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출장을 다녀온 후, 친정엄마 집에 맡긴 아이를 찾으러 갔을 때다. 왜 할머니 집에 맡겼는지 엄마가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선물로 사 온 호랑이 인형을 주며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엄마가 이번에 교토에 가서 호랑이를 보고 왔어. 이 호랑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조선 호랑이를 잡으려고 한 달 동안 사냥하면서 잡은 호랑이야. 엄마랑 아빠는 이 호랑이 박제를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줬으면 좋겠어. 일본 사람들이 하도 호랑이를 잡아서 이제 한국에서는 볼 수 없으니까 사과하는 의미로 말이야."

여기까지 국사학을 전공하고 문화재 환수 운동을 하는 나의 멘트였다. 매우 문과생답고 전공을 살려 일을 하는 엄마가 설명한 호랑이였다. 이 모습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 이유는 이과생 엄마의 호랑이 설명을 읽고 나서다.

"저 이제 호랑이로 변신했어요?"
나는 아이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본 다음 말했다.
"아니"
"왜 아직 아니죠?"
"오래 걸리기 때문이지."
"왜 오래 걸려요?"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왜냐고? 엄마도 몰라."
나는 그렇게 인정한 다음 덧붙였다.
"자기가 원래 되어야 하는 것이 되는 데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단다." (p.380)


작가는 아이에게 계속해서 호랑이에 관해 설명한다. '하드로코디움'이라는 작은 포유류가 2억만 년 전부터 살았는데 공룡만큼 강해지고 싶어서 나무 이파리를 몇 개 먹었다. 그런데 공룡이 되지 않고 1억5000만년 만에 호랑이가 됐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기가 원래 되어야 하는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이야기를 마친다. 이 얼마나 이과적인가! 너무 감동한 나머지 옆에 있던 남편에게 말했다.

"다시 태어나면 이과생으로 태어날래요!"

호프자런, 김희경 옮김, 알마
▲ 랩걸(Lab Girl) 호프자런, 김희경 옮김, 알마
ⓒ 구진영

관련사진보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하드로코디움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여 검색해보니 호랑이의 조상이라고 하기엔 뭔가 너무 연약해 보였다. 이게 진짜인가 싶어 '호랑이 조상'이라고 검색했는데 영~ 딴 동물들이 나온다. 심지어 하드로코디움보다 몇 배는 더 호랑이 조상 같아 보인다. 

하드로코디움이 호랑이의 조상이냐에 대한 이야기는 문과생 엄마인 내가 확인할 수 없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과생 엄마는 인간이 무엇인가 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저렇게 멋지게 풀어낼 수 있구나 하는 감동을 내게 남겨주었다. 그 외에도 이 책은 문과생인 나에게 커다란 감동을 매번 선사하였다.

"대부분의 액체와 반대인 이 특징으로 인해 물을 안에 함유하고 있는 것들은 물이 얼면서 터질 수 있다. (중략) 약간만 서리가 껴도 그 안에 있던 샐러리는 축 처지고 시들어버린다. 세포 안에 들어 있던 물이 얼면서 세포벽이 터지기 때문에 채소가 먹을 수 없게 돼버리는 것이다." (p.274-275)


이 구절을 읽음과 동시에 나는 소리를 질렀다. "아악!! 어쩐지!!" TV에서 대파는 냉동실에 보관하라며 냉동실을 열고 대파를 넣는 연예인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후로 나는 무조건 대파를 냉동실에 보관했다. 문제는 그때부터 발생했다. 냉동실에서 꺼낼 땐 대파가 멀쩡해 보이는데 요리를 하면 흐물거려서 대파 맛이 살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나한테 세포벽이 터지라고 냉동 보관하라고 가르쳐준 거야!!" 하며 나를 한 번에 이해시켜준 이과생 작가에게 또 한 번 감탄했다. 그 후 아직 걸음마도 못 하는 딸을 앉혀놓고 나 혼자 또 떠들기 시작했다.

"엄마가 미리 가르쳐주는 거야~ 물을 안고 있는 식물은 얼면 세포벽이 터진대, 그러니까 너는 절대로 대파를 냉동실에 넣어선 안 돼~."

400페이지에 가까운 에세이가 모두 이과생에 대한 감탄으로만 끝난 것은 아니다. 이과생인 작가도 문과생인 나도 모두 인간인지라 일하면서 내가 느낀 것들이 작가에게도 고스란히 삶에 묻어나 있었다.

"과학자가 되던 날, 나는 실험실에 서서 해가 뜨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 아주 특별한 것을 봤다고 확신했고, 새로 뜨는 해가 충분히 높이 떠서 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은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p.99)


처음으로 문화재 반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날, 나도 이젠 문화재환수운동가라는 이름을 쓸 수 있겠구나 싶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어둠이 내리깔린 LA 호텔 방에서 한국으로 전화해 협상에 성공했다고 떠들고 싶어서 두근대던 그날이 작가 덕분에 생생히 살아났다. 물론, 과학자가 된다는 것도 문화재환수운동가가 된다는 것도 설렘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나는 정오가 되기도 전에 그 발견이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곧 더 나이 들고 현명한 과학자가 내가 본 것은 사실 자기가 이미 추측했던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내 관찰 결과가 엄청난 발견은 아니고, 당연한 추측을 확인한 것일 뿐이라는 그의 설명을 나는 공손한 자세로 들을 것이다."(p.107)


일을 하면서 뭔가 찾아내고 고쳐낼 때마다 '나는 다 알고 있었다'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타인의 노력을 깎아내리려고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힘이 빠져서 이제 문화재 일은 그만할 거라고 매번 씩씩대곤 했다.

그렇게 화가 날 때면 인터넷을 켜서 대학원 전공을 알아봤는데 문화재 및 역사 분야는 제외하며 열심히 모집 요강을 찾아봤다. 이직하면 그만일 줄 알았는데 과학계도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니 그냥 이 일을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추위가 오기 전이었다. 남편이 산책로에 있는 버드나무를 보더니 가지를 뚝 꺾는 게 아닌가. 누가 보면 어쩌려고 꺾냐고 물었더니 가지를 꺾어서 물에 넣으면 뿌리가 나와서 다시 자란다고 실험해보자는 게 아닌가.

집에 와서 물에 넣었더니 몇 주 뒤 버드나무 가지는 뿌리를 내렸다. 그때의 현상을 문과생인 나와 남편은 역시나 설명해내지 못했는데 이과생 작가는 책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

버드나무 가지에 뿌리가 나는 현상을 작가는 "버드나무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렵지 않다"(p.134)며 3페이지에 걸쳐 설명하고 있다. 문과생이 내가 요약하기엔 너무 벅찬 내용이기에 버드나무와 사랑에 빠져보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134 페이지를 꼭 펼쳐보라고 권하고 싶다.


태그:#랩걸, #호프자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