은 스스로 희생양이 되기를 법흥왕에게 읍소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죽음을 자청하다니…. 일반의 상식으론 쉽사리 이해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궁금증은 다시 증폭된다. 정말이지 스물한 살 청년 이차돈은 "신라의 발전과정에서 분화되고 복잡해진 사회를 일원적으로 포괄하는 한 차원 높은 규범과 이를 뒷받침하는 지배 이념인 불교"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던졌던 것일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내용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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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등의 저자. 경북매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