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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말 영동군의 부역혐의자 호송장면.
사진 출처, 박도사진집
▲ 영동군의 부역혐의자 호송장면 1950년 9월 말 영동군의 부역혐의자 호송장면. 사진 출처, 박도사진집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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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기름칠이 아니라, 담배 따서 그런 거예요"

강도식은 담배를 따다가 잎에서 흘러나온 끈적끈적한 진액으로 새카매진 손을 놓고 말했다. 1950년 9월 28일경 마을에 들이닥친 연합군에게 하소연했다. 하지만 군인들은 막무가내였다. 담배 진으로 새카매진 손을 보고, 북한군 기갑부대 정비병으로 동원된 부역자로 판단한 것이다. 연합군은 3인1조로, 미군과 일본인, 그리고 한국군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영동읍 고자리(현재는 영동군 상촌면 고자리) 쪽에서 넘어와 영동읍 당곡리를 다니며 청년들이 보이면 무조건 붙잡아 들였다. 강형식(1929년생. 2015년 작고)도 체포되었다. 이유는 없었다. "잠시 아랫마을에 가서 조사하고 집으로 돌려 보내주겠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당곡리 청년 10명이 영동읍 마차다리(현재 영동 제1대교)로 연행되었다. 이들에게 심문이나 조사 절차는 없었다. 무조건 기차에 태워져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부산에 있던 동래임시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약 5개월 후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전쟁포로들을 수용하는 곳이다. 수용자의 주 대상은 전쟁에 참여한 군인이다. 즉 문자 그대로 prisoner of war, 약칭 POW인 것이다. 부수적으로는 전쟁 시기 적대국에게 이용되어, 교전국에 대항하는 부역자로 이용된 민간인을 수용시키기도 한다.

1951년 6월까지 북한 인민군 포로 15만 명과 중공군 포로 2만 명 등 최대 17만 3천 명의 포로를 수용하였고, 그중에는 여성 포로도 300명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공식적인 설명에 불과하다. 부역자도 아니고 전쟁포로는 더군다나 아닌 민간인이 아무런 혐의 없이 거제도포로수용소로 강제 연행되어 3년 가까운 세월을 살았던 사연이 있다.

강형식이 기록된 포로수용소 수감자 명부
▲ 포로수용소에 연행된 영동군 민간인 명부 강형식이 기록된 포로수용소 수감자 명부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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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에 북한군 대위가 된 고진구

당곡리에서 연행된 강형식은 북한군 점령시절, 북한군의 강요에 의해 탄약을 나르는 심부름을 옥천까지 한 적이 있다. 또한 3차 의용군에 강제 모집되어, 사흘간 걸어서 충북 보은까지 갔다가 국군의 총격에 대열이 분산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강형식은 의용군에 모집되었지만 총 한 번 잡아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당곡리를 포함해 영동군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부역(附逆) 전력이 있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강형식의 친형 강도식은 담배 따다가 손이 새까맣다는 이유로 끌려갔다. 그는 당시 35세로 북한군의 부역에 동원되거나 의용군을 다녀온 전력이 전무했다. 당곡리에서 연행된 10명 중 부역에 동원되거나, 의용군에 갔다 온 이는 강형식 한 명에 불과했다.

영동군 각 읍·면에서 연행된 청년들은 영동읍 마차다리와 영동국민학교, 그리고 회동리에 집결했다. 이때 모인 사람이 최소 300명이다. 이들 중에 최고위급은 북한군 대위였다. 그 주인공은 영동읍 부용리의 고진구(6.25당시 19세)다.

그는 해방 후 민족청년단 영동군지부 학생과에서 활동했다. 즉 우익단체 활동을 한 것이다. 그런데 북한군 점령 시절에 하루 강제로 부역에 동원되었다. 영동역으로 가서, 기차에 실려 온 북한군 부상병들을 2인1조로 해서 북한군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던 구세군 병원으로 이송시키는 일을 했다. 주간에는 폭격 때문에 할 수 없었고 야간에 밤새워했다. 그러다가 1950년 9월 27일 강세원씨 집 앞에서 다른 이들 4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영동국민학교로 글려 간 고진구는 어떠한 심판이나 조사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미군이 작성한 고진구의 서류에 '북한군 대위'라고 기재되었다. 의용군에 간 적도 없는 고진구가 졸지에 대위가 된 것이다. 그는 300명 이상 체포된 영동의 청년들 중 최고위급 인물이 되었다. 미군 흑인병사 6~7명은 고진구를 감시했으며, 이러한 사실이 거짓임이 밝혀질 때까지 수차례 구타를 당했다.

황종연 증언 모습
▲ 황종연 증언 황종연 증언 모습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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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양말을 빨은 정구송

영동군 양강면 묘동리 정구송(6.25 당시 27세)은 인근 마을 국촌에 사는 할머니가 궁금해 할머니 댁에 가다가 미군에게 붙잡혔다. 몇 명이 와서 "손들어" 하면서 연행한 것이다. 정구송은 인공 시절 부역이나 의용군 입대를 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인공시절 무엇을 했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고, 지서로 끌고 갔다.

양강지서에 제일 먼저 끌려간 정구송은 경찰과 미군의 심부름을 했는데, 미군 양말과 신발을 빨기도 했다. 3~4일 후에 트럭에 실려 영동으로 갔는데, 60세가 넘는 노인도 있었다. 양강지서에 구금되었던 민간인들은 트럭 1대에 태워져 영동읍으로 갔는데 인원은 약 40명이었다. 황종연(94세. 양강면 묘동리) 증언에 의하면, 이들이 양강면 방아재에서 트럭에 실릴 때 , "지나가던 주민도 불러서 태웠다"고 한다.

앞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연행된 영동군 민간인들은 어떠한 심사도 없었다. 극히 일부가 심문을 당했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못했다. 영동읍에 집결된 사람들은 1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했다. 특히 젊은 층은 아예 심사대상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실제 부역 혐의로 연행되어 거제도로 끌려간 것인가? 이 중 일부의 착오가 있어 혐의와 무관한 사람들이 고초를 겪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실적이 높으면 휴가를 보내 준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국군을 포함한 연합군이 영동에 복귀한 것은 1950년 9월 26일이다. 그런데 포로수용소에 구금시키기 위해 마을별로 다니며 연행한 것은 9월 27일부터 29일 사이다. 과연 수복하자마자 군인과 검찰, 경찰이 부역자를 선별할 수 있었을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충북 민간인 중 포로수용소 수감자 명부
▲ 충청북도 시군별 일람표 충북 민간인 중 포로수용소 수감자 명부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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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무대(CIC) 영동분견대가 영동군 내 검찰과 경찰 기관장 회의를 소집한 것은 1950년 12월 23일이었다. 그날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설치를 결의한 것이다.(2008,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영동군 조사보고서>)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 체포한 것은 주먹구구식이었다. 이는 위의 다양한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렇다면 군인들은 의용군 참가 여부나 부역 참여 여부와 상관없이, 왜 마구잡이로 잡아 들여 거제도포로수용소로 보냈을까?

강형식은 "포로 한 사람 잡아가면, 계급이 올라가고, 휴가를 뭐 일주일을 보내니 뭐니, 그런 소문이 있었어요" 라고 한다. 물론 소문이 진실은 아니다. 이는 체계적인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1950년 9월 말에 미군이 부역자들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거제도로 끌려간 영동군 민간인은 307명 이상이다. 충청북도는 4,368명 이상이 끌려갔다. 이 수치에는 전쟁포로나 부역자로 검거되어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북을 선택해, 북한으로 간 사람들은 제외된 숫자다. 이 인원 중에 아무런 혐의 없이 거제도에서 3년 동안 고초를 겪은 인원이 얼마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상당수가 억울하게 고초를 겪었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어느 날 이유도 모른 채 붙잡혀 트럭에 실려 거제도로 끌려가 3년 동안 전쟁포로 대우를 받았다면...


태그:#포로수용소, #담배잎, #북한군 대위, #마차다리, #부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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