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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체험을 증언하고 있는 강종헌 선생
▲ 영화 '자백' 나고야 상영회 및 피해자 증언집회 당시의 체험을 증언하고 있는 강종헌 선생
ⓒ 전성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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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자신의 조국이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청춘, 아름다운 시기를 바쳤습니다. 저의 청춘은 조국의 감옥에 묻혔습니다. 하지만 그걸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구 식민지인 한반도에 뿌리를 둔 후손으로 일본에서 나고 자란 청년에게 차별과 멸시는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청년은 언제나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바로 그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찾기 위해 조국을 찾아갔다. 그곳은 엄혹한 군사독재의 모순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군사독재에 맞서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자신과 같은 또래의 청년학생들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분단국가에서 평화통일, 민주, 인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게 한국을 찾아간 24살 청년에게 조국은 잔인하고 가혹했다.

지난 27일 최승호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이 열린 나고야 국제센터의 한 세미나실. 추운 날이 이어지는 주말 저녁임에도 행사장을 가득 메운 참석자들은, 40년이라는 세월을 오가며 가해지는 국가폭력의 뒤를 쫓는 카메라의 앵글로부터 한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만 가끔 들려오는 소리는,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손에 넣은 자들이 자신들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존엄한 개인의 삶을 짓밟고 망가뜨리는 국가폭력의 잔인함에 대한 분노의 탄식과 한숨 소리 뿐이었다.

영화에 열중하고 있는 참석자들
▲ 영화 '자백' 나고야 상영회 및 피해자 증언집회 영화에 열중하고 있는 참석자들
ⓒ 이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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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에 무기력했던 24살 재일동포청년

영화 상영 뒤에는 서슬퍼런 유신독재의 한복판인 1975년 이른바 '재일동포유학생학원침투간첩단사건'으로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3년의 수형생활을 한 강종헌 선생의 증언이 있었다.

"이 영화를 보니 1975년 어느날 갑자기, 제가 살고 있던 하숙집에 들이닥친 보안사령부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연행당했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 뒤 원시적이고 잔인한 고문을 약 2개월간 받았습니다. 당시 겨우 24살의 젊은이였던 제게 거대한 국가폭력에 맞설 힘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아직도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를 누를 수가 없습니다.

고문이야기요? 그건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일본에 돌아와서 초기에 옥중 체험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는데, 그 얘기를 하면 할수록 소모되어 가는 자신을 느꼈습니다. 그 뒤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족도 내게 묻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도 가족, 형제에게 고문 이야기는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권력은 몸도 마음도 갈갈이 찢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제게 남은 건 권력의 고문에 굴복하고 말았다는 패배감, 좌절감 뿐이었습니다."

당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유학생으로 재학 중이던 청년 강종헌은 자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누구에게도 연락할 수 없었고, 변호사도 없고, 일본에 있는 가족들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 뒤 이어진 기나긴 수형생활로 몸과 마음 모두가 만신창이가 된 그에게 기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언젠가 가족들이 있고 친구들이 있는 곳에 반드시 살아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엄혹한 시대이기는 했지만 그 안에서도 시대의 변화는 느낄 수 있었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정치범들. 그들을 보면서, 많은 우여곡절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역사는 앞으로 전진하고, 민중들이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희생을 마다 않고 싸워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조국에 대해 자부심과 애착을 갖게 된다.

1988년 석방된 뒤로부터 다시 27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지난 2015년 마침내 그는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확정 판결을 받는다. 지금은 일본에서 한국문제연구소 대표를 맡아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연구와 강연활동을 정력적으로 펼치는 한편, 분단된 한반도의 남북을 잇는 철도연결 운동을 하는 삼천리철도 고문으로 구체적 평화통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분노를 분단의 장벽을 허무는 힘으로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조국. 그 사건이 없었다면 그는 그의 꿈대로 평범한 의사가 되어한국에서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한 사람의 시민으로, 의사로 살아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국은 그에게 그런 소박한 꿈이 실현될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분명 미워하고 저주를 해도 부족할 것 같은 조국. 그는 왜 그런 조국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일에 헌신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제게도 분노는 있습니다. 헌법 위에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한 개인의 존엄을 유린한 사회에 대한 분노는 있지요. 하지만 증오는 하지 않습니다. 증오는 아무 것도 낳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노는 사회를 바꾸는 에너지가 됩니다. 그 분노를 가지고 저는 지금도 이 분단의 장벽을 허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분단된 한국사회의 가장 큰 적폐는 다름 아닌 바로 '분단' 그 자체이다. 분단 의식은 "너는 남이냐? 북이냐?"라는 양자택일을 강요하지만 통일 의식은 "남도! 북도!"의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다고 여기기에 지금도 통일운동을 위해 남북의 철도를 연결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일반 법정보다 역사의 법정은 훨씬 무겁고 권위가 있다는 것을 저는 지금 실감하고 있습니다. 김기춘, 원세훈, 남재준 모두 구속되었습니다. 박정희 시대에 만들어진 수많은 사건에 대한 짐을 지금 박근혜가 지고 있다고 한다면 한국사회는 겨우 박정희 신화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경제적 풍요로움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라는."

강종헌 선생이 옥중에서 자신이 만든 '그날이 온다'를 부르고 있다
▲ 영화 '자백' 나고야 상영회 및 피해자 증언집회 강종헌 선생이 옥중에서 자신이 만든 '그날이 온다'를 부르고 있다
ⓒ 이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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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온다

박정희시대에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던 강종헌. 그의 말대로 2016년과 2017년 전국의 광장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은 길고 긴 박정희 신화로부터 한국사회를 해방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날 행사에 엄마와 함께 참석을 한 아이가 엄마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아이 : 엄마 나도 한국으로 유학갔다가 잡혀가면 어떻게 해?
엄마 : 아니!절대 그럴 일 없어. 그래서 엄마 아빠가 이렇게 열심히 싸우는 거야. 네가 컸을 때에는 정의롭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고 그의 말대로 분단의 족쇄는 여전히 우리를 꽁꽁 얽어매고 있다. 하지만 절대적인 고독과 절망, 좌절과 마주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그의 이야기와 아이의 물음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역사와 마주하는 방식에 대해 다시 한 번 묻고 있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야기를 마치면서 그가 옥중에서 직접 만든 노래 <그날이 온다>를 불러줬다. 그에게 있어서 '그날'은 단순히 감옥에서 석방되는 날이 아니고, 조국의 '민주화'의 '날'이고 '평화통일'의 '날'이었다. 세월은 흘렀고 세상도 많이 변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가 노래했던 '그날'의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길에서 감옥은 불사조 길러내는 곳
총칼을 가진 자들아 앞길을 막아도 굳게 다진 우리 마음 꺽지 못하리라
민중의 마음마다 자유의 씨 뿌리자 민주회복의 그날이 온다'
(강종헌 작사, 작곡 그날이 온다 1절)

상영회 장소 입구
▲ 영화 '자백' 나고야 상영회 및 피해자 증언집회 상영회 장소 입구
ⓒ 전성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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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영화 자백, #강종헌, #재일동포 간첩단 조작사건, #나고야, #남북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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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고야의 장애인 인형극단 '종이풍선(紙風船)'에서 일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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