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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탄광촌부터 전라도 끝자락까지 1960년대 서민의 딸로 태어나 고군분투해온 망원시장 여성상인 9인의 생애를 담은 책 <오늘은 맑음>이 나왔다. 제각각 무늬는 다르지만 그녀들의 삶의 고비마다 겹치는 궤적은 이 땅의 5060세대 여성의 보편적인 서사를 짐작게 한다. 또한 그녀들의 이야기에는 자영업자로 생존하기 위한 분투가 담겨 있다. 구술생애사 작가 최현숙이 여성 필자 9인과 함께 이를 채록했다. 이 기사는 그 가운데, 망원시장에서 11년째 떡집을 운영 중인 '종로연떡방'의 황성연 상인을 만난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기자말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망원시장과 사랑에 빠진 사연

망원동에 드나든 지 올해로 8년째다. 2011년, 당시 남자친구가 망원동에 둥지를 틀었다. 그때 집값이 다세대주택 2층 투룸에 전세 6000만 원, 걸어서 10분이면 망원역이고 버스 한 번이면 합정역에 닿는 위치였다. 무엇보다 그 동네의 매력은 망원시장에 있었다. 만 원만 있으면 과일, 생선, 주전부리까지 두 손 가득 먹거리를 '득템'하는 게 가능했다. 주머니 가벼운 연인에게 망원시장은 보물창고 같은 곳이었다.

2012년, 시장에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합정역에 한 대형마트가 입점한다는 소식에 상인들은 셔터를 내리고 시위에 나섰다. 텅 빈 시장은 시꺼먼 구멍처럼 보였다. 인근 골목길마저 을씨년스러웠다. 좌판 뒤에 상인이 없으면 시장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시장이 없으면 이 동네 활기도 거품처럼 사라지겠구나 싶었다. 다행히도 대형마트와의 싸움에서 절반의 승리를 따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6개 품목을 제한하고 길 건너 익스프레스 지점을 폐쇄하는 조건이었다. 나는 안도했다. 그들은 전처럼 자리에 남아 망원동을 북적이게 하리라.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에도 나는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망원동을 찾았다. 친구들이 하나 둘 이사와서 단골 술집까지 생겼다. 친근한 그 동네에 신혼집(앞의 남자랑 다른 남자)을 꾸리고 싶었지만, 집값이 턱 없이 올라 있었다. 이제는 다세대주택 2층 투룸이면 전세로 1억 5천만 원을 줘도 못 들어간다. 아쉬움을 뒤로하던 그때, 망원시장을 찾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왜 그리 야속하던지!

이상하게 미련이 남은 그 동네에 다시 발들일 기회가 찾아왔다. 2017년, 합정에 있는 말과 활 아카데미에서 구술생애사 강의를 듣고 참에, 망원시장 여성상인들의 이야기를 다뤄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왔다. 9명의 필자가 각각 9명의 상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채록해서 책으로 펴낸다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래도록 마음에 품어온 동네의 풍경을 완성하는 사람들은 어떤 세월을 말해줄까? 그들은 어떻게 대기업과 싸울 용기를 냈을까? 파이팅 넘치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게도 그 용기가 전염되지 않을까? 날 좋은 4월, 이런저런 기대를 안고 망원시장 여성상인을 만나러 나섰다.

 여성상인들의 젬베 모임. 맨 오른쪽이 황성연.
 여성상인들의 젬베 모임. 맨 오른쪽이 황성연.
ⓒ 이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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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시장의 숨은 실세, 황성연 사장님을 소개합니다

내 인터뷰 짝꿍은 11년째 떡집을 운영하는 '종로연떡방'의 황성연 사장님이다. 동그란 얼굴에 찹쌀떡같이 흰 피부, 화통한 웃음소리가 인상적인 분이다. 알고 보니 그녀는 망원시장의 마당발로, 여성상인들의 모임인 해당화·십자매에서 맹활약하며 술로 인연을 엮어내는 캐릭터였다.

나한테도 첫 인터뷰에서 술 좀 할 줄 아느냐고 묻더니, 두 번째 만난 날은 숫제 소주부터 까고 시작했다. 2차로 그녀가 직접 만든 맥주를 마시고는, 인터뷰는 집어치우고 비몽사몽 정신에 여성상인들의 젬베 모임에 끌려가 트라이앵글까지 치다왔다. 타악기들의 하모니가 따뜻해서였을까. 나는 엇박자만 내다가 의자에 앉은 채로 까무룩 잠들었다. 그 장면은 황성연 상인이 지나온 수많은 나날을 짐작하게 했다. 형형색색의 사람들을 초대해서 그들의 개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버무린 다음, 모자이크 같은 그림으로 완성해왔겠지.

그날 이후, 나는 철저히 그녀의 팬이 되어 기억의 파편들을 주워 담았다. 황성연이 딸로서, 누나로서, 엄마로서 겪었던 경험은 그 나이 때 다른 여성들의 삶의 궤적과 겹치고, 98년 IMF사태며 2000년대 펼쳐진 대자본의 무차별적인 확장은 이 땅의 고단한 자영업자들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기에 황성연의 구술사는 황성연만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1960년대 전국 각지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 평범한 5060세대 여성들의 서사이자, 오늘도 고군분투하는 자영업자의 생존기다.

 고등학생 때의 황성연
 고등학생 때의 황성연
ⓒ 황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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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1983년] 생선가게 둘째 딸, 수줍던 여중생에서 반공 연사로

황성연은 1964년 충주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네 살에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중앙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던 엄마는 새벽 댓바람부터 물건을 떼러 나갔다. 삐그덕 쇳소리가 나면, 아이는 졸린 눈을 부비고 나가 대문을 닫았다. 문간방 셋집에 사느라 주인집 눈치를 살피던 때였다. 동생을 끌어안고 잠드는 것도 네 살짜리 몫이었다. 동생을 데리고 놀러 나가면 친구들이 "넌 오지 마"하면서 문을 딱 닫았다. 그게 하나도 안 슬펐단다.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다고, 아이들도 달래줄 사람이 있어야 운다. 어린 황성연은 그렇게 일찍 철이 들었다.

그녀는 학창시절의 자신을 "있는 듯 없는 듯한 애"였다고 회상했다. 수줍던 여중생 시절, 다락방에서 언니가 사다 준 세계문학전집과 아버지의 고장 난 턴테이블을 벗 삼아 지냈다.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책 속 인물들을 만나면서 삶의 태도가 바뀌었다.

"스스로 커야 하고, 내가 내 인생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고등학생이 되어 이 결심을 실현할 기회가 왔다. 어릴 적부터 "이 연사~"하고 외치는 게 꿈이었다던 그녀는 반공웅변대회에 나가서 장려상을 받았다. 그때부터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폭발했단다. 유신 정권의 의도와는 달리, 황성연은 이 일을 계기로 세상에 목소리 내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러니한 결과다.

 20대 시절
 20대 시절
ⓒ 황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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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1990년] 경리 시절 "여자는 진급이 없어요"

80년대 여상을 졸업한 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황성연도 경리로 취직했다. 커피 타기는 필수, 잔심부름도 하지만 주 업무는 문서 타이핑이었다. 우체국, 세무서, 구청 등을 다니며 온갖 서류를 보냈다. 창구 담당 '언니'들하고도 곧잘 친해져서 안 되는 서류도 급행으로 곧잘 통과시켰다. 눈치 빠르고 일머리 있는 그녀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왔다. 월급은 대리급 이상이어도 진급은 되지 않았다. 여자라는 이유에서다.

"스물다섯부터 꾀가 나서 일하기가 싫더라고요. 회사에서도 젊은 애들 데려다가 일 막 부리고 싶은데 이제는 나이가 있어서 그러지도 못하고, 나갔으면 하는 그런 게 있죠."

남성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여성에게 허락한 일자리는 딱 거기까지였다. 회사는 더 이상 어리지도, 만만하지도, 가르칠 것도 없는 유능한 여성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알아서 자리를 비워주는 것 외에는.

스물일곱, 미련 없이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그 당시 기준으로 "나이가 있어서" 이직이 어려웠다. 옷가게를 열어보고 싶었는데 모아둔 돈으로는 어림없었다. 구름같이 뜬 그 시간에 1년 전 형부를 통해 소개받았던 남자한테 연락이 왔다. 회사에서 나온 미역국을 보고 "황성연 씨 생일이 내일인데"하고 중얼거리더란다. 그걸 형부가 듣고 언니한테 전해줘서 다시 만나보기로 했다. "외모는 좀 떨어져도 진중하고 자기를 끔찍하게 위하는" 이 남자와 1990년에 결혼한다.

 신혼여행으로 떠난 제주도에서
 신혼여행으로 떠난 제주도에서
ⓒ 황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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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2007년] IMF 사태, 전업주부를 일터로 소환하다

아이가 여섯 살이 될 때까지 황성연은 전업주부로 지냈다. 남편은 카센터를 운영하다가 기업에 소모품을 대주는 납품업으로 업종을 바꾸었다. 몇 년은 꽤 벌었다. 1998년 IMF가 터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거래처들은 구조조정을 하면서 당장 새어나가는 돈부터 줄였다. 급한 불을 끄고 나자 대기업은 계열사를 만들어서 일감을 몰아줬다. 해가 갈수록 남편 수입은 줄어들었다. 애도 컸겠다, 이제 그녀가 집 밖으로 나설 차례였다.

"기술 없는 사람들이 그래요. 쉽게 접할 수 있는 게 음식점, 치킨집 이거잖아요. 저는 장사하는 데 겁이 없었어요. 엄마가 장사해서 아이 여섯을 먹여 살렸잖아요. 내가 잘하는 게 뭘까 생각해보니까 그게 음식점이었고, 먹는 걸로 시작해서 먹는 걸로 끝을 낸 거죠. 음식점으로 시작해서 떡집으로."

처음에는 반지하 가게에서 갈빗집을 열었다. 테이블 네 개 놓고 시작한 장사가 입소문을 탔다.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IMF가 지나가고 나니 구제역 파동이 오고, 값싼 프랜차이즈 고깃집들이 속속 생겨났다. 아무리 손맛이 좋아도 속수무책이었다.

"내가 신림에서 식당을 10년 했어요. 2002년도인가? 구제역 파동이 있었잖아요. 그때 갈빗집을 했는데, 한두 달 있다가 구제역이 사라지고 나니까 돈데이 같은 싼 집들이 생겼어요. 3900원짜리. 저는 처음부터 재료 좋은 거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하이포크 고기(돈육 브랜드 중의 하나)만 썼거든요? 그게 장사가... 안 찾아오는 거야. 손님이. 그래가지고 반찬을 많이 주는 밥집으로 바꿨어요. 찬모를 더 쓰게 되고 하면서 너무 힘들어 버린 거야. 좀 쉬자고 1년을 쉬었는데, 쉬어보면 알지만 백만 원 못 벌지만 백만 원을 쓰잖아요. 1년을 쉬니까 애기 아빠가 돈을 버는 데도 삼천 이상을 까먹더라고요."

어쨌든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뭘 해야 할까 궁리하던 차에 솔깃한 소식이 들려왔다. 아는 동생이 화곡동에서 떡집을 연 지 3년 만에 집을 두 채나 샀다는 얘기였다. 밑져야 본전, 망설일 게 없었다. 돈 되는 장사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무작정 그 집을 찾아갔다.

"가게 하루 매출이 백몇십 만 원씩 되고, 주문 들어오고 하면 한 달에 돈 천만 원 이상은 벌고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나도 저런 장사 해보고 싶더라고요. 내가 떡을 배우겠다 그랬더니 그 동생이 반대를 하더라고요. '누님 너무 힘들어요. 형님이 아니고 누님이 하면 저는 반대에요. 그래도 하고 싶으면 한번 배워보세요' 하더라고요.

일주일 째 되니까 그 동생이 누님 정도는 해도 되겠대. 일해 본 사람이라 다른 거 같다고. 그래서 거기서 삼 개월을 배웠어요. 월급은 안 받았어요. 오히려 돈을 내고 배워야 되는데, 나중에 가게를 차리니까 동생이 백만 원을 주더라고요. 고맙죠."

 애 백일 잔치하던 날의 황성연
 애 백일 잔치하던 날의 황성연
ⓒ 황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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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기서 장사해야겠다" 운명처럼 다가온 망원시장

"그리고 나서 가게를 알아보는데, 제가 신림동에서 왔다고 했잖아요. 거기서 가게 하려고 참 많이 알아봤거든요. 그런데 그 지역 자체가 고여 있는 곳이에요. 고시촌은 젊은 사람들이 많고 어르신도 별로 없고 해서 떡을 해 먹을 만한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다른 지역을 알아보는 찰나에 애기 아빠가 동창을 우연히 만난 거예요. '우리 망원동에 사는데 되게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너 한번 와서 봐' 이랬어요. 그분은 영등포에서 장사를 천막 그런 거를 했었어요.

그러는 바람에 망원동이 어딘지도 모르고 물어물어 왔어요. 내가 그때 망원동에 처음 들어왔을 때 요 사거리를 들어왔거든요. 놀래서 가만 서 있었어요. 사람이 너무 많아가지고. '난 여기서 장사해야겠다' 그때는 아케이드 공사가 안 되어 있었고 천막 레인보우 파라솔이 쳐 있고 그랬어요."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떡을 배워야겠다 싶어서 3개월 만에 마스터하고, 첫눈에 이 시장이다 싶어서 빚까지 내서 순식간에 계약했다. 우유부단한 걸 제일 싫어한다는 황성연은 결단을 한번 내리면 그대로 쭉 밀고 나갔다. 인터뷰하는 내내 작고 단단한 탱크가 생각났다. 웬만한 장애물에는 눈도 깜짝 안 하고, 자기 갈 길을 만들어나가는 맷집 센 탱크.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종로연떡방'은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망원시장의 한때
 망원시장의 한때
ⓒ 이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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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내가 장사를 시작할 때 컨셉을 잘못 잡은 게 뭐냐면 떡을 낱개로 포장했어요. 예쁘게 하나씩 손으로 일일이 싸는 포장을. 백설기 안 팔아, 절편 안 팔아, 기본 떡들은 안 팔아요. 유자로 만든 떡, 비트로 한 떡, 멥쌀 사이에 찹쌀이 끼인 떡….

특이하고 좋은데 너무 특이해서 안 팔리는 거야. 맨날 한 보따리씩 남고 그랬어요. 강남의 상점, 백화점을 보고 다니면서 떡을 좀 더 세련되게 하고 싶었던 거야. 그런데 망원시장하고 너무 안 맞았던 거예요. 처음에 나는 안 먹으면 니네가 손해야 이런 마음으로 팔았어요. 6개월 만에 포기를 하고 이렇게 백설기를 크게, 콩설기도 크게 해서 내놓으니까 그때부터 하나씩 나가기 시작하고.

장사가 되긴 하는데 원금을 갚고 이자를 줘야 되잖아요. 그게 너무 힘든 거야. 오늘은 누구네 빚 갚아야 하는데…. 생활하고 빚 갚고 원금 갚고 이자 갚고. 제 동생한테 가져온 4400만 원은 4년 만에 갚았어요. 어느 순간 빚이 하나도 없는 그 순간, 나는 성공했다. 그 와중에 저축한 걸 모아서 집을 샀어요. 빚 다 갚고 3년 만에 집 산 거예요."

[2008~2014년] 상인회 활동 "백 프로는 없어요"

새벽 다섯 시 반에 나와 저녁 열 시까지 일해야 하는 고된 나날이었지만, 황성연은 자기 가게 일 뿐만 아니라 상인회 일에도 달려들었다. 88개 점포 사장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상인회는 2008년에 아케이드(지붕) 설치 사업에 나선다. 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일을 계기로 그녀는 상인회에서 없던 직함까지 만들어줘서 여성이사로 활동하게 된다.

시장연구자들은 흔히 재래시장에 아케이드(지붕)을 씌웠느냐 안 씌웠느냐로 그 시장의 결집력을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독립된 사업체를 운영하는 상인들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황성연의 말에서 그 과정의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우리가 여기 2008년도에 왔나. 내가 씩씩하잖아요. 사람을 쉽게 빨리 사귈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술 먹는 모임에 몇 번 참여하는 거예요. 허물없이 쉽게 친구가 되거든요. 거기서 이제 나 성격 활달하고 이런 거 알고 상인회 일을 맡기기 시작해서 여성 이사로서 오랫동안 일했지. 들어온 첫해 다음 2009년부터 언제냐 2014년도까지 했어요. 그 와중에 홈플러스 때문에 투사로다가 1년을 보냈지…. 우리 부부는 상인회 일을 처음부터 둘이 했어요. 남편이 지금 6대 회장인가 봐요. 나 혼자만 잘 사는 게 아니라 다 같이 잘 살자는 사고를 가진 사장님들이 상인회 활동을 해요.

전통시장에 들어오는 사람들한테는 여러 가지 혜택이 있어요. 여기는 지붕을 씌웠잖아요. 아케이트가 본인 부담이 아니에요. 나라에서 90퍼센트를 내주고 10퍼센트만 자부담이이에요. 이게 2008년도에 한 거예요. 우리가 들어올 때 공사를 준비하는 중이었어요. 공사를 극렬하게 반대하시는 분들도 있고. 그분들이 반대했던 거는 이렇게 지붕을 해놓으면 답답해가지고 사람들이 안 올 수도 있다, 다른 시장하고 견줘서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봐라 하는 거지. 모든 시장이 아케이트 공사를 한 건 아니니까.

저는 설득하는 정도까진 아니고 그때는 이미 돈을 내라고 하는 단계였어요. 그런데 안 내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모든 게 백 프로라는 건 없거든. 어느 사회든지. 그럴 것 같죠? 아니에요. 나중에 1년 후인가 2년 후에 아케이트 공사 끝나고 나서 받은 경우도 있었어요. 우리는 죽었다 깨나도 받아야 되는 거야. 그럼 낸 사람은 바보야? 반발이 생겨서 돌려줘야 돼요. 그래서 이걸 받아내요."

 아케이드 설치 후의 망원시장 전경
 아케이드 설치 후의 망원시장 전경
ⓒ 이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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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매(열 명의 여성이사들), 해당화(해가 갈수록 당당하고 화려한 여자들), 육룡이나르샤(용띠 남자들). 모두 아케이드 사업을 하며 만들어진 상인들의 사모임이다. 앞의 두 개는 황성연이 참여하는 모임이고, 마지막 것은 남편이 가는 모임이다. 이 부부는 상인회 멤버들과 함께 모세혈관처럼 망원시장의 곳곳을 누비며 탄탄한 네트워크를 만들어냈다. 이때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이렇게 쌓아둔 '신뢰'가 '연대'라는 커다란 힘으로 이어질 줄은.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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