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각기동대>(1995)의 작품 포스터

영화 <공각기동대>(1995)의 작품 포스터 ⓒ 길벗영화㈜


<공각기동대>(1995)는 포스트 애니메이션 시대의 신호탄과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이 그토록 유명한 건 단지 여러 철학적 물음을 던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작품의 배경이 이제 곧 다가올 시대를 그리고 있고, 그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개봉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과도기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이 작품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6.25 전쟁이 끝난 미 군정 통치 하의 한국처럼, 수능이 끝난 후 대학교 입학 이전까지의 학생처럼. 이 글은 그런 혼란스러움을 쉽게 풀어낼 수 있도록 돕는다. 철학과 같은 인문학의 개입을 배제한 채, 순수하게 작품 자체로만 접근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국가나 민족이 사라질 정도로 정보화되어 있지는 않은 가까운 미래

공각기동대의 모든 시리즈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한다. "기업의 네트가 별을 뒤덮고 전자와 빛이 우주를 흘러 다니지만, 국가나 민족이 사라질 정도로 정보화되어 있지는 않은 가까운 미래" 이 문구에서 전자는 우리가 상상하던 미래다. 하지만 후자는 아니다. '정보화'로 인해 통합된 인류를 그린 작품은 몇 없다. 아마도 서로가 통합된 상황에서 갈등이 나오지 않는다는 게 주요 원인일 것이다. 마음과 마음이 일대일로 교환되는 상황은 서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에 그렇다.

말하자면 <스타크래프트> 게임 속에서의 '프로토스' 종족이다. 게임 내에서 프로토스는 '칼라'라는 정신망으로 생각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것으로 나온다. 개인은 그것을 통해 단체와 연결되며, 단체는 그렇게 개인이 된다. 이때, 칼라에 접속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기에 어느 정도 자율성이 있다. 하지만 칼라와의 접속을 거부할 시 그들 발언의 신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사실상 강제에 가깝다.

이러한 것은 최근 몇 년 사이 화두로 떠오른 블록체인 기술과도 연관이 있다. 완전 정보화 사회에서는 자신이 타인에게 품은 감정과 의도가, 모든 인류에게 공유되는 형태로 신뢰성을 지닌다. 그래서 완전 정보화 사회란 마치 '유토피아'처럼 기능할 수밖에 없다. 다른 점이라면 유토피아는 온전히 개인의 도덕성에 의지하는 것이고, 정보화 사회는 신뢰를 받기 위해서라도 도덕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완전 정보화 사회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완전 정보화 사회는 신뢰와 도덕 사이에서 고민하는 '누군가'가 나올 수밖에 없다.

 영화 <공각기동대>의 한 장면

영화 <공각기동대>의 한 장면 ⓒ 길벗영화㈜


그래서 <스타크래프트>에서는 칼라를 거부한 이들이 나온다. 칼라를 거부했으니 그들의 존재 자체에 신뢰성 문제가 제기되고, 집단 밖으로 추방되고 만다. 그런데 작품이 진행되며 그들 집단에게 닥친 큰 문제는, 추방된 이들에 의해 해결된다. <스타크래프트>는 그런 면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작품이다. '강제에 가까운 신뢰성'이 '비강제적인 신뢰성'보다 못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유토피아'가 '비강제적인 신뢰성'을 말한다는 점이다. 즉 <스타크래프트>에서 프로토스는 기술 사회가 도덕 사회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공각기동대>는 바로 그 부분을 다루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작품의 도입 문구에서, "국가나 민족이 사라질 정도로"라는 것은 갈등의 해결을 의미한다. 즉 그 문구는 "서로를 이해하지만, 갈등은 남아있는 근 미래"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공각기동대>의 물음은 다가올 21세기에 대한 기대가 팽배했던 1995년에 던져졌고, 그토록 발달한 사회가 지금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 무척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돈이 많으면 무조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기업의 네트가 별을 뒤덮고 전자와 빛이 우주를 흘러 다니지만

일반적으로 이야기는 외적인 갈등이 있어야 재밌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누군가'는 내적인 갈등에 해당한다. 인물이 내내 생각만 하다 끝나면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으니, '철학'을 말하고 싶은 작품들은 내적인 상황을 외적인 상황과 결부시키려 한다.

하지만 정신이 온전히 공유되는 상황에서 개인의 고민과 갈등을 설정하기엔, 헤쳐나가야 할 난관이 너무 많다. 그래서 보통은 미완전한 기술로 공유되는 인류를 가정하곤 한다. 전자는 < A.I >나 <아이로봇> 같은 작품이고, 후자는 <매트릭스>나 <블레이드 러너>다.

하지만 <공각기동대>는 전자와 후자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아니, 차라리 극단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고 말하는 게 옳다. <공각기동대>에서 기계의 몸을 가진 사람(전신의체)은 많은 갈등을 안고 있다. 그들은 일반적인 사람과 구분되는 '타자'인 동시에, 자아를 의심받는 '타자'이기도 하다. 법과 제도로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어도 그들을 바라보는 세간의 인식은 '인간이 아니라 기계'다. 이러한 물음은 지금 우리가 끌어안은 그 어떠한 '이질성의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를테면 난민이나 성 소수자들이다.

 영화 <공각기동대>의 한 장면

영화 <공각기동대>의 한 장면 ⓒ 길벗영화㈜


그런데 <공각기동대>에서 '이질성의 문제'란 특수하다. 기계의 몸은 언제 어디서든 찍어낼 수 있으니 사실상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모래사장에 널린 모래알처럼 개인은 개인 자체로만 인식된다. 그렇기에 작품 내에서 집단과 단체의 갈등은 그 자체로 순수성을 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으니 그들을 구분하는 틀이 사라지고, 그것은 곧 문제가 문제 자체로만 인식됨을 뜻한다. 여기서 문제 자체라는 말은 사건을 둘러싼 여러 불순물이 사라짐을 뜻하고, 그것은 곧 철학의 형태를 띠게 된다.

여기까지는 여타 작품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공각기동대>의 논제는 '정신의 확장'에 있다. 작품에서 '전뇌'라고 불리는 '뇌의 데이터화'는 인류의 사고를 네트워크로 확장한다. 여기서 우리가 '네트워크'에 대해 알고 있는 특성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언제 어디서나 접속할 수 있고, 복사 복제가 용이하며, 확장의 제한이 없다' 이것만 보면 우리에게 이로워 보이지만, 이것은 어느 한쪽으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작품에서 인류는 언제 어디서나 접속 당할 수 있고, 복사 복제될 수 있고, 끝없이 확장될 수 있다.

다시금 <스타크래프트> 이야기를 꺼내 보자면, <공각기동대>는 기술복제시대의 유토피아에 대한 물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프로토스는 '칼라'라는 것을 통해 고도의 문명을 발달시킬 수 있었는데, 그것은 선천적으로 있던 것이다. 하지만 <공각기동대>는 인공적인 '칼라'의 구축을 통해 그것을 실현하려 한다. 한마디로, 프로토스에게 자아란 선천적으로 있던 것이기에 의심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공각기동대>의 인류에게 자아란 후천적으로 구축될 수 있는 의심의 대상이다.

이러한 의심이 이제껏 인류가 해왔던 물음의 연장선이 아니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작품이 던지는 주요 명제가 아니다. 서양 철학사는 사회를 통해 개인의 존재를 확인받는 것에서, 개인 스스로가 자아를 확인하는 것으로 변화해왔다. 그리고 자아를 확인받는 방법은 아예 사회를 해체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영화 <공각기동대>의 한 장면

영화 <공각기동대>의 한 장면 ⓒ 길벗영화㈜


데카르트는 자신이 스스로 자아를 확인하던 사람이었다. 그 당시에는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었기에 인간은 하느님의 손길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사고는 타자(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데카르트는 이렇게 묻는다. 지금 내가 자아에 대해 묻는 것도 하느님의 뜻이지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나'의 존재는 확실하다. 당시에 이러한 데카르트의 발언은 굉장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는데, '나'의 존재가 확실하다는 건 하느님을 통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졌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신에게 배반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데카르트의 사고를 곧이 받아들이기엔 난점이 있다. 데카르트의 사고는 사고의 발원지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그 시대에는 인간의 사고가 머리(뇌)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생각하기 위해선 뇌가 있어야 하는데, 뇌는 신체 일부이니 사실상 생각의 증명이 자신의 증명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신체 일부를 외부로 확장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의족'과 같은 것이 있다. 안경처럼 눈을 돕는 기구도 있다. 이때, 뇌가 하는 기능을 대체하거나 도울 수 있는 것이 생긴다면? <공각기동대>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그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작품에서 뇌는 외부기관이다. 신체를 통해 자신을 확인받던 물음이 통하지 않는다. 신체 밖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으니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무언가가 명확하게 따져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주관성이 없다. 모든 생각과 감정이 공유되고 그래야만 신뢰성이 보장되는 사회는 공정하고 투명한, 객관성이 보장된 사회다. 하지만 그 속에서 개인은 개인의 선택지를 보장하는 주관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작품의 주인공 '쿠사나기 모토코'는 바로 그것을 찾아 헤매고 있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결론적으로 이 작품이 심오하게 느껴지는 건 우리 시대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같은 얼굴로 나타나 공포감을 심어주는 누군가, 같은 인격을 가졌지만 나보다 뛰어난 신체를 가진 누군가. 이러한 문제는 우리의 자리, 우리가 서야 할 곳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문제, 몸과 마음에 대한 경우의 수가 2x2배수로 나타난다. 기존 우리의 물음이 4배로 확장되는 것이다. 

 영화 <공각기동대>의 한 장면

영화 <공각기동대>의 한 장면 ⓒ 길벗영화㈜


이 작품에서 쿠사나기 모토코는 그러한 물음을 모두 담은 인물이다. 그렇기에 우리보다 깊은 고뇌를 하고 있다. 쿠사나기 모토코는 인간이자 기계이며, 기계이자 인간이다. 또한 개인이자 사회이며, 사회이자 개인이다. 다섯 살 무렵부터 기계의 육신에서 자랐으니 사실상 인간으로서의 기억은 없다. 그럼에도 그는 여성으로 태어났음을, 그 주체성을 잊지 않으려 여성형 의체를 택한다. 이 작품에서 그는 '공안 9과'라는 방첩기관에 소속되어 있으니 굳이 힘에서 밀리는 여성형 의체를 택할 이유가 없음에도 그렇다. 그리고 그 의체는 유지비용이 무척 비싸고, 방첩기관이 비용을 대주고 있어 사실상 신체가 국가에 귀속되어있다.

줄곧 강조하는 것이지만, 이 작품은 자아에 대한 물음보다 주체성에 대한 물음이 더 크다. 이 작품이 자아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게 맞지만, 그건 이미 오래전 데카르트가 끝냈던 것이다. 아니, 애초에 육신을 벗어나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용이 불가하다. 이 작품에서 자아를 가진 것들은 서로가 가진 차이를 인정하지만, 신뢰하지 못해 끊임없이 고뇌한다. 원작 만화에선 '후치코마' 로봇이 자아를 터득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기계와 인간 사이에 격차가 없음을 말한 바 있다. 결국 이 작품에서 '인형사'는 기계와 인간 사이의 차이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기계가 하나로 통합되는 네트워크 속에서, 개인 간의 기억을 공유하게 되며 벌어지는 신뢰성의 문제에 관한 이야기다.

이해가 안 간다면, 지금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만들어진 가상화폐가 어떤 상황을 겪는지 떠올려 보면 된다. 비트코인이 불안정한 것은 그 기술력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비트코인의 가치를 보장해줄 기관이나 단체가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신뢰성의 문제다. 신뢰성이 없는 비트코인의 가치는 사소한 것에도 폭등하고 폭락한다. 그러니까 <공각기동대>의 사회는 인간의 가치가 비트코인이 된 사회라고 볼 수 있겠다. 서로가 서로에 의해 확인받지만, 막상 그 속에서 개인의 가치는 쉽게 변화하고 흐릿해진다. 결국 신뢰성을 보장하는 장치가 신뢰성을 보증하지 못하게 되는 역설에 빠진다.

그래서 쿠사나기 모토코는 오직 자신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는 그가 겪는 고민을 명쾌하게 해결해주지 못한다. 작품 중간에 겐지 카와이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시퀀스에서는, 그이거나 그와 같은 의체를 사용하는 누군가의 모습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작품은 길거리의 시민과 쇼윈도 안의 마네킹을 교차로 보여줌으로써 신뢰의 문제를 부각한다. 그 속에서 쿠사나기 모토코는 본능적으로 자신과 반대되는 것을 찾으려 한다. 기계의 몸으로 잠수를 즐긴다든가, 인간이자 기계인 자신에 반하는 기계이자 인간인 인형사를 찾는다든가.

 영화 <공각기동대>의 한 장면

영화 <공각기동대>의 한 장면 ⓒ 길벗영화㈜


이러한 것은 결국 반항적이라는 표현으로 정리된다. <스타크래프트>에서 프로토스는 그들의 신뢰성을 제거한 이들로부터 구원받는데, 이 작품에서의 쿠사나기 모토코 또한 신뢰성을 제거하려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의 연합, 고리를 통해 서로의 신뢰성을 보장받는다는 것은 그 결합 밖의 침입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공각기동대>에서 인형사를 인정하지 못하던 이들은, 그러한 취약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것은 곧 인간에 의해 규정되던 사회가 사회 그 자체로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의 주체에서 밀려나 타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네트는 광대해"

그렇다면 작품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신뢰의 영역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어떠한 이념이나 사고 밖의 것을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작품을 보면 쿠사나기 모토코의 육신이 유독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광학미채(착용자를 투명하게 만드는 기구) 사용 시에 전신 타이즈를 착용하는 것, 잠수할 때 두드러지는 잠수복의 외형, 작품 마지막에 전차의 해치를 뜯어내며 파괴되는 수족 등.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곧, 육신에 갇힌 사고를 외부로 확장하는 것이다. 작품은 기계의 몸에서 자아가 형성되든 인간의 몸에서 자아가 형성되든 간에, 그것이 별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게 '자아'라는 결정체임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쿠사나기 모토코는 "네트는 광대해"를 외칠 수 있던 것이다. 결국 쿠사나기 모토코의 결론이 우리에게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아니라 '나 자신'을 규정하는 건 자아라는 '핵'이기 때문이다. 인종문제나 남녀문제, 국가와 종족을 넘어서 그 자체로만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의 물음은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정리될 수 있다. "나는 나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모습이 사회에 둘러싸여 만들어진 허상인지 의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당신은 당신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사회에 기반하여 신뢰성을 띄는, 당연히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실들. 직장인이나 학생, 여자이거나 남자, 부먹을 좋아하거나 찍먹을 좋아하거나. 이러한 선택의 고리가 엮여 당신이라는 주체가 만들어지는데, 그 고리의 가운데에는 무엇이 있느냐는 말이다. 쿠사나기 모토코는 그 고리의 균열에서 고리 안의 공허한 무언가를 발견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고리를 이루는 중심축을 찾아냈다.

이 작품이 여러 방면으로 분석되고 있고, 그에 따라 이 작품을 보는 관객도 '무언가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게 될 여지가 있다. 실제로 작품의 그러한 면이 관객들의 지적 욕구를 자극해 작품을 시청하도록 유혹하고 있다. 하지만 니체의 '위버맨쉬'나 라깡의 '대상a'를 끌어오는 건 비겁한 행동이다. 어떤 이론을 빌려 영화나 소설을 해석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개인의 사고를 포기한 행동이다. 그 이론은 '그'의 생각이지 자기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사 우리의 사고가 암묵적으로 그들의 사상과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세계에서 벗어나려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하여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공각기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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