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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 김태리(연희 역)는 가공 인물이지만, 1987년 길 곳곳에는 진짜 연희가 있었습니다. 어떤 연희는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삼베를 뒤집어쓰고 '종철이를 살려내라'고 외쳤습니다. 어떤 연희는 학교 캠퍼스 안에서 '스크럼을 짜고' 민주주의를 말하며 정문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습니다. 어떤 연희는 카네이션과 박종철 열사의 사진을 들고 길에 나섰습니다. 수많은 연희가 있었지만 제대로 기록된 연희는 없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1987년의 연희를 찾아 그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편집자말]
신경아 교수는 한국의 여성운동은 70년대 여성 노동자 운동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말한다. 여성 노동자들이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 대학생들이 여성 의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YH 무역 노동자들이 회사 폐업에 항의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한 'YH 사건'은 당시 유신 정권 몰락의 도화선이 됐다. YH 사건 당시 경찰의 진압에 의해 숨진 김경숙 열사(왼쪽)가 친구와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신경아 교수는 한국의 여성운동은 70년대 여성 노동자 운동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말한다. 여성 노동자들이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 대학생들이 여성 의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YH 무역 노동자들이 회사 폐업에 항의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한 'YH 사건'은 당시 유신 정권 몰락의 도화선이 됐다. YH 사건 당시 경찰의 진압에 의해 숨진 김경숙 열사(왼쪽)가 친구와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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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동시에 역사는 '남성의 기록'이 되기도 한다. 집·학교·회사, 그리고 국가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고난 끝에 승리의 열매를 쟁취하고,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는 것도 지금껏 남성에게만 주어진 권리였다. 광복 이후 1~3등급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 946명 중 여성 독립운동가가 12명에 불과한 것을 보라.

영화 <1987>을 통해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재조명되고 있지만, 역시 '남성 중심의 서사'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극 중 여성이 주변적인 인물이나, '누군가의 가족'이 아닌 엄연한 운동 주체였음에도 그것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연희'(김태리 분)는 가상의 인물이자 유일한 여성 캐릭터에 불과했지만, 사실은 1987년을 전후로 수많은 '연희들'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다만 덜 주목받고 덜 기록됐을 뿐이다.

그래서 민주화운동을 단순히 '서울 명문대 586 남성의 승리 서사'가 아니라 지방에서, 수많은 공장에서, 여성들이 만들어낸 투쟁의 역사로 기록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신경아(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한국여성학회 이사, 서울시 성평등위원회 위원 등을 맡고 있으며, 언론에 칼럼 기고를 통해 여성과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왔다.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시민들이 붙여 놓은 포스트잇앞에 선 신경아 한림대 교수.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시민들이 붙여 놓은 포스트잇앞에 선 신경아 한림대 교수.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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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교수는 1979년, 서슬 퍼런 시절에 대학에 입학해 40년 동안 여성운동을 해왔다. 그를 비롯한 강단에 선 대부분 여성학자들은 현재진행형 활동가이기도 하다. 교수와 연구자들이 직접 시위를 주도하고 성명을 읽는다. 아무래도 '여성학'이라는 학문의 변혁성에서 기인한다고 봐야겠다. 그는 인터뷰를 한 이날도 여성단체들이 주관한 '장자연 리스트' 재수사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신 교수가 "100명 정도 된다"고 말하는, 민주화운동 때부터 함께 해온 여성학자들의 삶은 곧 여성운동의 역사이기도 하다. 여성운동의 계보를 찾아, 과거와 현재의 여성을 연결하려는 그를 지난 23일 서울 대방동 여성플라자에서 만났다.

"치마 입은 날은 유인물 뿌리는 날... 70년대 여성 노동자 운동이 뿌리"

- <영화 1987> 재미있게 보셨나요?
"두 번 봤어요. 가족과 한 번, 여성운동 했던 친구들과 한 번. 친구들 사이에선 <1987> 여성 버전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실제로는 연희 그 이상의 인물이 있었는데 사실이 확인되지 않고 자료가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에, 운동을 함께 했던 인물을 허구적으로 만든 거잖아요. 여성의 활동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고, 해석해서 그것을 영화라든가 다양한 콘텐츠로 만들어야죠. <1987>은 충분하게 고민했다고 보고, 전적으로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만 남성의 눈으로 보고 남성이 중심이었다고 생각하는, 그런 의식을 전환하는 부분은 부족했다고 보는 거죠."

- 연희라는 인물은 어떻게 보세요?
"연희라는 인물은 운동을 이어주는 연결자예요. 21세기 사회는 '초연결'의 사회거든요. 각자와 각자를 연결해주는 게 중요한데 여성들이 그런 역할을 했다는 걸 상징하는 거예요. 또 87년 이후에 운동을 열어갈 핵심적인 운동 주체가 될 인물이기도 하고요."

연희가 시위 대열을 따라 걸어가는 모습.
 연희가 시위 대열을 따라 걸어가는 모습.
ⓒ CJ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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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중 연희와 교수님(세대)가 비슷한 점이 있습니까?
"저는 79학번이에요. 당시 박정희 군부독재 체제가 워낙 가혹해서 사실상 아무것도 못했던 시절이었는데도 시위를 했어요. 당시에 경찰이 너무 많고 최루탄이 머리 위에서 터지고 그랬던 게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있어요.

특히 유인물이나 책을 복사하고 배포하는 건 여성들 담당이었어요. 이를테면 맑스나 루카치 책, 운동에 필요한 유인물들은 학교에서 복사하면 걸리잖아요. 그러니까 남대문 복사 가게에 가는 거예요. 학교도 빠지고 복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1987>에서처럼 학교나 거리에서 가방을 열어보잖아요. 그런데 여학생들은 착한 척하면 보내줬어요. 그래서 정말 학교도 빠지면서 복사를 해서 들고 다닌 거죠. 유인물 복사하고 뿌리는 건 중요한 일이잖아요. 주변인이 하는 일이 아니죠. 대충 입고 다니던 제 친구가 (단속에 안 걸리려고) 치마를 입고 화장하는 날이면 '오늘 유인물 뿌리는 날이지?' 물어보고 그랬어요.

그리고 복사를 하면 기다리는 시간 동안 책을 읽었어요. 결과적으로 여성들이 맑스나 루카치를 가장 먼저, 열심히 읽은 거죠."

- 학생 운동을 하다가 여성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농민 운동 동아리 선배가 영상을 보러 오라는 거예요. 비디오 보는 줄 알고 갔는데 농활 영상이 나와요. 여성 농민들이 노동요를 부르면서 '이렇게 밭매면 뭐하나, 돈은 낭군님이 가져가는데' '여자로 태어난 게 죄다. 뼈빠지게 일하면 뭐하나' 이런 내용의 노동요를 부르는 거예요. 그걸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죠.

회사측 구사대가 여성 노동자들한테 똥물을 뿌린 사진
▲ 동일방직 똥물 사건 회사측 구사대가 여성 노동자들한테 똥물을 뿌린 사진
ⓒ 동일방직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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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저는 전태일 분신보다 동일방직 똥물 투척 사건을 먼저 알게 되고 크게 분노했어요. 생명을 걸고 투쟁한 거잖아요. 동일방직, YH, 콘트롤데이타 등등 70년대 후반 여성 노동자운동이 정말 활발했어요. 마산 수출 자유지역에 외국 기업들이 들어와서 마음껏 노동력을 활용하다가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니까 도주하고 그랬어요. 그 기업들 대부분 여성들이 일했거든요. 그래서 마산 창원 지역 언니들 활동이 정말 활발했어요. 직접 만나 보니 정말 멋지고 씩씩하다고 느꼈고요. 여성이 운동의 일부였다고 하는 건 억지고 왜곡이죠."

신 교수는 여성운동의 출발은 분명히 70년대 여성 노동자운동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이 야학 등을 통해 지식인들과 연대를 했고, 여성 노동자들이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서 싸우는 것을 보고 대학생들이 여성 의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80년대 나온 무크지 '여성' 첫 호의 주제가 '여성 노동자, 여성 농민'인 것은 당시의 분위기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정작 70년대 여성 노동자운동은 사회적으로 저평가받고 있다고 신 교수는 지적한다. 그는 80년대 중반 노동 운동 토론회에서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80년대부터 시작된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싸우다가 토론회를 뛰쳐나간 일도 있었다. 그 후 30년이 지난 지금 학계에서도 한국의 노동운동은 중화학공업 남성 노동자 운동이 노동 운동의 본격적인 출발점이라고 보고 있다고 한다. 그 전의 운동은 일종의 '전사(前史)' 비슷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 여성운동이 중산층 중심이고 계급 운동에 소홀하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거죠?
"당시 노동자 농민 운동에서도 여성들이 주변화됐어요. '서포트'만 하는 역할인 거예요. 운동해나가는 과정에서 성차별, 성희롱, 성폭력이 있으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여성 이슈를 내세운 거죠. 그런데 그러면서도 민주화운동 내에서는 '분리주의'라는 가혹한 비판이 일어서 눈치를 엄청 봤거든요. 심지어 여성운동단체 전단지를 봐도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이라는 문구가 함께 나와요. 저희가 당시에 불렀던 여성운동 해방가를 봐도 그래요. '딸들아 일어나라 깨어라 이땅의 노동자로 깨어나라' '여성 해방 노동 해방' 이런 식이라니까요."

1980년대 여성 노동자 운동은 성차별이 쟁점이 됐다. 대한투자신탁에 다녔던 주소녀씨의 '결혼 퇴직' 철회 싸움, 한국통신공사의 전화교환원 김영희씨의 여성직군 조기 정년 철폐 싸움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렇듯 노동 문제는 곧 여성 문제이기도 했다. 당시 여성운동가들은 여성 노동운동을 할 주체들이 성차별 때문에 노동 현장에 붙어있지 못하므로, 성차별을 해결해야 노동 운동 주체가 생긴다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한국 여성운동은 성 모순과 계급 모순이 늘 함께 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 여성운동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이 전국적 조직으로 발돋움하고, 형식적 민주화가 되면서 계급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적 기반이 마련된 이후에야, 비로소 페미니즘 의제가 독자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명박근혜 정부', 여성 운동의 암흑기

신경아 교수 인터뷰가 진행된 서울여성플라자에서는 호주제 폐지의 역사를 담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신경아 교수 인터뷰가 진행된 서울여성플라자에서는 호주제 폐지의 역사를 담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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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광장에 있던 연희 중, 여성 운동으로 방향을 잡았던 이들은 숨 가쁘게 달렸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 여성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1988년 여성의 시민권을 구축하기 위한 '남녀고용평등법'이 시행되고, 비슷한 시기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단체연합, 여성민우회 같은 조직이 만들어진다. 이후 법과 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투쟁이 이어져 성폭력특별법, 여성발전 기본법, 가정폭력 특별법 등이 제정됐다. 2001년 여성부 설립, 2004년 성매매 방지법 시행, 2005년 호주제 폐지 등의 성과를 거뒀다.

1990년대는 여성들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갖게 된 때이기도 했다. 정치적인 목소리를 가진 주체로 등장한 것이다.'서울대 신교수 사건'으로 인해 '성희롱'이 사회적으로 의제화됐고, 2000년 영페미니스트들은 당시 노동·농민·사회 운동 단체에서의 성차별과 성희롱 사실을 고발하는 운동을 벌인다. 성희롱과 성차별은 어떤 운동으로도 덮을 수가 없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총여학생회가 등장하고 성소수자 운동이 등장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부각되며 "나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이들의 독자적인 노선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까지, 페미니스트들은 암흑기를 겪어야 했다. 지금껏 여성들이 운동을 통해서 만들어놓은 법이나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또 사회적으로 '백래시'(반 페미니즘의 반격)가 일어나서 페미니스트 여성들을 괴롭힌다.

- 보수 정권에서 여성 운동도 어려워졌나요?
"강남역 사건 이전까지는 암흑기였어요.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 때 만든 성매매 방지법 집행 기구를 와해시켰어요. 그 이후 정부가 성매매 문제 자체에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 관한 법률이 폐지되고 관련 업무를 국가인권위원회가 담당하게 됐는데, 보수 정부 들어서서 그 역할이 완전히 무력화 된 거예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고용에서 성차별을 규제하지 않았어요. 지방노동위원회에 가도 성차별을 규제할 수 있는 지침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임금격차가 100:64죠, 아직까지. 박근혜 정부는 '평등'을 싫어하고 '차별'이라는 지적도 듣기 싫어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 김대중, 노무현 정부때만 해도 '호주제 폐지'가 이뤄지면서 페미니즘 운동이 힘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 이후엔 '일베' 등의 안티 페미니즘 정서가 강해졌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외환위기 때문에 중산층 가족을 이끌었던 화이트칼라들이 무너졌어요. 평생 고용체계도 끝났고요. 이어서 미국발 금융위기가 오면서 완전히 신자유주의가 체계가 확산되고 무한경쟁 시대가 시작되니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무너진 거예요. 한편으로는 여성은 과거엔 짓밟을 수 있었는데 (지위가 상승돼) 이제 짓밟을 수 없게 되니까, 여성에게 불안과 좌절의 감정을 투사하게 된 거예요. 페미니스트들은 '꼴페미'라는 소리 들을까 봐 어디가서 '일반인 코스프레' 할 수밖에 없었고요."

"생명까지 위협받는 청년 여성들... 청계 피복 노동자랑 뭐가 다른가"

신경아 한림대 교수.
 신경아 한림대 교수.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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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아 교수는 인터뷰 내내 청년 여성들의 현실을 걱정했다. 날이 갈수록 청년 여성들은 취업할 곳이 없어, 하향취업을 선택하게 되는 상황에 몰린다. 또 지난 9년간은 정치적 문화적으로 약자들이 억압된 환경이었던만큼 젊은 여성들이 살아가기 힘든 환경이기도 했다. 2005년 이래 성범죄는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처럼 생명권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신 교수는 "청년 여성들이 더 이상 못참겠다는 생각에 뛰쳐 나와서 강남역에 포스트잇을 붙인 거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

- 최근 여성 운동의 분기점은 강남역 살인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여성혐오 범죄'냐는 의견도 당시에 많았잖아요.
"이건 체계적 폭력이에요. 여성이기 때문에 어린 아기부터 노인까지 어디선가 폭력을 당해서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묻지마 살인'의 피해자는 대부분 여성입니다. 그런데 이걸 단순히 '묻지마 살인'이라고 하면 범인을 잡는 것 이외에는 할 수가 없어요. 여성 대상 범죄를 막기 위해서 법과 제도를 개선할 노력을 하지 않게 되는거죠. 당연시 되는 폭력, 용인되는 폭력, 체계적인 폭력에 여성들이 노출된 거예요. 지금의 연희들이 '이건 여성혐오'라고 문제제기 하는데 자꾸 듣기 불편하다고만 하면 어떡합니까."

- 일자리에서의 성차별 문제도 여성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지점이에요. 청년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서 경제적 조건이 훨씬 열악해 보입니다.
"이를테면 문화산업에 종사하는 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 구성 작가 등등 전부 비정규직인데, 80% 이상 여성이에요. 파견노동자나 아르바이트 같은 불안정한 고용 형태 속에서 아주 장시간 노동을 해요. 그런데 대부분 100만 원도 채 못 받아요. 20대가 지나면 이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업계를 떠나요. 임시직을 전전하기가 너무 힘드니까요. 15시간 동안 일했던 청계피복노동자들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만큼 정말 노동 조건이 열악해요."

1979년부터 2018년까지

농성 도중 전경에 끌려나오는 YH 무역 노조원들
 농성 도중 전경에 끌려나오는 YH 무역 노조원들
ⓒ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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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YH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이 있은 뒤, 얼마 있지 않아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격당해 사망했다. YH 사건은 부마항쟁을 촉발시켜 유신 정권 몰락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2016년엔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가 거리에 쏟아졌고, 그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됐다.

신 교수는 이에 대해 "광산 속에 유독가스가 조금이라도 나오면 가장 먼저 카나리아가 지저귄다고 한다. 그런 것처럼 불평등과 차별적 환경에 참지 못하고 먼저 시작하는 여성들의 감수성이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YH 무역 여성노동자들의 외침과 강남역에 모인 여성들의 분노는 이렇게 연결됐다.

- 요즘 페미니스트들은 과거 여성 활동가들의 흔적을 찾고 싶어해요. 자신 이전에도 열심히 싸워온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달으면 덜 외롭다고 합니다.
"여성들의 헌신과 희생이 제대로 조명되고 있지 않아요. 저는 70년대 노동자운동, 특히 YH 사건은 군사 독재정권이 무너지는 중요한 계기잖아요. 당시 김경숙 열사가 스물한 살의 나이로 경찰의 폭력진압에 목숨을 잃었어요. 정말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가정을 부양하다가 노동운동에 헌신(당시 YH노조 조직 부차장)하게 된 과정이 그가 남긴 일기에 드러나 있어요. 내년이 김경숙 열사 40주기라서, 관련해서 연구 발표를 준비중에 있어요"

김경숙 열사의 YH무역 사원증
 김경숙 열사의 YH무역 사원증
ⓒ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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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새롭게 역사를 쓸 2018년의 연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최근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성이 화장실에서 이유 없이 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잖아요. 그만큼 여성들 입장에선 먹고 살기가 힘들고 생명권도 위협받는 시간이에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고 함께 싸워야 해요. 그나마 2018년의 연희는 성차별, 성평등운동을 전적으로 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지고 있어요.

다만 '나'와 '우리'를 동시에 생각해줄 것. 내가 뭐가 불편한지 생각하면서, 동시에 빈곤하고 불평등한 상황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간다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여성운동이라는 큰 우산 안에 노동운동, 장애인 운동, 계급 운동 등을 가지고 들어와서 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젊은 여성들은 똑똑하고 능력 있으니 잘 해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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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그때 여성들 고추장으로 '전두환 타도' 쓰며 외쳤다"


태그:#여성운동, #1987,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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