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막 인터뷰 장소에 들어서는 이혁상 감독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빨간 두 볼을 한 이혁상 감독이 모자를 벗고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자신이 제작한 용산 참사 다큐멘터리 <공동정범>의 VIP 시사를 무사히 마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혁상 감독은 전날 있었던 VIP 시사회를 떠올리며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한 사람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여전히 용산 참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 분들이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했다.

'공동정범' 이혁상 감독 영화 <공동정범>의 이혁상 감독이 18일 오전 서울 성수동의 한 공원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공동정범' 이혁상 감독 영화 <공동정범>의 이혁상 감독이 18일 오전 서울 성수동의 한 공원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VIP 시사회 자리에는 국가인권위원회 직원들과 이성호 인권위원장도 있었다. 이들은 "국가 폭력에 짓밟힌 인권에 관한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하지만 이혁상 감독은 "역시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은 다른 직원들과 함께 <공동정범> 단체 관람을 하겠다는 것이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지난해에 개봉한 몇몇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예상외의 흥행을 기록했지만 당장 개봉관부터 극영화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한 다큐멘터리 영화는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하다. <공동정범>은 특히나 벌써 9년 전의 이야기가 된 용산 참사를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용산참사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담은 <공동정범>(2016) 포스터

용산참사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담은 <공동정범>(2016) 포스터 ⓒ (주)엣나인필름 , (주)시네마달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고, 이명박 대통령이 정권 초기에 가한 국가 폭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남일당 건물 위 빨간 불길도 어느덧 용산 지대 재개발에 밀려 잊히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지난 25일 <공동정범>이 개봉했다.

박근혜 정권이 준 무력감, 영화 만든 계기 돼

'공동정범' 이혁상 감독 영화 <공동정범>의 이혁상 감독이 18일 오전 서울 성수동의 한 공원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아이러니하게도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계 탄압에서 오는 '무력감'은 영화 <공동정범>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됐다. 이혁상 감독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섰던 2012년 대선을 반추했다.

"2012년 대통령 선거일 당시 내 전작이었던 <종로의 기적> 상영회가 있었다. 마침 '관객과의 대화'가 개표 방송이 시작할 6시 즈음이라 영화관에 개표 방송을 틀었다. 이명박 정부 이후 정권 교체에 대한 바람도 컸고 관객들 위해 맥주도 사다 놓고 그랬다. 정권 교체하면 축배를 들자고.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그렇게 다 준비해놓고 영화관에서 딱 개표 방송을 틀었는데 '박근혜 당선 유력' 출구조사가 나온 거다. 그 순간 모든 행사가 중단돼버렸다.(웃음) 당시 <공동정범>을 함께 만든 김일란 감독과 현장에 같이 있었는데 그런 이벤트를 준비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부끄럽고 그것과는 별개로 화가 나기도 했다.

당시 나는 문재인 후보의 비판적 지지자였음에도 대중문화 예술인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을 했다. 물론 그게 훗날 블랙리스트가 되지만. (웃음) 분명 정권 교체가 되면 용산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 기미가 보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마저도 사라지고 더 악랄하고 암울한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그날 모두 힘들었던 것 같다. 내 영화 <종로의 기적> 감상은 뒷전이었고 나조차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못했다. 어쩌면 그날의 기억이 <공동정범>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명박 정권 당시 <두 개의 문>(2012)을 통해 용산 참사를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거라도' 해야 한다는 심정이 있었다. 정말 그거 하나 생각하면서 제작했다."

'공동정범' 이혁상 감독 영화 <공동정범>의 이혁상 감독이 18일 오전 서울 성수동의 한 공원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그런 문화예술계의 정서가 반영된 탓일까. <공동정범>의 최초 완성작은 박근혜 정권 당시 DMZ다큐영화제에서 상영됐는데, 25일 공개된 전국 극장용 개봉 버전보다 "조금 더 암울했다"고 이혁상 감독은 전했다.

"2016년 처음 발표했던 <공동정범>에는 지금보다 음울한 정서를 담았다. 그러다가 2016년 겨울부터 촛불 정국으로 넘어가면서 대통령이 탄핵되고 2012년에 떨어졌던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서 '이제는 <공동정범> 개봉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폐로 쌓인 시간을 보내면서 <공동정범>의 이야기가 무언가 비정상이었던 걸 제자리로 돌리는 성찰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미처 우리가 몰랐던 용산 참사 생존자들의 감정이나 고통에 귀 기울이는 고민의 시간을 영화가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본격적으로 개봉을 준비했다.

극장 개봉용 버전에는 용산 참사의 책임자인 김석기 국회의원 선거 저지 투쟁 장면도 더 들어갔고, 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이명박 정권의 모습도 들어가 있다. 보다 시대적인 분위기를 담으려 노력했다. 이미 완성된 다큐멘터리에 다시 손을 댄다는 건 사실 감독 입장에서는 정말 하기 싫은 일이다. (웃음) 그렇지만 그것이 결국 시대의 정신이자 시대의 변화에 교감하고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다큐멘터리의 숙명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는 심정으로 재편집했다. '지금은 뭔가 해볼 수 있겠다'는 느낌을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용산 참사 진상규명, 과연 할 수 있을까?

'공동정범' 이혁상 감독 영화 <공동정범>의 이혁상 감독이 18일 오전 서울 성수동의 한 공원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형법 제30조 (공동정범) 2인 이상이 공동하여 죄를 범한 때에는 각자를 그 죄의 정범으로 처벌한다.'

용산 참사를 다룬 영화 <두 개의 문>의 후속작이기도 한 <공동정범>은 자연스럽게 <두 개의 문>이 담지 못한 이야기를 담게 됐다. 경찰 1명을 포함해 총 6명이 사망한 2009년 1월 20일 용산 참사의 '공동정범'으로서 4~5년의 복역을 마치고 돌아온 참사 생존자들을 <공동정범>은 카메라에 담았다.

"<두 개의 문>은 어떻게 보면 가진 정보가 제한적이었다. 중간에 수사기록 3000쪽도 사라지고 당시 사건에 개입한 경찰을 인터뷰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한정된 자원으로 꾸역꾸역 만들어 냈고 그랬기에 내부적으로 아쉬움이 있었던 것 같다. 망루에서 대체 왜 화재가 일어났고 어떻게 5명의 철거민들과 1명의 경찰이 사망했는지 망루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알고 있을 거라는 기대가 생기지 않나. 그런데 생존한 철거민들은 모두 감옥에 있었고 이분들이 감옥에서 나오면 그 입을 통해 당시의 기억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많은 활동가들과 용산 참사 진상규명위원회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카메라를 들고 구치소로 갔고 처음으로 생존자 중 한 사람인 이충연씨를 그날 처음 봤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날의 진실을 찾는 진상규명 용산 참사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공동정범>은 용산 참사의 진상 규명을 해낸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생존자인 분들의 기억조차 서로 많이 다르고 때로는 맞지 않기도 하고. 워낙 큰 트라우마였기 때문에 그 기억이 전혀 없는 사람도 있었다. 저희가 확보한 사실들과 증언들을 맞추는 게 너무 힘들더라. 여전히 퍼즐이 구멍 난 상태라고 해야 하나? 과연 용산 참사 진상 규명이 가능할까 싶은 타이밍에 생존자들의 감정을 듣기 시작했다. 이분들의 기억만으로 망루 안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에는 빈약하고 구멍이 많았지만 진상 규명과는 별개로 생존자들은 트라우마와 상처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었다. 지금도 지옥 같은 현실을 살고 있는 분들의 감정 상태를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이것들이 먼저 해결되어야 진상 규명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니까 <공동정범>은 진상 규명의 전 단계로서 진상규명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토양을 만들기 위한 다큐멘터리인 것 같다. 같이 싸웠던 동지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공동정범>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겠지만 '관계 회복의 다큐멘터리'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공동정범>이 결국에는 요청이자 압박이 됐으면 한다. 이렇게 우리 용산 철거민들과 당시 연대했던 철거민들의 모든 것을 <공동정범>을 통해 내보였으니 다음 차례는 당시 개입했던 경찰이나 검찰이라는 요구를 하는 다큐멘터리.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고 최대한 퍼즐을 맞춰봤지만 어쩔 수 없는 빈틈이 있었고 그 구멍을 당시 용산 현장에 있었던 경찰 특공대 내부의 진술이나 증언들로 메워야 온전한 진상 규명이 가능할 거라는.

변하지 않는 용산 참사의 진실이 있다. 국가가 그런 식으로 경찰력을 동원해서 국가 폭력을 자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는 진실. 거기서 파생된 철거민들 사이의 내부적인 갈등 상황은 결국 그 국가 폭력의 결과인데 이를 이렇게까지 만든 '너희들이 답할 차례야'라는 말. 그게 영화 <공동정범>이 할 수 있는 역할인 것 같다."

'공동정범' 이혁상 감독 영화 <공동정범>의 이혁상 감독이 18일 오전 서울 성수동의 한 공원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용산 참사 생존자들에게 2009년 1월 20일은 기억 속에서 무한하게 반복되는 날이다. 생존자들은 인터뷰 도중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눈물을 흘린다. 이혁상 감독은 그중에서도 최종본에서는 편집된 생존자 김창수씨의 눈물을 떠올렸다.

"김창수씨가 인터뷰 중에 '이 노래 듣자'면서 김광석이 부른 '그날들'을 틀다가 갑자기 울었다. 눈물이 조금 진정된 다음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날들'의 가사가 자꾸 (용산 참사의) 그날을 생각나게 만들었던 거다. 2009년 1월 20일을. 이분들의 머릿속에서는 용산 참사의 그날이 무한 반복되고 있다. '그날들'을 들어도 길을 가다가도 경찰 사이렌이 들려도 모닥불만 봐도 '그날'이 떠오르는 거다. 단추만 눌리면 망루에서 불이 났던, 인생의 한순간으로 무한하게 회귀한다는 게 과연 어떤 고통일까. 너무 안타까웠다."

다음 영화 "김일성 닮은 청년이 벌이는 소동극"

'공동정범' 이혁상 감독 영화 <공동정범>의 이혁상 감독이 18일 오전 서울 성수동의 한 공원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이혁상 감독은 현재 <공동정범> 제작을 마치고 극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몇 년 전 갔던 일본 여행에서 조총련계(일본에 거주하는 '친북한계' 재일동포 단체) 사람들을 우연히 만났던 경험이 바탕이 됐다.

"그 분들이 내가 '수령님'을 닮은 것 같다며 김일성이 그려진 배지를 주시더라. 당시 내가 검은 코트에 빨간 목도리를 하고 있어서 더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웃음) 굉장히 극진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는데 문득 그 분들의 삶이 궁금해지더라."

우연히 김일성의 막내아들로 오인 받은 한 청년이 일본의 조총련계 마을에 들어가 벌어지는 소동을 담은 <조선의 태양>(가제)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혁상 감독. "시놉시스가 무척 재밌다"는 기자의 반응에 이 감독은 웃으며 "아휴, (시나리오가) 잘 안 풀린다. 김일성 닮은 배우를 잘 섭외해야 하는데"라며 짐짓 걱정 어린 얼굴을 해보였다.


연분홍치마 이혁상 공동정범 두개의 문 김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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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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