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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직하던 2016년 3월 28일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이 작성한 '사법행정위원회 위원 후보자 검토' 관련 문건. 후보자 추전 명단 중 1순위는 적색, 2순위는 청색, 3순위는 흑색으로 분류돼 표기돼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직하던 2016년 3월 28일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이 작성한 '사법행정위원회 위원 후보자 검토' 관련 문건. 후보자 추전 명단 중 1순위는 적색, 2순위는 청색, 3순위는 흑색으로 분류돼 표기돼 있다.
ⓒ 참여연대 공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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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블랙리스트는 있는가, 없는가.

있다고 하기엔 뭔가 부족하고, 없다고 하기엔 께름칙한가. 블랙리스트라고 하면 누군가 형사책임을 져야 하고, 아니라고 하면 그저 과잉충성 정도로 넘어갈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있다는 사람은 진보이고 없다는 사람은 보수일까.

작년 대법원의 법관 학술행사 축소의혹으로 불거진 사법권 남용 사태가 1년을 끌고 있다. 그 사이 국정농단이 드러나 대통령이 탄핵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지만 대법원의 '사법농단' 사건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조차 없다.

지난 22일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발표로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여전히 당시의 사법행정 관료판사들은 묵묵부답이다. 아니 오히려 떳떳하다. '블랙리스트도 없는데 왜 난리냐'는 반응이다. 과연 그럴까. 논쟁 대신 팩트로 답변하고자 한다.

"판사들 뒷조사 파일, 놀라지 마세요"

사법부가 왜 이 지경까지 왔을까. 애초의 시발점으로 돌아가보자.

"행정처는 정보를 취합하는 소스가 엄청나게 많아요. 예를 들면 연구회 모임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 내용도 다 알고 있어요. 기조실 컴퓨터에 보면 비밀번호가 걸려있는 파일들이 있어요. 그 비밀번호를 판사님이 어차피 다 풀 거 아니에요? 그러면 거기에 판사들 뒷조사한 파일들이 나올 텐데, 그러더라도 놀라지 말고 좋은 취지에서 한 거니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2017. 2. 14. A 판사의 경위서 중에서)

사태의 시작은 이렇다. 작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로 발령받은 직후 A 판사가 행정처 B 판사(고등부장급)에게 들었다는 충격적인 말이다. 사법부는 격랑에 휩싸였고, 판사들은 분개했다. B 판사는 부인했고 진실게임 양상이 벌어졌다. 하지만 2차례의 진상조사결과 A 판사가 들은 말은, 불행하게도 사실이었다.

판사 성향파악, 청와대와 사건 교감... 명백한 불법

추가조사위 결과 확실히 밝혀진 사실이 있다. ▲ 법관의 독립을 수호해야 할 대법원과 산하기관인 법원행정처가 되레 판사들을 광범위하게 뒷조사하고 성향을 파악해 설득·회유하려 해왔다. ▲ 권력분립의 원칙을 망각한 채 국정원장의 선거개입 판결 전후에 청와대와 긴밀하게 교감을 나눴다. 또 법원행정처가 나서서 ▲ 판사들의 학술행사를 막거나 축소하려고 시도했고, ▲ 판사들의 자율적인 선거에 개입, 특정후보 당선을 위해 시나리오까지 작성했으며 ▲ 심지어는 판사들의 인터넷 커뮤니티, 언론 기고, SNS 활동마저 통제하려 했다.

쉽게 요약해본다. 판사 뒷조사와 성향 파악, 청와대와 판결 교감, 학술행사 무력화 시도, 판사 선거 개입, 판사 SNS와 커뮤니티 통제. 이것이 판사들의 재판을 지원하는 부서라고 자처하는 법원행정처에 소속된 판사들이 한 일이다. 이쯤되면 거의 범죄 수준이다.

공개된 법원행정처의 문건을 보면 판사가 작성한 문서라기보다 정보기관원의 보고서로 여겨질 정도이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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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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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심 판결 앞둔 원세훈 사건 "행정처도 불안하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먼저 청와대와의 '교감'이 드러난 <원세훈 전 국2정원장 판결선고 선고 관련 각계 동향> 문서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이 1심에서 선거개입 부분에 대해 일부 무죄를 선고받은 뒤였다. 청와대가 "(청와대가) 항소기각(1심의 선거개입 무죄 유지 : 기자주)을 기대하면서 법무비서관실을 통하여 법원행정처에 전망을 문의"했다고 적혀 있다. 이에 대해 "(법원행정처가) 우회적, 간접적인 방법으로 재판부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밝히고 "행정처도 불안해하고 있는 입장임"이 청와대에 보고됐다고 문건은 밝히고 있다. 도대체 뭐가 불안했던 걸까.

그러나 예상과 달리 2심 재판부가 선거개입을 유죄로 판결하자 청와대가 "내부적으로 크게 당황"하고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큰 불만을 표시하며 전원합의체에 회부해줄 것을 희망"했다는 입장까지 담겨있다. 이에 대해 법원행정처는 "법무비서관을 통해 사법부의 진의가 곡해되지 않도록 상세히 입장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화답했다.

문건은 향후 대응 방향으로 "기록 접수 전이라도 특히 법률상 오류 여부 면밀히 검토"하고 "최대한 신속 처리"를 제시했고, 상고심의 쟁점을 예상하면서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무효소송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우려했다. 문건만으로도 재판에 우회적으로 관여하고 청와대와 수시로 교감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판사회의 경선에까지 개입... 특정 후보 지원 방안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회의 의장 경선 대응방안>이라는 보고서도 충격적이다. 의장 경선에 나설 판사들의 출마경위, 성향, 소속 연구회 등이 담겨있다. 보고서는 A 판사가 선출되면 법원행정처를 비판하거나 각종 사법행정에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B 판사를 적극 지원하는 계획을 밝힌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다수의 일반 판사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선거 공약 발굴이 필요하다"면서 기획법관과 C 판사를 지원단으로 지목했다. 경선 당일에는 "B 판사를 추천하고 지지 발언을 할 판사를 섭외"하도록 했다. 심지어는 B 판사가 정견 발표할 내용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줬다.

판사들의 사법행정 참여를 위해 고등법원별로 사법행정위원회가 만들어지자 위원 선정에도 관여했다. 법원행정처는 "균형 감각을 갖춘 법관,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법관, 정치적 색깔이 없으면서도 오피니언 리더 역할을 하는 법관"을 추천 기준으로 세우고 후보자 명단을 작성했다. 명단에는 판사들 개인별로 성향(온건, 강성 등), 우리법연구회 등 가입여부, 가족관계, 성격 등이 기재되어 있으며 1~3순위로 구분돼 있었다. 고등법원에 판사들의 성향이 담긴 자료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자율적으로 결정할 위원 선정에도 개입한 정황이 나타난 것이다.

법원행정처는 특별한 권한이 없는 위원회의 법관 선정도 이렇게 정성을 쏟았다. 하물며 형사합의부 재판장이나 영장 전담판사와 같은 중요 재판을 하는 자리나, 승진인사로 평가되는 고등법원 부장판사, 법원장 인사에는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자료를 수집, 축적했을지 불보듯 훤하다. 물론, 당장 특정 판사에게 인사상 불이익이 돌아가지는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한 번 '강성'으로 분류된 이상, 요직으로 가기란 어려운 상황이었음에 틀림없다.

법원행정처가 우리법연구회, 국제인권법연구회 그 중에서도 특히 인사모(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점도 강성을 걸러내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판사들의 인터넷 카페를 개설한 판사와 사법개혁 관련 글을 기고한 판사에 대한 회유, 설득 방안은 집요하기까지 하다.

엘리트 판사들이 댓글, 조회수 세는 법원행정처

법원행정처에는 수십명의 판사들과 수백 명의 직원들이 사법행정을 책임진다는 자부심으로 일한다. 판사들만 보더라도 지역의 지방법원급 규모와 맞먹는다. 일선 법원에서 근무하는 이들에겐 선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법원 최고의 엘리트로 꼽히는 그들이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한 일이란 게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법원 게시판과 인터넷에 올라 온 글을 분석하고, 조회수, 댓글수까지 세는 것이었다니 참담하다. 그래놓고 판사들의 뒷조사에 켕기는 게 있었던지 "비공식적 정보수집 사실이 드러날 경우 '법관사찰' '재판 개입' 등 큰 반발이 예상되므로 철저한 보안 유지 필요"라고 하면서 "대외적으로는 공식적으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점검이 진행된다는 외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내용은 더 있다. 당시 실세였던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이 사용한 컴퓨터 하드디스크는 법원행정처의 비협조로 접근도 못했고 암호가 설정된 파일 760개(유실 파일 300개 포함)는 열어보지도 못했다. 법원행정처가 조직적으로 증거인멸을 시도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연히 재조사해야 한다. 다행히 김명수 대법원장도 24일 추가조사 의지를 밝혔다.

이 참에 기획조정실 뿐 아니라 법원행정처 내 다른 부서들도 조사해야 한다. 이번에도 판사들의 인권 운운하면서 물타기를 시도할 세력들이 있다면 정공법대로 검찰수사나 국정조사 등 외부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 물론 최종 책임은 당시 대법원장에게 있다. 모든 판사의 인사권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고, 대법원장의 의중에 따라 법원행정처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대법원장까지 성역없이 조사해야 한다.

"일제나 독재 시대 감시와 통제가 법원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퇴임식을 마친뒤 대법원을 떠나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퇴임식을 마친뒤 대법원을 떠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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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나 독재 시대에서 하던 '감시와 통제'가 판사 사회에서도 행해지다니…."

24일 법원내부 게시판에 올라온 어느 판사의 한탄이다. 2018년의 대법원은 아직도 감시와 통제를 걱정해야 하는 실정이다.

역설적이게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작년 9월 법원을 떠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오랜 역사적 교훈을 통해 이룩한 사법체계의 근간이 흔들리거나 정치적인 세력 등의 부당한 영향력이 침투할 틈이 조금이라도 허용되는 순간 어렵사리 이루어낸 사법부 독립은 무너지고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스스로 재임기간 사법부 독립과 민주주의 후퇴를 자초했다. 1950년대 전후 혼란에서조차 대법원장이 지키려고 했던 사법부독립이 21세기에 무너진 순간을 경험하고 말았다.

법관 블랙리스트보다 더 무서운 건

1956년 2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 개회식에 사법부를 강하게 공격하는 발언을 한다. 당시 대법원에 불만이 많았던 그는 "경찰이나 검찰에서 조사해서 법원에 넘기면 법원에서는 그냥 백방하여 판결은 범행과 상관이 없는 판결을 한다"면서 "무슨 중대한 문제가 생길 적에는 행정부와 협의해서 정부의 위신과 법률을 공평히 참고해서 판결하는 까닭으로 큰 위험은 없는 것"이라고 대법원에 충고한다.

특히 '행정부와 협의' 운운하는 발언이 나오자 진위를 묻는 목소리도 커졌다. 논란이 되자 며칠 뒤 김병로 대법원장은 "나는 단언하노니 오늘날까지 재판에 있어서나 기타 사법운영에 있어서 나의 소신과 양심에 어그러진 판단을 한 일은 한 번도 없고 장래도 없을 것을 확언한다"며 "독립된 사법권 운영에 추호도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일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논란은 이내 잠들었다.

국정원장 선거개입 사건을 두고 청와대와 정보교류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전후, 국가의 체계가 정비되지도 않은 때에 한 일을 지금 사법부는 왜 못하고 있는가.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블랙리스트는 없었다'고 앵무새처럼 떠드는 이들이 있다. 특히나 당시 양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에 관여한 판사들 중에도 진상조사를 방해하고 물타기를 하려는 이들이 많다. 국정농단에 버금가는 사법농단이라는 범죄를 저질러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이들이 나는 법관 블랙리스트보다 더 무섭다. 법원은 거듭나야 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덧붙이는 글 | 김용국 기자는 법원공무원으로, 법률책 <생활법률상식사전>, <판결 vs 판결>을 썼습니다.



태그:#블랙리스트, #사법부, #양승태, #법관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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